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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신과 의사의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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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치즈얏
추천 : 3
조회수 : 64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2/01/10 00: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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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어느 정신과의사의 회고록

 

 

이 이야기는 내가 정신과의사로 20년을 살아오면서 그 동안 만났던 수많은 환자들 중 가장 기묘했던 한 남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첫인상은 지극히 평범했다. 불그스름한 피부에 광대는 툭 붉어져 나왔고 머리 곳곳에 흰머리가 상당수 포진해있는50대쯤 보이는 보통의 중년 남성이었다. 프로필을 확인하니 만48세로 얼추 비슷했고 표정을 보아하니 이 나이 때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우울증에 관한 평범한 상담이 진행 될 것이라는 것도 쉽게 예측해 볼 수 있었다. 물론 내 예측이 완전히 틀렸고, 그 이상으로 특별했기에 나는 여기에 그와의 이야기를 남긴다.

그의 이야기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직업은 영국 유학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유학 컨설팅이나 비자관련 도움을 주는 어시스턴트 매니저였다. 그의 회사는 영국내의 수많은 대학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입학수속을 한 명 시킬 때마다 대학에서는 학비의 일정부분을 수수료로 지급했다. 그러니까 유, 무형의 차이만 있을 뿐 제품을 팔고 판매수수료를 받는 일반 세일즈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단지AS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있었는데, 일반적인 경우엔 제품에 하자가 있으면 제품을 교환해주지만 그의 경우는 일단 판매를 하고 나면 더 이상 신경 쓸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영국의 수많은 대학 중 적합한 리스트를 추려 제안만 했을 뿐 최종 선택은 고객이 직접 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겐 어떠한 책임이 없었다. 그럼에도 현실에 처한 상황이 그가 직접 고객에게 가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는 몹시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더욱이 이것은 회사차원의 대응이 아니라서 회사에 개인휴가를 내고 그의 사비를 들여 가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났다. 그는12시간이나 걸리는 런던행 비행기 내에서 그녀와의 일을 처음부터 곱씹으며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끝을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군대를 마치고 복학을 했을 때 같은 강의를 듣는 수많은 학우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쉽게 반했다. 그것은 그녀가20여명쯤 되는 여학생 중 제일 예뻐서도 아니었고 제일 뛰어나서도 아니었다. 애초에 눈에 차지 않는 여자들은 배제하고 못 오를 나무는 포기하다 보니 남은 숫자는 열이 넘지 않았다. 그 남은 무리에 속하는 여자라면 누구든 상관없었고 마침 그녀가 거기 속해있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하게 된 조별과제 수업에서 그녀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설레며 사랑해 빠졌는데 사랑의 대상으로 그녀를 선택한 건 최고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이었고 그녀도 그의 선택을 존중해 둘은 곧 사랑에 빠졌다. 그 뒤로는 여느 커플들과 다름이 없었다.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거닐기도 하고, 같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때로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 탁 트인 벤치에 앉아 서로를 향해 기대어 사랑을 말하기도 하며 평범한 연애를 즐겼다. 물론 다투기도 많이 다퉜지만 다행히 다툼의 크기가 사랑과 이별 사이를 그어놓은 경계선 밖으로 넘어간 적은 없었기 때문에 적당한 기간을 두고 화해를 하면서 나름의 알콩달콩한 연애는 계속 될 수 있었다.

둘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연인이었다. 단지 연애가 길어지면서 서로가 감추고 보여주기 싫었던 밑 낯을 하나 둘씩 들켜버리게 되면서 서서히 질려갔을 뿐이었다. 다만 여기서 그와 그녀가 달랐던 것은, 그녀는 그와 함께 하는 삶에 익숙해져 버려서,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들을 참고서라도 그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했고 그는 그녀와 함께하는 삶에 익숙해져 버려서 더 이상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것들이 설레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였다. 그는 이별의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조금만 참으면 그녀 쪽에서 먼저 얘기를 해줄 것만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미 서로의 마음이 같으니 먼저 나서서 나쁜 놈이 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하자 그는 그것이 이별을 에둘러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그는 그녀의 결심을 응원하며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해 도왔고 석사과정이1년으로 짧은 영국유학을 추천하면서 최종적으로 버밍엄 대학에 그녀를 보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자연스러운 이별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몸이 멀어졌는데 같이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연락을 해오며 그를 괴롭혔다. 처음엔 적응기간 동안 겪는 일련의 외로움으로 인한 반발작용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매일, 수시로 연락해오는 횟수가 점점 늘어갔다. 9시간이나 늦는 영국의 시차는 그녀에게 아무런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은 듯 연락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의 얘기가 단지 외로움뿐이라면 그는 당분간만이라도 충분히 받아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처음엔 왜 유학을 말리지 않았냐부터 하필이면 왜 영국이었는지, 버밍엄 이었는지, 본인의 실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해먹은 것 아니냐는 노골적인 비난까지 서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름다운 이별은 물 건너 간 듯싶었다. 이제 남은 건 서로를 원망하다가 결국 선을 넘어 구질구질해지는 이별뿐이었다. 어차피 평범남, 평범녀가 만나 평범하게 연애를 했으니 그 끝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싸우고 헤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둘의 감정이 최고조로 치닫던 새벽의 어느 날, 누군가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만 튀어나오면 조정기간 없이 그 즉시 둘의 이별이 합의될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비겁하게도 그 말을 직접 하는 대신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미뤘고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로 새롭게 상황을 이끌었다.

