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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전략 전술
게시물ID : humorbest_3654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peroSpera
추천 : 54
조회수 : 6875회
댓글수 : 1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6/24 10:09:39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6/23 16:51:46
6월이기도 하고 해서 한국전쟁글이 올라오니 중공군에 관해 정확히는 그들의 전략 전술에 관해 서술해 보겠습니다. 흔히 일반적으로 중공군하면 "인해전술"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는 한국전쟁당시 우리 군이 엄청난 숫자의 중공군의 돌격에 압도되었던 기억때문입니다. 그들은 미군과 같은 현대적인 장비는 전혀 없이 오로지 소총 한정과 약간의 박격포, 기관총만을 가지고 아군을 유린했기에 "중공군은 쪽수로 밀어붙인다"라는 단순한 선입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중공군에 대해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매우 단편적으로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당시 그들의 전술은 경이로울 정도였고 병력의 운용과 진퇴, 기동에서 형식에 전혀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전쟁이란, 소설 은하영웅전설같이 어느 개인의 기상천외한 작전이나 기책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과 시스템에 의한 전쟁이죠. 중공군의 대부분은 근대전을 전혀 모르는 농민들에다 국민당이나 군벌군대, 심지어 도적단에서 전향한 잡다한 출신의 오합지졸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장비는 더욱이 형편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국민당군이나 군벌군대에서 형편없던 이들이 홍군에 편입되었을때는 강력한 전투력과 사기, 끈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팽덕회, 임표, 서향전, 주덕같은 주요 지휘관들이 황포 군관학교나 보정 군사학교, 운남 강무당(육군대학) 등에서 어느정도 근대전술을 배운 것도 있지만 이들과 거대한 홍군 전체를 직접 지휘한 것은 바로 모택동입니다. 개인적으로 모택동을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군사적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외의 능력은 쓰레기. 사생활에 있어서는 인간말종. 로리콘이기도 하고) 그는 소시적에 고향인 호남성에서 혁명군 졸병으로 잠시 복무하기도 했지만, 남들처럼 제대로 근대교육이나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만으로 군대를 지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전략적 시야와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결단력, 병력의 집중과 운용은 나폴레옹조차 능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승리 상당수가 적이 과소평가하고 방심했기 때문이지만, 그것을 적시에 활용하고 허를 찌른 것은 전적으로 모택동의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1950년 11월 맥아더는 "중공군은 절대 참전할 리 없다"라는 개인적 추측과 낙관만으로 사전 정찰을 게을리하고 병력을 무질서하게 진격시켜 중공군에게 허를 찔려 대참패를 당하였죠. 만약 그가 방심하지 않고 철저하게 준비한 상태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맞았다면 중공군은 설령 10배의 병력을 투입했더라도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을 것입니다. 패배의 70%는 전적으로 맥아더의 잘못된 지휘와 병력운용탓이지만, 모택동이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용하지 않았다면-일본군처럼 무턱대고 정면에서 인해전술로 공격했다면- 맥아더의 실수도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전술에 대해 몇가지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강한 적은 피하고 약한 적을 목표로 한다입니다. 국공내전이나 대장정에서 강력한 중앙군은 피하고 허약한 지방군만을 집중 공격했습니다. 한국전쟁때도 미군이나 유엔군 대신 가장 약하고 사기와 지휘력이 형편없었던 한국군만 집중 공격했습니다. 약한 적을 무찌르면 강한 적도 측면이 노출되어 약점을 보이게 되니 그들 역시 약해져 버렸습니다. 둘째, 적의 병력을 주요 목표로 삼고, 도시나 거점의 점령에는 구애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 어느 거점을 놓고 정면에서 적과 소모전을 펼치는 것입니다. 2차대전당시 스탈린그라드가 대표적인 예로, 눈앞의 도시 하나에만 집착하다보니 스스로 작전의 융통성을 잃게 했고 적이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는것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적의 주력을 격파한다면 땅과 사람은 고스란히 손에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언제 적의 역습을 받아 도로 빼앗길지 모르는 것이죠. 반대의 예가, 북아프리카의 롬멜입니다. 그는 열세한 병력으로 영국군과 맞섰지만 병력의 진퇴와 운용에 있어 그 무엇에도 얾매이지 않았습니다. 불리하다 싶으면 언제라도 확보한 영토를 버리고 퇴각했습니다. 이는 결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컴퓨터 전략시뮬게임에서조차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죠.(차라리 세이브-로드하는 쪽을 택하죠) 만약 그가 확보한 영토에 집착하고 지키려고만 했다면 영국군에게 포위되어 괴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몇몇 예를 내세워 "그가 무리한 공격을 고집하여 부하들을 희생시켰다", "롬멜은 쓸데없는 공명심만 강한 인물" 운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전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탁상공론적 주장에 불과합니다. 