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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 왕조와 타이의 로어 갑옷
게시물ID : humorbest_3611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peroSpera
추천 : 18
조회수 : 3856회
댓글수 : 8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6/08 02:17:44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6/03 14:02:16
======================================================================================================== !!무작정 반대를 누르기 전에 이 글이 뭔지는 봅시다, 개념있는 사람은 리플로 애기합니다 ======================================================================================================== 시몽 드 라 루베르(Simon de La Loubere - 1642-1729)가 그린 타이족의 풍물들 1939년까지 정식국명으로 '시암'을 사용했던 타이인들은 본래 중국 황하일대에서 거주하던 농경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황하일대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한족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자 이들은 AD 800~900년경 인도차이나 반도로 남하하게 됩니다. 1000년경의 중국 기록에 의하면 타이인들은 당시에 남쪽에서 정착지를 세우고 드문드문 거주했으며 중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앙코르와트를 세운 크메르족의 제국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타이족 촌락들은 크메르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다 전설에 의하면 수코타이를 지배하던 타이족 족장인 스리 인드라티야(พ่อขุนศรีอินทราทิตย์)가 1238년에 크메르제국으로부터 독립해 수코타이 왕조를 세웠다고 전합니다. 수코타이 왕조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록의 부재로 인해 상당히 미미한 사실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람캄행 왕(พ่อขุนรามคำแหงมหาราช - 1239~1317)이 크메르문자를 고쳐 타이문자를 고안하고, 힌두교를 믿던 크메르족과 달리 소승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타이의 문화는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됩니다. 17세기 당시 런던보다 인구나 문화적으로 더 번창했다던 아유타야의 모습을 복원한 타이 역사박물관의 벽화(위)와 아유타야 유적지에 남아있는 불탑의 모습(아래) 아유타야 왕조는 1350년경 타이족이 세운 왕조로, 아유타야를 도읍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유타야 왕조'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 왕조는 차오프라야강 일대의 평야지대를 차지함으로써 이모작, 심지어 삼모작을 통해 비약적인 쌀의 생산을 이루어냈으며, 차오프라야강의 수운교통을 이용해 주변지역과 교역을 활발하게 행하면서 탄탄한 경제력을 갖춥니다. 이를 바탕으로 아유타야 왕조는 1376년에 북쪽에 위치한 수코타이 왕조를 병합했으며 14세기에는 크메르제국의 수도 앙코르를 포위하고 치앙마이를 공략했으며, 15세기에 이르자 남쪽의 말라카와 말레이반도를 공격해 이들로부터 조공을 받아내기에 이릅니다. 아유타야 왕조는 중국의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조공관계를 가졌는데, 중국과 교역해 상업적인 이득을 추구하려는 아유타야측과 동남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이루어진 연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유타야 왕조는 극도로 정교하고도 엄격한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귀족계급 내에서도 수십여개의 등급이 존재했습니다. 또 '프라이(Phrai)' 라는 이름을 가진 평민들은 유럽사회의 농노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으며 귀족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프라이들은 납세의 의무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고있는 촌락을 통치하는 귀족들과 국왕을 위한 궁전이나 불교사원, 공공건축물을 건설하기 위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으며 병역 의무까지 지고 있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프라이들은 노예와 비교할때 '자기 스스로를 노예로 팔 수 있는 자유'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의 사회질서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었던것은 차오프라야강 일대의 고도로 높은 식량생산력 때문에 그토록 세금을 떼이고도 먹고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타이 영화 <나레쑤언>에서 코끼리를 타고 전투를 지휘하는 나레쑤언 대왕(위)과 포르투갈 용병들의 모습 (아래) 1511년 아유타야 왕조는 인도의 포르투갈 총독이 보내는 사절로부터 무역을 원하는 외교문서를 받고, 곧 이들과 교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초기 아유타야 왕조는 자신들의 속국인 말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의 행태에 대해 분노했으나 곧 교역을 재개해 1534년에는 포르투갈인들로부터 화약과 화승총을 소개받기에 이릅니다. 아유타야 왕조는 교역활동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인을 용병과 군사고문으로 고용하기도 했는데, (아유타야 왕조는 지난번 주인선 무역글에서 언급했던 '야마다 나가마사'로 대표되는 일본 무사단과 흑인용병, 네덜란드 용병도 데리고 있었습니다.) 라마티보디 2세 국왕은 이 포르투갈 용병들이 사용하는 플레이트 흉갑을 본따서 '로어'라는 갑옷을 만듭니다. 위의 사진에서 나레쑤언 대왕과 코끼리 몰이꾼이 입고 있는 갑옷이 바로 '로어' 입니다. 로어는 유럽의 플레이트메일과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어는 기존에 동남아시아인들이 가지고 있던 인도식 체인메일이나 비늘갑옷에 비해 월등히 높은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싼 제작단가와 열대의 무더위로 인해 때때로 착용자의 목숨을 위협했기 때문에 많이 보급되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병사들은 비늘갑옷이나 붉은색 군복만을 착용한채, 심지어는 웃통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채로 전투에 임했습니다. 또한 화약무기가 계속해서 발전하게 되자 로어는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결국 17세기 말엽에는 동시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지게 됩니다. 나레쑤언 대왕의 군대가 배다리를 띄워 강을 도하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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