-나 임신했어.

뜨겁게 끓어올랐던 감정이 한 순간에 얼어붙었다. 둘 사이엔 더 이상 사랑이 없는데 사랑의 결실만 생겨나 버렸다. 그는 인정하는 어려움을 겪는 대신 부정이라는 쉬운 방법을 택했다. 분명히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원래부터 거짓말을 잘했다. 이번에도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녀를 만나 그녀의 거짓말을 확인하고 영원한 이별을 고하기 위해 런던을 거쳐 버밍엄 국제공항까지 장장15시간을 날아가야만 했고 그것이 지금 그가 몹시 화가 난 이유였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잠깐 끊어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15년 전의 먼 과거의 세세한 연애감정까지 듣고 있다간 날이 세도 모자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는데 중년의 사내는 이제 시계를 얻게 된 이야기만 하면 나머지는 별로 길지 않으니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여기서 직감적으로 시계가 이 이야기의 핵심 키워드라는 걸 깨닫고 의자를 당겨 몸을 좀 더 앞으로 가져갔다. 사내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비행기 통로 측 좌석이었던 그는 옆자리의 노신사가 너무 자주 화장실을 가는 통에 잠은커녕 제대로 생각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 다리를 오므려 비켜주기를 한 다섯 번쯤 반복했을 때, 그는 차라리 자리를 바꿔 앉자고 권유했고 미안한 표정의 노신사에게 통로자리를 내주고 나서야 겨우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긴 비행시간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이제라도 잠을 좀 청해야 했다. 하지만 눈을 감는다고 바로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머릿속엔 계속해서 그녀와, 그녀의 거짓말이 맴돌았다. 그리고 아주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불안감도 끊임없이 그를 자극했다. 이번엔 그가 화장실을 다녀오고 싶었다. 옆자리의 노신사는 어느새 쌔근쌔근 숨을 몰아 쉬며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차마 깨우지 못하고 좀 더 참아보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돌이켜보면 그는 언제나 미루기를 좋아했고 꼭 후회를 하곤 했다. 그녀와의 이별도 미루다가 이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화가 솟구쳤다. 그는 대뜸 일어나 노신사가 깨든 말든 사이를 비집고 통로로 빠져나가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좀 맑아졌다. 노신사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는 통로를 조금 서성이다가 노신사가 잠깐 뒤척일 쯤에 재빨리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그 뒤로도 한참을 잠들지 못하다가 겨우 잠깐 졸았는데 그 때 막 도착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리는 기내방송이 들려왔다. 뭐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방송이 시키는 대로 뒤로 넘어간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고 풀었던 벨트를 다시 착용했다. 공항 도착에 임박하자 기내가 이내 분주해졌다. 곧 비행기는 멈춰 섰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우르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도 얼른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었지만 옆자리의 노신사는 뒷자리의 승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다음에나 일어날 참인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 때 노신사가 그를 붙잡으며 말을 건넸다.

노인네 때문에 불편했죠. 줄건 없고 이거 받아요. 시간을 잘 사용하면 인생에 도움이 될거요. 물론 나처럼 의미 없이 쓰다간 헛 늙고 말겠지만.”

노신사가 건네 준건 아주 낡은 손목시계였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이런 거 필요 없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노신사는 거의 던지듯 시계를 건네곤 빠르게 기내를 빠져나갔다. 이까짓 거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괜히 마음이 찜찜해 영국에 있을 동안만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왼팔에 시계를 둘렀다. 시계는 정확하게 1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국과9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영국은 지금 오후430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시침을9시간만큼 거꾸로 돌려430분으로 맞추는 게 정상이었지만 이 시계는 따로 오전 오후가 구분이 되지 않았기에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정 방향으로3시간만큼 돌리는 것으로430분을 맞출 수 있었다. 그는 이 낡은 시계가 묘하게 영국의 정취와 어울린다고 느끼며 기내를 빠져 나와 버밍엄으로 가기 위해 환승게이트를 찾았다.

