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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 선 대한민국 사법부(2)-진보당 조봉암 사건과 이승만
게시물ID : history_36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6
조회수 : 76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2/27 17:12:46
<짤방은 조봉암 선생>

조봉암사건도 워낙 유명하지만, 경향신문 폐간사건도 참 흥미진진한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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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조봉암 사건과 이승만

1. 김병로 이후의 사법부
김병로 대법원장의 퇴임 뒤에도 법관들은 비교적 이승만 정권의 외압에 굴하지 않고 사법부의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애썼다. 이 무렵 판사에 임용된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은 당시 법관들은 “비위에 안 맞으면 언제라도 옷 벗고 변호사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권력의 입김이 재판에서 잘 통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법원이 1958년 4월 서울대 문리대 학보에 ‘무산대중의 체제로의 지향’이라는 글을 기고한 류근일*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나, 간첩 혐의로 기소된 이태순에게 집행유예를 내린 것은 법과 양심에 따른 대표적인 판결로 꼽힌다.

2. 조봉암 사건
1) 간첩죄가 1심에서 무죄판결 : 김병로의 후임자로는 조용순 대법원장이 임명된다. 조용순 체제 출범 직후인 1958년 7월2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 온 진보당 사건의 1심 판결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당혹스럽게도 조봉암 피고인에게 간첩죄 부문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재판장은 유병진 부장판사로 류근일 사건, 이태순 교감 사건 등에서 외압에 맞서 소신판결을 내린 양심적인 법관이었다. 진보당의 조봉암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돌 정도로 이승만을 위협했던 인물이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가장 강력한 라이벌, 조봉암을 제거하기를 원했고,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조봉암은 간첩혐의를 쓰고 법정에 섰던 것이다.

2) 정권의 탄압이 시작되다 :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이 예상 밖의 가벼운 형을 받자 조용순 체제의 사법부를 길들이려 하였다. 판결 사흘 후인 7월 5일 대법원에는 ‘대한반공청년회’ 소속의 200여 시위대가 몰려와 “조봉암 일당에 간첩죄를 적용하라”,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판결에 불만을 품고 대법원 청사에 난입(이런 미친...)한 것은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야당이 거리로 나서면 금방 불법이라고 나타나던 경찰은 반공청년들이 난동을 부리는 동안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3) 굴복하는 사법부 : 사법부가 정치권력에 의해 침탈당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음에도 조용순 대법원장은 김병로 전 대법원장처럼 단호히 맞서 싸우지 못했다. 그는 7월29일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법관이라 하여 국가 목적 달성에 관한 숭고한 정신을 망각하고 편협되고 주관적인 견해만을 고집하여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복리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사실상 사법부의 울타리로서 외압을 튕겨내야 할 의무를 내팽겨친 것이다.

4) 조봉암 사형 : 제2심에서는 양이섭이 자신의 진술을 번복해 자신과 조봉암의 간첩혐의는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육군특무부대의 협박과 회유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진술하였으나, 재판부는 이를 무시하고 번복진술에 대한 증거조사도 채택하지 않았다. 마침내 1959년 2월 7일의 최종판결에서 대법원은 조봉암에 대한 기소 사유인 간첩, 국가보안법 위반, 무기불법소지 등을 인정하여 사형을 언도한다고 하면서도 판결문을 통해 조봉암에 대한 기소 사유의 배경이 된 진보당의 강령이나 정강정책 및 평화통일론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후 가족들과 변호인단이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었고 결국 조봉암은 7월 16일에 남긴 옥중성명을 마지막으로 1959년 7월 31일, 교수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

3. 법관 재임명 제도
법원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온 이승만에게 헌법에 규정된 법관의 임기 10년이 다 된 것****은 사법부를 물갈이할 절호의 찬스였다. 어느 나라나 재판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법관에 대해서만큼은 특별한 신분보장을 한다. 법관의 임기도 검사에게 특별한 임기가 없는 것처럼 별도로 명시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소련이나 일본처럼 극히 일부 국가만 예외가 있을 뿐이다. 대다수의 나라가 법관의 임기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은 이유는 헌법상 유일하게 신분 보장을 받는 법관이 임기라는 제한으로 오히려 신분 보장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제헌헌법에 법관의 임기를 두게 된 사연은 해방된 조국의 사법부를 일제와 무관한 깨끗한 법조인들만으로 채울 수 없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해방 후 10년 쯤 지나 새 나라가 젊은 법조인들을 키워낸다면 일제 시기의 별로 깨끗지 못한 경력을 가진 자들을 충분히 교체할 수 있지 않을까? 이헌환 교수는 일제 치하의 법관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도입된 임기제와 연임규정이 나중에 집권자의 의도에 따라 사법권 억압에 이용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승만은 1958년과 1959년에 걸쳐 20여명의 법관의 연임을 거부했는데, 이는 전체 연임 대상자의 4분의 1 이상을 탈락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법관의 신변을 위협하는 일이다.