진짜 무리한 공격으로 병사들을 축차로 희생시키는 예는 일본군이나 소련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근거지의 확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유격전을 펼치는 빨치산이라해도 군대가 휴식하고 보충할 수 있는 후방 근거지는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제아무리 승리를 거두어도 힘은 계속 소모되고 보충이 안되니 언젠가는 패할 수 밖에 없죠. 그러나 영토란 항상 유동적인 것으로 땅 한두개, 도시 한두개에 얾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홍군은 자신의 심장부는 철저하게 지키되, 국지적인 영토 확보와 진퇴에는 전혀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셋째, "일점양면"전술이라하여,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켜 사면에서 포위한후 완전히 전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전체적, 객관적으로 본다면 홍군의 전력은 적보다 비교도 안될만큼 약했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적의 가장 약한 한점을 찾아내어 그곳에 가장 강력한 화력과 병력(적어도 3배~6배)을 집중시켜 단숨에 돌파했습니다. 또한 단지 적을 돌파하고 밀어내어 한번의 국지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주력이 적의 한점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적을 우회하여 퇴로를 차단시킴으로서 적 한부대를 완전히 괴멸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상대는 전체적으로 볼때는 단지 한개 부대를 잃은 것에 불과하지만 전선에 구멍이 뚫린 것이 되고, 이웃한 부대들은 충격을 받아 사기를 잃고 측면과 배후를 위협받기 때문에 알아서 철수했습니다. 또한 적 부대를 단지 밀어내는 것은 그들에게 후방에서 재편하고 재기할 기회를 주지만, 완전히 포위 섬멸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부대 자체를 지도에서 증발시키는 것과 같으며 재건시키는데 훨씬 더 많은 비용과 시간, 인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국공내전때 홍군의 주된 전술이었지만 한국전쟁때도 철저하게 활용되었습니다. 넷째, 모택동은 말그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라는 주의였는데, 일단 공격을 결심하면 철저하게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한곳, 적의 최대 아킬레스만을 골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으로 단숨에 몰아쳤습니다. 적은 부랴부랴 증원을 보내지만 그전에 그 부대는 괴멸되고 말죠. 말은 쉽지만 이를 위해서는 각 부대의 유기적인 협동과 끈기, 시간엄수가 가장 중요합니다. 어느 부대는 이미 공격하고 있는데 어느 부대는 아직도 행군중이라면 개별 플레이가 될 것이고 되려 각개격파당할 것입니다. 그만큼 신중하면서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기동성을 철저하게 중시했습니다. 그들은 차량이 없었기에 철저하게 도보에 의존했음에도 상대가 생각지 못한 곳으로 강행군하여 오히려 차량을 가진 적보다 더 우세한 기동성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우세한 병력으로 포위공격해도 홍군은 쉽사리 포위섬멸되지 않았고 오히려 약한 곳을 강타하여 돌파했습니다. 동시에 전략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거점에 대해서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 점령함으로서 적은 주도권을 잃기 일쑤였습니다. 이보다도 가장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이자, 그들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정보"입니다. 모택동은 무엇보다 정보확보를 중시했고 전략적 정찰, 전술적 정찰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위의 원칙은 무엇보다 정확한 정보가 있을때 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부분이 적의 약점이고 적이 얼마나 되며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과연 누가 알겠습니까?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패"라고 하죠. 너무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가장 쉽게 간과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인데,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도 정보에 많은 돈을 쓰지만 정작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정보 확보는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주만에서 그러했고 한국전쟁 발발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라크전쟁에 대해서도 "잘못된 정보로 이라크를 침공했다"따위의 변명을 하고 있죠. 이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획득하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 진짜와 가짜를 제대로 구분할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만 CIA를 비롯해 많은 정보기관들은 쓸데없이 방만하기만 할뿐이고 관료화, 경직화되어 있습니다. 들이는 돈에 비해 결과는 그다지 이죠. 또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복잡한 관료조직이다보니, 정작 중요하고 핵심적인 정보가 적시에 상층부에 올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뒷북의 연속이죠. 더욱이 우리의 정보력은 이들보다도 더 관료화되어 있고 형편없습니다. 얼마전 국정원에서 한번 증명해 주었죠. 모택동이 정보 확보에 들인 돈이나 인력은 미국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적의 심장부부터 말단까지 스파이를 심어놓고 적시에 필요한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국공내전에서 이들이 없었다면 모택동은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한국전쟁때도 영국 정보부내 소련 스파이였던 킴필비가 제공하는 정보는 50년 11월 중공군의 공세에서 맥아더를 격파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유엔군의 정확한 병력 배치와 약점에 대해 몰랐다면 그들이 무슨 수로 험한 산지에서 아군의 눈을 속이며 배후를 돌아 전개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술 정찰에 있어서도 철저하고 만전을 기해, 이들이 야간에도 험한 산악행군을 하여 적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반면 한국전쟁때 아군은 항공정찰에만 의존했고 춥다는 이유로 전술 정찰을 매우 게을리 했습니다. 