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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터스텔라'와 블랙홀. (스포일러 주의)
게시물ID : movie_358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러브액땜얼리
추천 : 8
조회수 : 123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11/10 23:47:10
"하늘이 만든 것에 모난 것(方物)은 없다. 
작은 벌레의 몸뚱이나 빗방울이나 눈물과 침이라 할지라도 둥글지(圓) 않은 것은 아직 없다. 
대저 산하대지(山河大地) 일월성수(日月星宿)가 모두 하늘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나 
아직 방수악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즉 지(地)가 구(球)로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저 그 형(形)은 즉 원(圓)이요 그 덕(德)은 즉 방(方)이고 
사공(事功)은 즉 동(動)이며 성정(性情)은 즉 정(靜)이라 
만일 대공(大空)에 땅이 정지하여 움직이지도 않고 돌지도 않고 괴연(塊然)히 하늘에 
매달려 있다면 즉시 부수사토(腐水死土)하고 그 자리에서 썩고 헐어 부서져 버릴 것이다…."

- 홍대용의 '의산문답'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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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일이다. 
우리 동네에 '근대화 연쇄점'이라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 없어졌으니 
아마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976년 이나 77년이 아닌가 싶다.

그 가게 안에는 조그만 테이블이 하나 있고, 
그 날 동네의 나이 지긋한, 지금 생각하면 예순이 넘었던 할아버지 한 분이
막걸리를 마시며 가게 사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제는 놀랍게도 '태양'이었는데,
가게 사장이 할아버지에게 이런 설명을 해줬다.
"태양은 커다란 불덩이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네 할아버지의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예닐곱 살 먹은 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을, 
그 할아버지처럼 오래 산 사람이 모르고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고 그래서 신문이나 심지어 그림책의 시각정보를 적절한 텍스트로 
처리하지 못하여, 근대적 수준의 과학교양을 갖추지 못한 
근대화 연쇄점의 그 할아버지의 사정을 이제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 그 할아버지가 종종 생각난다.

'태양이 불덩어리라는 사실을 노년에 처음 알았을 때,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백지의 아이에게는 편견이 없다.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보며,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며 그저 자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일생 동안 갖고 있던 과학적 사실이나 철학적 신념을 
노년에 바꿔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당혹스럽긴 해도 그건 얼마나 짜릿한 일일까.

좋은 학문이란, 그런 과정과 순간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류의 최고 지성 그리고 리딩엣지 그룹은 이미 밝혀내거나 이해하고 있지만,
일반 대중은 아직 모르고 있는 학문적 사실과 유력한 가설은 지금도 부지기수로 많다고 본다.

서두에서 인용한 홍대용의 의산문답을 잠시 보자.
조선후기 북학파 홍대용은 과학과 천체에 관심 많았다.
당시 중국 유학 도중, 서양에서 들어 온 천체과학을 공부하며 충격 받고
써 내려간 책이 '의산문답'이라고 한다.

추측이지만, 후대 알려진 사람 중 그가
거의 최초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된 조선 사람이 아닐까.

"하늘이 만든 것에 모난 것(方物)은 없다(...)
그 형(形)은 즉 원(圓)이요 그 덕(德)은 즉 방(方)이고 
사공(事功)은 즉 동(動)이며 성정(性情)은 즉 정(靜)이라(...)"

지구가 둥글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받았을 지적 충격은 얼마나 짜릿했을까.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하자.
영화 '인터스텔라'의 미덕은 기술과 서사의 조화이다. 특히, 기술.
칠판을 빼곡히 채우는 복잡한 중력방정식을, 눈에 보이는 영상언어로 시각화하여
블랙홀을 표현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

그렇게 해서 블랙홀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였다는 것은,
학교 등 인류의 어떤 정규과정체계에서도 아직 이루지 못한 성과가 아닐까.

불과 몇 백 년 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세계 대다수 였고,
백 년 전, 태양이 불덩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란 이 땅의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인류는 사람을 달에 보내고, 
무인우주탐사선을 태양계 바깥으로 보내버렸으며, 
허블망원경으로 은하계와 성운을 찍는 시대가 와버렸다.
그리고, 이 대중영화에서 블랙홀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본 블랙홀에 대한 시각적 충격은, 
기존에 갖고 있었던 블랙홀 이미지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주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보기 전 블랙홀은 막연히, 
태풍의 눈 같은 모양 그리고 블랙홀이니까 까맣지 않을까..생각했었다.

이제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스포일러가 되겠는데,
이 영화에서 그려 낸 블랙홀의 모습은 우선 밝다. 그것도 아주 밝다.
모양은 특이하게도 그리스 문자 피와 닮았다. 요렇게 'Φ' 생긴 거다. 

블랙홀의 이 모양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눈으로 보는 게 확실할 것이고,
그건 허블망원경의 성능이 훨씬 개량될 수 십 년 후의 일이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블랙홀과 양자역학의 최고 권위자와 이론물리 전문가 집단, 
그리고 야심 찬 영화자본이 최첨단 기술을 투입해 시뮬레이션해서 얻은 결과이며,
킵 손도 아주 만족했다고 하니,
일단은 이걸 가장 근접한 모양으로 상정하여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일반상대성이론의 권위자인 킵 손 교수의 방정식을 넣어 렌더링한 프레임 이미지는 
컴퓨터로 계산하는 데만 100 시간이 걸렸고, 데이타는 800 테라바이트 정도라고 한다.)

수 십 년 뒤, 블랙홀의 사진이 찍혔을 때, 
2014년의 영화 인터스텔라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것도 어쩌면 과학사적 사건이 아닐까 싶다.

생각해 보면, 블랙홀이 '보인다'는 것은 언어논리로만 따져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1. 블랙홀은 빛을 흡수한다. 
2. 블랙홀은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하는 건 아니다. 힘이 닿는 범위까지만.
3. 블랙홀의 중력이 미치는 경계선이 있다.
그 경계선의 이름은 이벤트호라이즌(사건의 지평선)이다.
4. 따라서, 블랙홀의 중력이 미치는 빛을 흡수하기 직전까지, 
끌어당겨 온 빛 때문에 블랙홀 주위는 역설적으로 가장 밝을 수 밖에 없다.
5. 그래서 블랙홀 중심은 검지만, 그 안에 블랙홀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6. 그 빛이 휘고 뒤틀려 만들어 낸 모양의 총체, 그 블랙홀 주변까지 포함하여 
그 구 모양을 우리는 블랙홀이라 부르고 손으로 가리킬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실체로서.

과학자는 만화가가 상상하는 것을 구체화하고 증명하는 사람들이고,
오늘날에는 영화감독이 그 만화가의 작업을 종종 대신한다.
그리고, 과학자와 영화감독의 공동 작업물인 영화 인터스텔라는
우리를 아득한 인식의 지평으로 인도한다.
그 상상력의 끝에서 사건의 지평선(이벤트 호라이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우리는 태양이 불덩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20세기의 어느 노인처럼
감격스런 표정을 짓게 될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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