4. 경향신문 폐간 사건
1) 자유당 정권의 경향신문 불법폐간 : 이승만의 외압에 흔들리던 대법원은 결국 하급심 판사들에 의해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이 사퇴 권고를 당하는 전무후무한 일을 당하게 된다. 사태의 발단은 1959년 4월30일 이승만 정권이 군정법령 88호에 의거하여 대표적인 야당지였던 <경향신문>에 폐간처분을 내린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는 폐간처분의 법적 근거로 군정법령 88호를 내세웠는데, 이 법령이 대한민국에서 법적효력을 갖느냐가 논란이 되었다. 대한변협은 군정법령 88호는 제헌헌법 실시와 함께 효력을 상실한 것으로 그 법령을 운용하는 것 자체가 명백한 위헌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향신문> 쪽은 5월5일 서울고법에 행정처분 취소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재판부는 폐간 57일 만인 5월26일 경향신문의 발행허가 취소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가처분결정을 내렸다. 재판장 홍일원 부장판사는 오필선 서울고등법원장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불러 정부 쪽 승소를 강력히 종용했고, 김두일 대법관도 역시 같은 요구를 했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자유당 간부 중에는 홍판사를 없애버리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었고, 처갓집 친척까지 은행계좌를 조사하는 등 보복을 계속했다고 한다.

2) 침묵하는 대법원 : 정부는 폐간취소 가처분 결정이 내려지자 그 날 안으로 7시간 만에 경향신문에 대해 무기정간 조치를 내렸다. 경향신문도 맞대응했는데 이번에는 서울고법에서 정부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경향신문 쪽은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사안이 시급한 가처분 신청을 3개월이 지나서야 대법원 연합부에 회부했고, 연합부는 또 2달이 지나서야 군정법령 88호의 위헌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다며 헌법위원회에 위헌여부 판단을 제청했다. 그런데 당시 헌법위원회는 참의원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구성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헌법위원회에 헌법재판을 맡기겠다는 짓을 한 것이다.

3) 4.19와 하급심 판사들의 반란 : 대법원이 사건처리조차 하지 않고 시간만 때우고 있던 도중 4·19가 발생했다. 헌법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던 대법원이 4월26일 이승만이 하야하자 하야선언 몇 시간 후 경향신문의 복간을 허용한 것이다(...). 대법원의 이런 기회주의적 태도에 가장 분개한 것은 서울고법, 서울지법 등 하급법원의 판사들이었다. 이들은 가처분결정 바로 다음 날 긴급회의를 열고 조용순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전원의 사퇴 권고를 결의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몇 년 전 신영철 사태에서와 같이 직무수행이 부적절하다고 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3·15 부정선거 당시 선거관리위원장인 김두일 대법관과 선관위원이던 변옥주 대법관이 즉각 사임 하였고, 조용순 대법원장도 사표 제출과 번의를 계속하다가 5월11일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조선일보의 보수논객 류근일과 동일인물이 맞다.
**이와 별개로, 진보당은 공보실장의 일방적인 정당등록취소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진보당은 행정소송을 제기하였지만 대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창당 4개월 만에 사라졌다. 앞서 조봉암 형사재판에서는 진보당의 적법성을 인정하였으면서도 진보당 등록취소처분 취소재판에서는 상고를 기각한 것은 세간의 사법불신을 피할 수 없는 점이다.
***2007년 9월 18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의해 진보당 사건은 이승만이 자신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진보당 사건후 52년만에 2010년 1월 20일에 대법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권고와 유족의 재심요청으로 청구된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내린 유죄 판결을 파기하는 것으로 무죄를 판결했다.
****1948년 7월 군정이 이양되고 제헌헌법이 공포되었으니, 10주년이 되는 58년~59년이 판사를 대거 물갈이할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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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광은 저서 <간원제명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뒷날 사람들이 장차 그 이름을 낱낱이 손가락질하며 논할 것이다. 누구는 충성했다, 누구는 속였다, 누구는 곧았다, 누구는 굽었다
(某也忠, 某也詐, 某也直, 某也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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