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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 그리고 오므라이스
게시물ID : gomin_3620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립다
추천 : 2
조회수 : 28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7/09 09:08:30





 그냥 고민이라기보다 털어내고 싶기에 익명으로 글을 남겨 봅니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였다. 매미소리가 지천을 덮던 여름날이었고, 학교를 마치고 달뜬 걸음으로 집에 도착하니 반겨주는 것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였다. 낮에는 보기 힘들었던 아버지라 그 허리춤에 매달려 기뻐했다. 막 점심때인지라 안방에 나를 내려두고 서투른 솜씨로 만든 오므라이스는 내 어린 날 가장 즐거운 추억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낮에 계신 날이 많아지고, 어머니와의 다툼이 잦아졌다. 어린 나는 어째서 싸우는 걸까, 잘 몰랐지만 싸우는 날이면 내 방에 들어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리고 대화소리가 잦아들때까지 덜덜 떨었던 것 같다.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느낌을 받은지 오래지 않아 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사람들은 우리집을 흙 묻은 신발로 들어와 잔뜩 빨간 딱지를 붙이고 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어머니에 이유모를 공포심이 가슴 한 자락에 젖어 나 또한 목 놓아 울었다. 뒤늦게 돌아온 아버지는 신경질적으로 빨간 딱지를 떼었고, 머리를 긁었다. 



 그때부터 였다. 돈을 구하러 간다던 아버지가 트럭을 끌고 여기저기 발품 판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싸한 기운이 돌았던 것은. 그런 분위기가 짙어질 때면 난 으례 목소리를 크게 내고 답지 않은 애교를 부려댔다. 그래야 웃으니까. 그래도 불안했다.



 어느날 집에 혼자 앉아 티비를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오셨다. 뒤에 낯선 여자를 데리고. 여자는 네가 xx이니? 라며 날 안아들었고 난 혼란스럽게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그냥 친한 친구야. 라고 했지만 그럴리가 없었다. 바람이 난 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아버지를 추궁했을 때, 꽝 문을 닫고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신 새벽 고함소리가 아닌 집기가 부서지고, 때리는 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웠다. 어머니의 앞을 가로막은 나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개 패듯 얻어맞았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한 번 손을 내면 그 다음은 쉽다고. 뒤는 불 보듯 뻔했고 어머니는 이혼을 신청했다. 사유는 충분했고 그래. 그렇게 아버지와 멀어졌다. 우습게도 어머니의 명의로 진 빚도 적지 않아 쌀 떨어지는 날이면 손가락 빼 물고 가난하게 사는 날들. 자존심 다 버려, 추잡하게 살던 날 들.



 원망이 싹을 틔웠다. 세상에 대한 원망, 인정 없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 좀 더 깊은 뿌리 안 쪽에는 아버지의 원망이.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이 변하던 해 이혼을 했고, 그 이후로 15년이 흘렀다. 나는 취직을 했고 버는 손이 둘이라 그런지 빚고 갚고 집도 생긴 여유로운 생활을 하던 와중이었다. 겨울날 스쳐 지나가듯 본 부녀지간이 못 박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세삼스레 부성애를 그리워 하는 거니? 네 인생을 그렇게 파탄낸 사람이 보고 싶은 거야? 지금 네가 아버지를 보고 싶은 거면 지금 있는 어머니한테 배신하는 행위 아냐? 수 많은 생각이 켜켜히 쌓여갔다. 이내 인정해야만 했다.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원망같은건 우습게도 햇볕에 놓인 눈 마냥 녹아 없어졌다. 한 번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부성애가 그리워, 발품을 팔았다. 한 달, 쉬는 날마다 틈틈히 헤메이던 끝에 아버지가 있는 곳을 알았다. 지방에 있는 병원이었다. 알려준 고모의 말에 의하면 간이 나빠져 오락가락하고 돌봐 주는 사람 하나 없다고. 



 이러려고 바람 났나, 우리를 버렸나, 우리를 때렸나. 헛웃음만 나왔다.



낡은 병원에 주스를 들고 찾아갔다. 간호사실에 물어 병실을 찾았는데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온 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아서 한참동안 그러고 있다, 심호흡 하고 미닫이 문을 열었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다. 침대에 놓인 명패, 그 뒤로 보이는 앙상한 발...



뒤 돌아 도망쳤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행여 울음소리가 들릴 까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수도꼭지가 뽑힌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만 그렇게 떨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울었을 까, 세수를 하고 주스 한박스 더 사 하나는 간호사실 먹으라 주고 하나는 아버지께 가져다달라 했다.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냥 'xxx호실 xxx씨에게 가져다 주세요.' '직접 가시지...' 귀찮아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뒤에 있던 수간호사가 뭔가 감지해 낸 건지, 아니면 그냥 욕심이었는지 알겠다 했다. 그리고 연락처를 남겨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전화달라고.



 그렇게 우렁각시마냥 병원비를 내거나, 주스를 가져다 주거나. 그렇게 세 달이었다. 



꿈을 꾸었다. 이가 빠졌다. 어금니였는데 너무 쉽게 쑥 빠졌다. 꿈 속의 나는 그 어금니를 한참동안 멀끄러미 쳐다보았다. 



일어나 기분이 쌔했다. 삼 일이 지나도록 별 일이없어 괜찮겠지 싶었는데 주말에 전화가 왔다. 'xxx씨, 돌아가셨어요.' 라며. 



머릿속이 하얘져서 내려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눈물만 주룩주룩 나왔다. 왜 진작 얼굴을 보지 않았을까, 왜 한 번 말걸어보지 않았을까. 왜 손 한 번 잡지 않았나. 후회가 가득했다. 



 장례식장엔 의외로 낯익은 얼굴이 목 놓아 울고있다가 나를 보곤 바로 알아보았다. 어릴때부터 여자아이라며 마뜩찮게 생각하던 친할머니는 내 멱살을 잡고 흔들며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오냐고 버럭 소리쳤다. 근데 그 손에 힘아리가 없이 툭 떨어졌다. 



 대경하는 할머니에 식장 뒷편에 쪼그려 앉아 울었다. 소식을 알려준 고모가 할머니가 주무신다면서, 인사나 드리고 가라고 했다. 일렁거리는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절을 어떻게 했는지도 몰랐다. 



 집에 와서도 삼 일을 내내 울었다. 일을 하지 못했지만 내 사정을 알고있는 상사가 이해해주었다. 그리 삼 일을 내리울고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떳다. 마치 내 어린날 가장 기뻣던 추억처럼 말간 햇살에 시계를 보니 점심이었다. 냉장고를 둘러보다가 햄을 꺼내고, 캐찹과 계란 몇개를 꺼냈다. 



 엉성하게 썬 햄에 턱턱 덜어낸 케찹. 못생기게 부쳐진 계란인데 어째서 아버지가 해 준 오므라이스 맛이 낫는지. 부정이라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서툰 오므라이스가 아버지가 보일 수 있는 나에 대한 애정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끔 고민 게시판을 보면, 부모님과의 불화 때리는 부모님, 아버지, 어머니... 많이 본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립다. 그립고 보면 서럽다. 밉더라도...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은 얼굴을 보았으면 한다. 후회하는 시간보다 얼굴을 보며 열불내는 것이 더욱 이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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