그리고 어렵고 획득된 정보와 정확한 조언조차 맥아더의 참모본부로 올라갔을때는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되었습니다. 지휘관이 현지 정찰을 무시하고 자기 개인적 판단과 선입견에 함부로 의존한다면 이렇게 아작이 난다, 라는 것을 맥아더가 절실하게 증명해 주었죠. 모택동은 그런 점을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그렇기에 살아남았고 또 대륙을 손에 넣은 것이죠. 반대로, "군대를 이렇게 지휘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 장개석입니다. 국공내전이나 중일전쟁에서 그는 모택동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병력을 지휘, 운용했습니다. 그의 지휘를 보면 실로 답답하기 그지 없을 정도입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초공에서 박살나자 마치 오기를 부리듯 다음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적에 대한 정찰도, 적에 대한 연구도 없었습니다. 전 병력을 한줄로 쭉 늘어놓고 퍼레이드 하듯 진격하여 스스로 기동성과 융통성을 버렸고 어느 곳도 강한 곳이 없었습니다. 즉, 전체 병력에서만 우세할뿐 국지적으로는 되려 약해진 것이죠. 병력이란 한 곳에 집중했을때 강한 법인데 그는 이 원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부대들은 서로 전혀 협력되지 않았고 개별 플레이를 벌이다 하나씩 각개격파당했습니다. 이러면 숫적 우세는 아무 의미가 없는 법이죠. 또, 적에게 피동적으로 이리저리 끌려만 다닐뿐 스스로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적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는 홍군이 가지지 못한 항공기와 차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활용하지 못했죠. 따라서 적보다 5배나 우세한 병력과 기동성을 가지고도 그 숫적 우세를 전혀 살리지 못했습니다. 또, 한가지 비교하자면 동학군의 우금치전투입니다. 이들은 숫적으로 京軍, 일본군보다 월등히 우세했습니다. 그럼에도 모택동의 홍군과 같은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은 이들은 위의 원칙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수와 용기만 믿고 잘 방어된 일본군의 정면을 무턱대고 돌격했습니다. 이는 가장 어리석은 전술에 불과합니다. 제대로 된 지원화력조차 없이 확 트인 곳에서 말이죠. 만약 그들이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적의 보급로를 차단, 교란시켰다면 적도 모든 병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상당수 분산시켜야 했을 것입니다. 또, 현지지형에 익숙한 점을 활용해 야간에 습격했다면 적의 우세한 화력도 상당부분 반감되었을 것입니다. 또, 강력한 일본군을 피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경군부터 집중 공격했다면 그들을 각개격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긴 전봉준은 모택동이 아니었으니까요. 근본적으로 동학군 지도부부터 분열되어 있었는데다 손병준과 전봉준은 서로 협조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힘을 뭉쳐도 부족한 판에 개별 플레이를 하여 각개격파당했고, 전라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그다지 백성들의 호응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전술레벨에서 전봉준의 우금치전투와 모택동의 유격전술은 극과극의 차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모택동은 비록 현대전술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지만, 그의 전술은 현대전술과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닙니다. 동서고금 통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충실했다고 할까요. 이는 현재의 우리 군도 반드시 배우고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현재의 중국군이 한국전쟁때 보여준 그런 강력한 군대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우리나 미국, 서방은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와 최근의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그들에게 엄청난 공포심을 가지고 있고 근미래에 미국과 대등한 힘을 가진 초강대국이 될 것,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현재시점에서는 지나친 기우입니다. 지금의 중국군은 평화로운 수십년을 거치면서 과거 능력 본위의 홍군에서 관료화, 경직화된 단지 수만 많을뿐인 방만한 군대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들이 21세기에 오면서 병력을 대폭 줄이고 현대화에 집중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방의 기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유럽형의 가볍고 언제라도 적시 투입가능한 기동성 있는 부대는 얼마 되지 않고 국방이 아닌 각 省을 방위하기 위한 방어형 군대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단지 머릿수만 많을뿐 주변국에 대한 투사할 수 있는 병력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송, 명시절이나 국민당시절의 관료주의형 군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격전하던 홍군시절과는 사정이 다르니 어쩔 수 없겠지요. 앞으로도 그들이 계속 막대한 돈을 들여 현대화하려고 노력하겠지만 훨씬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어야 어느 정도 가능할 것입니다. 미국이나 서방도 하루아침에 현재와 같은 군사력을 갖춘 것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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