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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어떤 날인진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bgm有)
게시물ID : bestofbest_363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자유소년
추천 : 227
조회수 : 12728회
댓글수 : 2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0/05/23 11:32:31
원본글 작성시간 : 2010/05/23 02:59:58
네, 많은 분들이 그리워하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이 서거하신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만큼은 정치적 공방을 떠나서 그분이 어떤 삶을 살다 가셨고, 왜 그분이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리셨는지 한번 생각해보면서 추모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1990년 1월 30일 민주화의 교두보로 여겨지고 있던 통일민주당이 뜻밖에도 해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름 아닌 통일민주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이 군사 독재 정권의 온상인 민정당, 공화당과 손을 잡아 '삼당합당(三黨合黨)'을 결의한 것이다. 통일민주당의 해체식장, 진행을 맡은 김영삼 총재의 목소리가 식장 안에 울려퍼졌다. "해체에 이의 없습니까?" 이에 그 어떤 정치인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독재 타도, 보수 권력의 축출을 외치던 수많은 민주화 세력의 정치인들이 국민과 양심을 속이고 독재 정부와 타협하는 길을 암묵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모든 정치인들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의 있습니다!" 단 한명. 단 한 사람만이 의석에서 손을 번쩍 들면서 외쳤다. "저는 반대합니다!" 김영삼은 애써 그의 의사 발언을 못본 척 무시하며 의결을 진행하였다. "그럼 이의가 없는 것으로... 통과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 해야 합니다!" 뜯어 말리는 동료 정치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의석에서 벌떡 일어나 천하의 김영상을 상대로 손가락질 하며 열변을 토한 사람. 불의와의 타협에 항거한 유일한 정치인. 그가 바로 12년 뒤 대통령에 당선된 '바보 노무현'이었다. 1946년, 경상남도 김해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그는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명석한 두뇌로 부상상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정도의 그였지만, 가난의 굴레는 그를 자유롭게 놔주지 않았다. 2남 3녀 중 넷째였던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비싼 등록금을 내야 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꿈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독학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지방법원의 판사를 거친 끝에 1978년 처음으로 조그마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기에 이른다. 조세 변호사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 노무현은 날카로운 논조와 논리적인 변론으로 90%가 넘는 높은 승률을 자랑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인권이니 민주화니 하는 것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1981년에 벌어진 '부림 사건'으로 인해 그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부림 사건은 부산의 민주화 세력은 잠재우기 위해 정부에서 날조한 용공 조작 사건이었다. 당시 부산의 대학생들은 공공장소에 모여 '전환시대의 논리'등의 서적을 읽으며 당시 5공화국에 대한 비판과 격조 있는 토론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교 모임이 독재 정부 치하의 안보부에 의해 용공 분자들의 반국가적 행위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 당시 대학생들의 편에 서서 변론을 펼치던 노무현은 전두환 정부의 학생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과 인권 유린 행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보안법 폐지, 국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부터 국민의 인권 보호를 위해 뛰어다니게 되었다. 이때부터 '인권 변호사 노무현'이라는 그의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1987년 대우 노동자 시위 중 사망 사건으로 인해, 제 3자 개입의 혐의로 옥고까지 치른 그는, 이듬해인 88년 김영삼의 권유로 인해 통일민주당에 입당함으로서 정치권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변호사로서는 잘나가는 편에 속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무명이나 다름 없었던 그에게 어느날 단번에 이름을 드날릴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5공 청문회. 1989년 헌정 역사상 최초로 열린 이 청문회는 5공화국 독재의 주범들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줄줄이 국회로 불려나와 심문을 받게 된 일대의 사건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개인 신상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등의 핑계를 대며 답변을 회피하고 논조를 흐리려는 그들에게 노무현은 통렬하게 맹공을 가했다. "그렇다, 안그렇다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저는 이 나라에서 가장 경륜이 탁월한 대기업의 지도자가 이 국회에서 증언을 함에 있어서 입장이 곤란하면 기억이 잘 안나는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길 바라면서 계속 질문하겠습니다." "증언을 거부할 수 있는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의원은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증언을 해주십시오. 