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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는 어떤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나? #7
게시물ID : sisa_3594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7
조회수 : 271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02/11 23:43:58

전편 글 링크


#1 : http://todayhumor.com/?sisa_359310

#2 : http://todayhumor.com/?sisa_359324

#3 : http://todayhumor.com/?sisa_359339

#4 : http://todayhumor.com/?sisa_359356

#5 : http://todayhumor.com/?sisa_359372
#6 : http://todayhumor.com/?sisa_359386


7.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으로부터의 충격, 그리고 독일 사민당.

당을 침체에서 구한 것은 1905년 발발한 러시아 혁명이었다. 러시아 페체르부르크에서 짜르에게 청원하러 간 한 무리의 노동자들에게 군대가 발포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구호는 "위대하신 짜르이시여, 우리에게 빵 한 조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였다.

지극히 평화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요구에 짜르가 행한 비인간적 대응 - 군대의 발포는 곧장 전 러시아 지역의 노동자들을 총파업의 물결로 인도했다. 짜르의 전제 정치에 항거하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총파업 물결은, 밀물과 썰물을 거듭했지만 놀랍게도 1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 와중, 가장 낙후한 지역의 노동자- 농민들까지 혁명에 가세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서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당의 활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정치 총파업 전술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총파업은 경제 투쟁의 한 전술로서만 생각되어왔다. 총파업을 정치적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것은, 정당을 불신하고 노동조합을 정치 투쟁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는 생디칼리스트들의 주요 무기였다. 

당시 유럽의 분위기는 1891년 벨기에 총파업에서 시작하여 점차 사회주의당들이 정치총파업을 전술로서 진지하게 실험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러나 독일 내부 사정은 이런 사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탄압법의 기억 때문에, 노동자들은 결코 정부의 탄압을 불러일으킬 선제 공격은 시도하지 않았다. 전선은 교착상태였고, 노동조합은 관료화되어 성과를 얻기에 급급했다.

이런 독일에 훈풍을 불어넣은 것이 러시아 혁명이었다. 누구보다도,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당내 좌파들이 가장 먼저 정치 총파업을 전술로서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당연히 노동조합 관료들은 극렬히 반대했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던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광부 파업이 벌어졌고, 이 파업은 전국적 물결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부는 이것을 조직 발전의 호기가 아니라 조직의 유지에 있어서 정치적, 재정적 압박을 준 것으로 해석했다. 5월, 쾰른 노동조합 대회에서는 지도부는 정치 총파업을 의제로 올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당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베른슈타인 등 수정주의 지도자들이 정치 총파업에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이 생각하는 것은 의원단과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는 총파업을 그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치 총파업이 자유주의자들을 압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회민주당에 제휴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전술로서 유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 등 당내 좌파가 그리고 있는 총파업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우선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이 러시아 혁명을 관찰한 결과물인 <대중파업론>을 통해 정치 총파업을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일단 총파업이 시작되면 더 이상 지도부에 의해 통제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국면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국면에서 가장 낙후한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한편 노동자 대중의 의식과 조직이 유례없이 확장되고 노동자들을 혁명적 주체로 단련시킬 수 있다. 당의 역할은 노동자 대중에게 새로운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치 총파업 전술은, 결국 예나 당대회에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수정주의 지도자들은 총파업 전술에 반대하던 노동조합 지도부의 불만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이들에게 총파업 선동을 하지 않겠다고 확약해버렸다.

마침 이 무렵, 1차 러시아 혁명의 패배로 인해 독일의 투쟁 물결도 퇴조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은 의석의 절반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급진화된 당의 분위기가 패배를 가져왔다는 어처구니 없는 진단을 내렸고, 당은 더욱 더 확실하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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