그는 보통1년에 한 두 번은 런던을 방문했다. 올해도 이미 한 번 다녀왔고 작년에도 두 번이나 다녀온 전례가 있었다. 관계를 맺은 영국 대학들이 에이전트 컨퍼런스를 위해 매년 초대를 해왔기 때문에 런던의 공항은 제주공항만큼이나 익숙했다. 그런데도 처음 느끼는 이질감이 강하게 그를 엄습해왔다. 분명 기분 탓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공항 곳곳에 Birmingham Airport라는 영단어가 필요이상으로 자주 보였다.

한국에서 버밍엄까지 직항은 없다. 설사 그도 모르게 갑자기 그런 노선이 생겼더라도 그는 확실히 런던을 경유해서 버밍엄으로 가는 비행편을 발권했기 때문에 이곳은 무조건 런던이어야 했다. 공중에서 하이재킹이라도 당해 노선이 변경되지 않는 이상 이곳이 런던이 아닐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이곳이 버밍엄 국제공항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황당함을 넘어서, 통제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강하게 엄습해왔다.

20분전에 비행기 안에서4시반으로 맞췄던 시계는 이제 막450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다 때려 넣어도20분 안에 런던에서 버밍엄으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이 더더욱 복잡해졌다. 그는 일단 타고 온 비행기정보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 위해 대형 안내전광판으로 눈을 돌렸다. 제일 꼭대기에 붉고 커다란 숫자로7:50 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는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똑바로 살폈다. 고장이 아니라면 지금이750분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전광판도, 인포메이션에 걸려있는 벽시계도 모조리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든 상태로 거의 몽유병처럼 환승을 하고 버밍엄에 도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봤다. 만약 그렇다면 영국시간과 일치시켜놓은 손목시계는 어째서 맞지 않는 것인지, 의문은 점점 거세졌다. 논리적 사고로는 도저히 답이 구해지지 않았다. 그도 모르는 사이3시간 뒤의 미래로 와버린 느낌이었다. 그것 말고는 이 시간과 이 장소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슬쩍 끼어들어

혹시 노신사가 건넨 시계가 처음부터 맞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요?”

라고 물으며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했는데 그는 매우 단호하게 부정했다.

도착 예정시간이 한국시간으로 새벽1시반, 현지시각으로 오후4시반 인건 확실합니다. 시계를 받았을 때가 거의 도착했을 때니 시계 속 시간은 정확했습니다.”

그럼 정말 타임워프라도 했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그는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불안한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는 공항 의자에 앉아 비현실적인 상황을 현실에 맞게 합리화 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일 완벽하고 논리적인 것은 이 모든 게 꿈으로 정리되는 것이었다. 물론 볼을 꼬집고 스스로의 뺨을 때려봐도 달라진 것 없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시계의 용두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 시침을 아까의 역방향으로 돌려 시계를3시간 전으로 맞췄다. 혹시나3시간 전의 과거로 돌아갔을 까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봤다. 역시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평소 현대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것들에 대해 애들이나 믿는 유치한 것으로 치부했던 그는 본인이 한 짓이 얼마나 우스운 짓 이였는지 깨닫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이 상황에 대해 더 이상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앞으로 그녀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손목시계는 전광판의 시간과6시간 차이로 벌어졌다. 이젠 시간을 뒤로 돌리나 앞으로 돌리나 똑같았다. 그는 별 망설임 없이 정방향으로 용두를 돌려 시간을 맞췄다.

이제 얼른 호텔에 가서 침대에 눕고 싶었다. 지금 심정으론 짐도 풀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로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지하철로도 몇 정거장이 되지 않았지만 심신이 지쳐 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는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와 택시 승강장 쪽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소변이라는 게 늘상 갑자기 마렵기 마련이니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소변을 보기 위해서 눈을 먼저 떠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의아 할 따름이었다. 그는 언제부터 눈을 감고 있었는지 잠깐 생각해봤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택시승강장 앞에서 선 채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감은 눈을 떠야 했고, 뜨고 나니 주변은 컴컴했고, 이유는 몰라도 몸은 누워있고, 바닥은 푹신했다. 일단 더듬거리며 비몽사몽간에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서야 정신이 맑아졌는데 이곳이 버밍엄 브리타니아 호텔709, 그러니까 그가 예약한 호텔방 안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그의 정신을 강하게 후려쳤다.

무서웠다.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창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호텔방의 시계는 새벽2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손목시계는 아직도8시였다. 아까 했던 망상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계의 용두를 앞으로 돌렸다.