밤을 새워서라도 받겠습니다." "증인은 안전기획부장으로 근무하셨죠? 특수한 범죄에 관해서 수사하면서 법률적인 업무를 많이 취급하시죠? 공직자의 업무에 관한 것도 취급하시죠? 그런데 정치자금법만 모릅니까?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정치자금법에 관한 규정도 모르고 어떤 정치자금이 합법적이고 불법적인지도 모르는 안전기획부장에게 이 나라의 안전을 맡겼습니까?" "항상 기업인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식구. 우리 가족! 그 가족이 죽었는데... 8천만원을 주니 못주니 싸우다가 며칠 지나니까 2천만원 더 올라갔는데, 아마 다부지게 누가 달려들었던 모양입니다? 증인은 기업인으로서 이 점에 관해서 한번 의견을 말씀해주십시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부에는 5년동안 34억 5천만이란 돈을 널럭널럭 갖다주면서, 내 공장에서 내 돈 벌어주려고 죽었던 이 노동자에 대해서 4천만원 주느냐 8천만원 주느냐 가지고 그렇게 싸워야 합니까? 그것이 인도적입니까? 그것이 기업이 할 일입니까?"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법적 개념도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통치 행위라고 마구 내질러서 국민을 탄압했던 것이, 법을 짓밟았던 것이 통치 행위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진 이 국회에 와서 통치 행위란 이름으로 국회에서 하는 질문을 거부할 수 있습니까?" 이처럼 당당하고 정곡을 찌르는 노무현의 논리에 과거 횡포를 부렸던 부패한 정치인들은 버벅대거나 궁색한 변명으로 답변하기 일쑤였고, 이는 독재 정권에 깊은 한을 품은 국민들의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이때부터 노무현의 이름은 '청문회 스타'라는 간판과 함께 전 국민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정치인 중에 지나치게 올곧고 비판적인 그를 안좋게 보는 시선 역시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시련은 곧바로 닥쳐왔다. 영남 민주화 세력의 거두로 여겨져 왔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가 다름 아닌 지금까지 그가 싸워오던 군부 세력의 민정당과 손을 잡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삼당합당(三黨合黨). 김영삼은 '사자를 잡기 위해 사자굴로 뛰어들었다.'는 식으로 그때의 결단을 정당화하지만, 많은 민주 세력의 지지자들이 권력 앞에서 타협을 보는 그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고 등을 돌리거나 아예 보수 세력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고 하여 반대한 몇 안되는 정치인 중 한명이었다. 김영삼은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다. 또한 정치적 기반이 없는 그는 당연히 향후 정치 생명을 생각해서라도 당 총재인 김영삼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최소한 다른 정치인들은 그랬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모습을 조롱 반, 경외반으로 그를 '바보 노무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정치 생활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민주당에 입당해 93년 최연소 민주단 최고위원이 된 그였지만 출마한 선거마다는 번번히 낙선하고 만다. 95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정계로 복귀하자 '전근대적 정치행태'라고 비난하며 참여하지 않은 그였지만, 그가 속한 국민통합추진회의가 신한국당(삼당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이 개명한 정당)과 합당을 하려 하자 그는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을 심판하여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며 결국 국민회의의 김대중과 손을 잡았다. 김대중은 노무현을 비롯한 국민통합추진회의 위원들을 환영했고, 그가 대통령이 되자 노무현은 정계 입문 9년 만에 처음으로 여당에 몸을 담게 되었다. 이후 그는 '지역주의의 벽을 넘겠다'고 주장하며 부산 강서을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낙선을 하는 등 그의 이상주의는 종종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지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은 그의 팬클럽인 일명 '노사모'를 만들었으니 이후 이 노사모는 그의 정치 인생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16대 대통령 경선은 그 어느때보다 시끄러웠다. 그것은 김대중이라는 거물을 이을 민주당의 후보가 모두 고만고만했기 때문이었다. 이인제, 정동영, 김근태, 한화갑, 김중권, 유종근 등 쟁쟁한 후보들이 저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를 원했고, 이는 곧 사상 최고로 치열했던 국민 경선으로 이어졌다. 이 국민경선제는 처음부터 이변의 속출이었다. 제 1 지역인 제주도 지역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한화갑 의원이 1등을 거머쥔 것이다. 이후 부산과 울산에서는 영남 출신의 노무현이 가볍게 1위를 차지하였지만, 이변은 광주에서 또다시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당히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던 이인제를 꺾고 광주에서도 노무현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후 충청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석권한 그는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당내의 불신, 대외적인 견제 등 각종 불협화음이 있었으나 정몽준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까지 단행하면서 결국 그는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의 단일 후보로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에게 '희망돼지'라는 이름의 성금이 쏟아졌고, 2002년, 그는 당당히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정권 초기부터 그는 보수 세력의 집요하고 맹렬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에게 있어 노무현은 난데 없이 나타나 그들의 집권을 10년 늦춘 '듣보잡'에 불과했다. 