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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 뱃놀이 -완결-
게시물ID : panic_362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60
조회수 : 3299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2/09/16 07:36:12




아낙의 기백에 올곧은 줄로만 알았던 내 뚝심이 힘없이 부러지는 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갈대자루가 꺾이듯 허무하고 맥없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이는 본래 나의 정신이 얼마나 얇상하고 볼품 없었는가를 알게하며 가슴을 아리게했다.

아낙의 혀놀림에 베이는 내 정신이 조각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낙은 내가 대답할 때까지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듯 꼿꼿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거적때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네의 위상이 칼자루를 찬 무사 나부랭이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만든다.

"낭자 옷을 걸치시지요. 제가 무례가 컸습니다."

"소녀가 도깨비가 아니라는 것을 믿어주시겠다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떨구자 아낙은 주섬주섬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아낙의 표정에는 안도감도 아닌 성취감도 아닌 거북함과 언짢음이 뒤섞인 우중충한 기운이 맴돌았다.

"..."

"..."

"무사님은 저를 욕보이셨으면서도 뜻을 금방 굽히시는군요. 흔해빠져 발에 치이는 흔한 소인배 양아치들과 진배없습니다."

아낙의 폭언에 대응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낙은 이 잠시 잠깐의 시간만으로 나를 뿌리째 흔들었고,
내 뱃속 오장육부까지 꿰듯 예리한 통찰을 보였다. 나는 아낙에게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깊은 패배감을 느꼈다.

"무사님은 그러시면서도 아직 목숨이 아까워 저 강물에 몸을 담그는 것조차 못하실 것입니다.
겉으로는 소녀에게 고개를 떨구시면서도 속으로는 아직 소녀를 완전히 믿고 있지 않으신계지요?"

나는 그 말 또한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 목을 스스로 베셔서 대장부의 기개라도 보이심은 어떠하십니다. 소녀는 무사님에게 겁탈을 당할까
벌거숭이가 되어 강물을 헤집고, 이 늦은 시간 달빛 아래 한참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떨어야 했습니다."

떨군 고개를 다시 들 용기가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는다 하여도 아낙이 짓고 있을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라 억장을 무너트렸다. 아낙과 내가 진검을 들고 합을 맞췄다면 나는 이미 목이 달아난 체 흙밭을 뒹구는
살덩어리가 되어있었을 것이었다.

천천히 흘러내리는 강물이 야속하기만 했다.

"무사님은 소녀에게 소원을 하나 빚지셨습니다."

아낙은 손을 가슴을 쓸어내리 내리며 자신을 타이르 듯 수차례 숨을 들이 내쉬었다.

"내 약조한바 무엇이든 들어 드리리다. 말씀만 하시오."

"이제 그만 무과급제에 대해선 잊으시고 속세를 떠나시지요."

"무슨..."

아낙은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아낙의 눈가에 왁칵 눈물이 차올라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내게 호소하자
강물이 불어나며 배가 넘실거렸다. 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는데도 이상스럽게 나도 아낙도 몸이
뱃바닥에 들러 붙은냥 온전하게 앉아 서로를 응시했다.

"소녀, 이제 낭군님을 뵈러오기가 지칩니다."

아낙의 눈에 맺혔던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낭군님은 무과에 낙제하시고 장원에게 칼을 뽑아드셨죠. 그 살가죽 희끄무리하고 비리비리해 보이던
사내에게 맨손으로 제압을 당하셨다니,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으셨음을 소녀도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

"허나 낭군님, 어찌 하늘이 내린 운명을 하찮게 여기시고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은 부끄러히 여기시지 않으십니까?!"

아낙의 목소리가 갈라지며 원통한 듯 격앙되어갔다.

"밤이면 낭군의 차가워진 손을 잡고 배위에 올라 담화를 짓는 것도 이제 소녀는 질렸습니다.
자신의 조강지처 조차 몰라보는 망령에게 사로잡힌 소녀의 못난 팔자에도 진절머리가 납니다!"

강물이 위로 가파르게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물살에 주체를 못하는 뱃머리가 갈 곳을 잃은 듯 정신없이 흔들리며 갈팡질팡 선회를 반복했다.

"도깨비를 낭군으로 여긴 미친년의 팔자도 이해해주셔요."

"..."

"소녀의 원입니다. 이제 가시지요. 소녀도 따라 나서겠습니다."

아낙이 흔들리는 배 위에 선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낙이 뻗은 손을 잡자 아낙의 손주변이 푸르스름하게 질려갔다.

"이 찬손을 잡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아낙이 나를 이끌어 강물로 몸을 던지자, 나의 몸은 힘을 잃은 듯 그대로 아낙에게 딸려나갔다.
힘차게 몰아치는 강물속에 빨려들며 소용돌이 속에 몸이 휘말려갔다. 사방 온통 물바다인 곳에서도
무슨 이유에선지 숨이 차오르질 않았다. 한쪽 손을 잡은 아낙의 온기가 따땃하니 기분 좋았다.

시야가 검게 물들며 아득히 잠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주변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낙의 웃음소리가 가슴을 간지르는 것 처럼 애틋했다.

눈을 뜨니 해가 중천이었다. 내가 서둘러 허리춤을 만져보자 자리에 있어야 할 칼자루가 만져지질 않았다.
나룻터 배가 주변을 돌며 유유히 흘러다녔다. 가을 산의 단풍낙옆들이 울긋불긋한 것이 뱃놀이를 떠나기에 그만으로 보였다.

주변사람에게 "내가 이곳에 얼마나 누워있었소?" 하고 묻자 대답이 없었다.
눈앞으로 나와 밤새 배위에 있었던 아낙이 뱃놀이에 한창인 배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낙은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더니 천천히 물 위를 걸으며 내게 다가왔다.
아낙이 내 앞에 손을 뻗치며 미소를 짓는데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아낙의 손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낭군님" 이라는 아낙의 목소리가 가슴을 울리며 아련하게 들려왔다.
주변에서 뱃놀이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시체가 떴다면서요?"

"말도 말어 저번에 산건너 최가댁!"

"여기 물에 몸 던지셨다는 그 무인의 집안 말씀이오?"

"아이 그러게, 그 최가댁 마님이 오늘 아침에 물 위에 떠 다니셨다지 뭐야!"

"아이구메! 이거 무당을 불러다 굿이라도 한판 벌여야지 원..."

나는 아낙의 손을 잡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낙은 말없이 웃으며 내 옆구리에 살포시 안겨들었다.

가을 날씨가 쾌청하니 나루터로 바람이 선선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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