 

그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진진했다. 애초에 정해졌던 상담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나는 이 이야기의 끝이 정말 궁금했다. 슬쩍 눈을 돌려 사내의 팔을 바라보니 낡은 손목시계가 거기 있었다.

그녀는 만났습니까?”

나는 상담과는 관계 없이 숫제 호기심으로 물었다.

아마 만난 것 같습니다. 내가 만나긴 했는데 나는 거기 없었죠.”

그가 말하길, 시계는 뒤로 돌려선 아무런 반응이 없지만 앞으로 돌리면 그만큼의 시간이 경과했다고 한다. 사라진 시간 동안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시간 속의 그는 멈춰있지 않고 그가 해야 할 일을 대신했다. 이 놀라운 시계의 효능을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인천공항에 도착해버렸다. 이후 그녀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무리는 잘 짓고 온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으니 미루어 짐작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도착한 그는 아주 본격적으로 시계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출퇴근 시간에만 잠깐씩 시간을 돌렸지만 언제부터인가 업무시간에도 조금씩 사용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로 퇴근시간으로 시계를 돌려 한동안은 퇴근 이후의 삶만 살았다. 매일 저녁을 실컷 놀았다. 놀고, 또 놀아도 다시 저녁이었다.

회사를 다닐 땐 퇴근시간만 기다렸는데 매일이 퇴근시간이니 언젠가부터 그것도 정말 지겹더라고요.”

나중엔 노는 것에 지쳐 어느 날인가엔 회사에 출근을 해보기도 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업무공백 때문에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아 그는 결국 또 시계를 돌리고 말았다. 흐르는 시간 속의 그는 잘 살고 있는데 정작 그는 멈춰버렸다. 힘들고, 지겹고, 고통스러운 것들은 모두 흘려 보내고 신나고 재미있는 것만 직접 겪으려 했는데 아무런 괴로움이 없으니 아무런 행복도 없었다.

그걸 알아차리는 데15년을 허비했습니다. 시계를 과거로 돌릴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은데, 이 시계는 미래로밖에 가지 않네요.”

그의 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났다. 이제는 내가 무언가를 해줄 차례였다. 그의 케이스는 정말 특별해서 기존 사례가 없기에 특별한 병명이 없지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선택적 단기 기억상실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들었지만 사실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오래된 망상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 단기 기억상실이 발생하고 그때마다 시계라는 매개체를 통해 합리화를 하며15년을 버텨왔던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됐건 그의 뇌 어딘가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분명했다. 이 경우엔 신체치료와 심리치료가 동시에 병행되어야 했다.

그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병원을 내원했다. 다행히 신체적으로 큰 이상소견은 보이지 않아서 약물치료와 심리치료에 중점을 두었다. 나는 그가 당연히 아무런 직업도 없을 줄 알았는데 유학 쪽으로는 상당히 유명한 회사의 이사라는 것을 알고 상당히 놀랐다. 그에겐 아내도 있었고 열다섯 살이 된 아들도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이 흐르는 시간 속의 그가 이룬 것이라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일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걸 믿어주되 살살 달래가며 시간 속의 그와 현실의 그를 일치시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치료 중간에 그의 가족들과도 상담을 병행하였는데 그의 이야기 속에 나오던15년 전 영국유학을 갔던 사람이 그의 부인인 걸 알았을 때는 정말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그의 마지막 치료 날이다. 그에겐 더 이상 낡은 손목시계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는 내게 시계를 풀어 건네며 대신 처분을 맡겼다. 선한 얼굴로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시계를 손목에 차고 그가 했던 것처럼 시계를 돌렸다. 집에 도착할 시간만큼 시계를 조금 돌렸다가 뭔 장난인가 싶어 다시 앞으로 크게 한 바퀴를 돌려 시간을 맞췄다.

오늘 저녁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요문학회 TV프로가 방영하는 날이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시원한 맥주 한 캔과 견과류를 조금 챙겨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오늘 밤의 이 여유로운 시간이 나의 일주일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괜히 조급해져서 방송 시작도 전에 맥주를 따서 먼저 목을 축였다. 단숨에 들이키는 스타일은 아니고 홀짝이는 걸 즐겼는데 거의 한 캔을 다 비워가는데도 어째서인지 아직도 방송이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여보. 오늘 왜 수요문학회 안 해? 결방 한대?”

당신도 참. 그건 어제 했잖아요.”

뭔 소리야. 수요문학회를 왜 화요일에 해?”

당신이야 말로 뭔 소리에요. 오늘 목요일이잖아요. 요즘 바빠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나 봐.”

나는 등골이 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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