정권의 탈환에 혈안이 된 보수 단체는 어떻게든 노무현의 명성을 까내리기 위해 원색적인 비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명 '노무현 흠집 내기'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직설적인 언변은 국정 초기에 있어 보수 언론들에게 최고의 떡밥이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실수가 한번 터질 때마다 주요 언론 3사는 이를 대서특필하였고, 국민적 신뢰는 차츰 떨어져갔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 내의 계파 정치를 탈피해 당청의 분리를 달성고자, 나아가 국민적 통합과 정치 개혁을 이룩하고자 민주당 내의 소장파 의원들을 이끌고 독립하여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납득하기 힘든 배신 행위였고,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노무현의 지지기반은 더욱 약화되었다. 결국 2004년,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손을 잡고 노무현을 몰아내기로 결의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상 초유의 현역 대통령 탄핵 사건이었다. 이에 국민들이 분개하고 들고 일어섰다. 전국 각지에서 국민 자신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시위가 일어났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탄핵 무효를 외쳤다. 결국 탄핵 소추안은 헌법재판소에서 기각이 났으며, 직후에 있었던 4.15 총선에서도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탄핵의 위기에서 국민의 힘으로 다시 회생하는 듯 했다. 그러나 보수 세력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4.30 재보궐 선거로 과반 의석이 다시 한나라당에게 넘어가자, 노무현 정부의 추진 동력은 약화되었고, 행정수도 이전 문제, 사학법, 대북정책 등의 시책에 대해 사사건건 야당과 대립하게 되었다. 거듭되는 개혁의 실패와 노무현 정부의 지지부진한 모습은 국민들의 불신과 실망을 불러 일으켰다. 급기야는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체결 등 보수 진영과 타협하는 듯한 양상마저 보이자 유일하게 노무현의 편이였던 진보 진영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노무현은 점점 무력해지고 고립되어 갔다. 임기를 마친 후 노무현은 고향으로 내려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언론은 퇴임한 그조차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봉하마을의 그의 아담한 사택은 '아방궁'으로 뻥튀기 되었고, 그가 생일 선물로 받은 사적인 물건은 고가의 뇌물로 둔갑하였다. 급기야 그의 부인과 친인척의 뇌물 수수 사실이 의심되자 검찰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어떻게든 그의 비리를 캐내려고 들었다. 결국 검찰의 압력에 못이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화산의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평가 내리기란 쉽지 않다. 사실, 수치상으로 그의 임기동안 국민 소득이 2만 달러를 돌파하였고, 경제 규모가 1조 달러를 넘겼으며, 경상수지는 시종일관 흑자를 유지했고, 남북 교류 증진과 복지 예산 증진을 이루는 등, 대한민국은 전에 없는 호황기를 누렸다. 하지만 '서민의 대통령'이라는 이미지에는 걸맞지 않게 그런 혜택은 중산층 이하에게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고, 또한 내수 시장이 침체되어 국민의 체감 경제는 전보다 악화됐으면 악화됐지 호전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5년 내내 보수 언론과 야당의 공격에 휘청였으며 그가 과감히 내세우고 추진했던 것에 비해 성공적으로 진행된 개혁은 거의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정책적으로는 모르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수 세력의 막강한 벽 앞에서 무릎꿇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은 다르다. 그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있으면서도 국민과 같은 눈높이에서, 국민과 함께 호흡하면서 나아가려고 애썼다. 그는 부패와의 유착을 끊으려고 애썼으며, 상식이 통하는 세상, 특권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인간 노무현, 바보 노무현이 인권 변호사로 활약했을 때부터 꿈꿔왔던 것이며,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도 실천해 마지않던 절대 원칙이었다. 노무현, 그는 바보였다. 시대에 맞서 싸운 바보. 불의에 맞서 적진의 한복판에서 홀로 싸운 바보. 힘에 부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투쟁의 끈을 놓지 않은 진정한 바보. 그런 그이기에 우리 국민들은 그를 추모하고, 감사하고, 또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통령 욕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국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서 주권자의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면 전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나는 깨끗한 새시대의 첫사람이고 싶지 않습니다. 낡고 부패한 구시대를 청산하는 마지막 사람이고 싶습니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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