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가라비토는 단순히 돈을 주며 아이들에게 접근했지만 많은 아이들이 의심스러워 했기에 곧 방법을 바꿨다. 가라비토는 쥬스나 케익을 사 주며 그들의 외모를 살폈다. 가라비토는 너무 어두운 피부 색깔의 아이는 싫어했으며, 부드러운 살갗을 가진 쪽을 선호했다. 그리고서는 그는 자신이 행상인, 수도사, 거지, 장애인, 노인/어린이 교육을 위한 단체의 대표라는 둥 신분을 속이며(이때 그는 복장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으며 자신의 신분을 속였다) 자신이 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 일들이란 보통 오렌지 상자를 나르는 것, 소를 옮기는 것, 사탕수수를 추수하는 것 등이었으며 약물이나 도박에 중독된 아이들에게는 각각 마약과 상금을 준다고 하며 꾀기도 했다. 그렇게 교외로 아이들을 데려와 오래 걸어 지친 아이들을 덮쳐 강간하고 고문한 후 죽였다. 그는 드물게 큰 자루에 돌과 시신을 함께 넣어 물에 가라앉히는 방법으로 시신을 처리하기도 했다.
수사의 올가미가 죄어 오는 상황에서도 그는 살인을 계속했다. 1996년 6월 8일 콜롬비아의 한 마을 보야카에서 소년이 실종되었다. 그는 5일 후 목이 절단되고, 성기가 잘려 스스로의 입에 물린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곧바로 수색을 시작했고 소년이 실종되기 전 마을의 한 가게에서 과자를 사주는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찰은 그 때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던 가라비토를 지목하고 그를 탐문수사했지만 가라비토는 그들에게 그저 과자를 사주었다고 하고 곧 풀려났다. 그는 4일도 채 지나지 않아 페레이라에서 또 소년을 살해했다.
1997년 12월 경찰은 페레이라 근처의 한 무덤에서 25구의 가라비토의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견했으나 처음엔 사탄숭배주의자들의 만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라비토는 1992년부터 1999년 4월 22일, 12세 소년을 강간한 혐의로 그가 감옥에 갇힐 때까지 총 140명의 8세부터 16세 사이의 소년들을 죽였음을 고백했다. 그는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등지의 54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질렀고, 가장 많은 살인이 일어난 곳은 그의 고향이었던 페레이라였다. 그의 피해자들 중 27명은 아직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는 엑스레이를 통한 치열 대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엑스레이 등의 의료 서비스를 받기에는 너무 가난했고 그나마 이미 촬영된 사진들도1998년에 있었던 콜롬비아의 지진으로 파묻힌 경우가 많았다.
처벌
법정에서 그는 자신이 취해 있었거나 '신적 존재'에게 자신의 몸이 지배당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138건의 살인에 대해 유죄가 선고되었고 나머지는 아직도 재판이 진행중이다. 가라비토에게 이 모든 건의 살인에 대해 1853년 하고도 9일의 징역(콜롬비아는 사형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이 양형되었으나 콜롬비아는 법으로 인해 30년 이상 범죄자를 수감할 수 없었다. 게다가 경찰의 수사를 도운 가라비토는 고작 22년 형을 받았다. 이는 당시 활동하던 다른 살인마들의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과 함께 콜롬비아 현지의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