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보이는 이파리들은 싱그러웠다.
눈이 시릴정도로 밝은 햇살까지 느끼고 있자니
얼마만에 외출이던가..생각해본다.
3개월.3개월만에 외출이었다.
준우아빠와 말을 섞지 않은것도 3개월,
준우가 세상을 떠난지도 3개월이 지났다.
준우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낯익은 도로와 표지판들이 보인다.
낡은 터미널 기둥들이 보이고 그 기둥 옆에 서 있는 언니가 보인다.
10년이란 시간이 길기는 길었는지
고왔던 언니의 얼굴에도 주름이 깊었고
늘상 우리가 질색하던 동네 아줌마의 모습이 보였다.
요란한 무늬의 후줄근한 치마가 보인다.
버스에서 내려 마주친 언니의 눈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발목을 교차하며 배배 꼬아댄다.
"밥은 먹었니?"
"아..아니."
"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
언니는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터미널에서도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나오는
내가 자라왔던 마을은
10년전 내가 떠날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파란 대문과
작은 텃밭이 보인다.
그리고 내가 떠날때와 똑같이 주인없는 개집과
수돗가가 보인다.
"뭐 차릴건 없지만 상부터 내올게."
언니는 분주하게 부엌으로 들어간다.
미리 준비해놨던건지 작은 상 하나를 내온다.
쉰 김치 몇조각과 오이고추,된장..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계란말이가 있다.
"얼마나 있다 갈거니?"
"글쎄.."
언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묵묵히 밥을 뜬다.
"밥먹고나서 감나무 할매집에 좀 다녀올게.
혼자 있어도 괜찮지?"
"그래,그럼."
감나무 할머니는 아직도 정정하실까.
울면서 할머니를 찾아가면 항상 홍시 하나를 내어주시곤 했다.
그리곤 옛날 얘기 하나를 해주셨다.
달디단 홍시 한입에 할머니의 옛날 옛적 얘기 하나면
울음도 뚝 그치고 해맑게 웃어대던 나..
동네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예전처럼 뛰엄뛰엄 있는 작은 집들에
작은 텃밭 하나쯤은 다들 있었고
말려놓은 고추나 털어놓은 들깨 따위가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에 서낭당이 보인다.
서낭당쪽으로 가본다.
알록달록 오색천이 묶여진 가지는 앙상했다.
주위를 둘러본다.
작은 돌들 뿐이지만 하나를 주워 들곤
높게 쌓인 돌탑 꼭대기에 올렸다.
"오랜만이네?"
뜻하지 않은 목소리에 나무 위를 쳐다본다.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진 긴 머리에
새하얀 얼굴을 한 소녀였다.
"왜?밤에만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거야?"
히죽 웃어보이는 그녀의 입꼬리는
사람의 것이 아닌것처럼 높이 올라갔다.
"두번의 기회가 있었지.
넌 지금 마지막 기회를 쓰기 위해 온걸거구.
아닌가?"
"....."
"10년만에 찾아온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나저나 심심해 죽는줄 알았어,나."
"오늘..오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세요."
그녀는 큼지막한 눈을 더 동그랗게 떠보이며 대답하지 않는다.
몇초의 시간이 흐르자 깔깔 소리내며 웃는다.
"그래,그럼.마지막 소원이니까 고민 잘해서 빌어봐."
사라졌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왱왱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건 20년도 더 전이었다.
내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내가 5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읍내에서 만난 말끔한 남자와 재혼을 했다.
남자는 우리집에 오던 날 언니를 데려왔다.
"혜원아,인사해야지-이제 오늘부터 아빠랑 언니가 생긴거야."
엄마는 싫다는데도 자꾸 내 손목을 끌었다.
손목을 끌어다 언니의 손에 들려줬다.
"안녕?난 은영이야.최은영."
언니는 이 상황이 행복해보였다.
언니의 엄마는 언니를 낳자마자 죽었다고 했다.
언니는 동생이 생겨서 좋다며 시간이 날때마다 날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내가 10살이 되던 해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서럽게 울었고
그날도 어김없이 감나무 할머니한테 갔다.
이틀밤을 거기서 자고나서야 진정이 됐고
다음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집에 돌아갔었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
말끔한 인상이었던 아버지는 어느새 수염이 텁수룩한 아저씨가 되어버렸고
눈이 시뻘겋게 되선 소주만을 찾곤 했다.
술이 모자라거나 술 살 돈이 없으면 우리를 마당에 내동댕이쳤다.
"어디가서 돈이라도 벌어와,밥만 축내는 년들아!"
그리고 내 친아버지가 엄마 앞으로 남겨주었던
집 앞 작은 밭마저도 팔아버렸다.
엄마가 키우던 감자도 배추도 다 갈아엎어졌다.
쑥대밭이 된 곳을 바라보며 훌쩍이는 날
언니는 꼭 안아주었다.
그런 아버지의 변화는 우리 자매의 사이를 더 견고히 만들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으나
술에 취한 아버지를 피해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서로를 의지했다.
그러다 서낭당을 발견했다.
"언니,이게 뭔지 알아?"
"글쎄,감나무 할매한테 물어보자."
"그래!"
할머니는 우리를 앉혀두고 서낭당 얘기를 해주셨다.
서낭당에 열심히 기도하면 소원을 이뤄준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언니와 내 얼굴은 홍조를 띄었다.
우리는 그냥 그게 사실일지 궁금했다.
단지 어린 아이들의 호기심이었고
그뿐이었는데 그날의 결과는 너무 컸다.
"언니,나 무서워."
"괜찮아,언니가 있잖아."
어둠만이 깔린 길을 걷고 또 걷고 나서야 서낭당에 도착했다.
밤길은 더 멀게 느껴졌고 낮에 보던 서낭당과 달리
오색천도,가지도,높게 쌓인 돌들도 음산해보였다.
"사..산신님!저희의 소원을 이뤄주세요."
언니가 먼저 무릎을 꿇고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언니는 내 손을 잡아 이끌어 앉혔고
우리는 두손을 꼭 모아 기도했다.
"산신님.산신님.저희 아버지를 혼내주세요!"
"맞아요!혼내주세요!꼭이요!"
정적만이 흘렀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만 있을뿐
어떤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언니는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매일매일 빌면 들어주실지도 몰라!"
언니는 내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어두컴컴한 밤길이 무섭게 느껴졌지만 언니의 따뜻한 손이 너무도 좋았다.
"응!"
그리고 그날밤 아버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해가 뉘엇뉘엇 지는데도 들어오지 않으셨다.
단 한번도 아버지는 집 밖에서 주무신 적이 없었다.
읍내에 나가는 날에도 저녁에는 꼭 들어오시는 분이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니와 감나무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이장 아저씨를 찾아가 우리의 말을 전했다.
이장 아저씨는 내 친구 동수의 아버지이기도 했고
읍내에 살던 아버지와 엄마를 이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아저씨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거참 이상하네.애들 데리고 집에 계세요."
이장 아저씨는 동네 아저씨 대여섯명을 모아 아버지를 찾았다.
집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조마조마해하는 우리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며 다독여 주었지만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흘깃흘깃 마주치는 시선에서 언니도 나와 같은 생각중임을 알았다.
어린 마음에 더 겁이 났던것 같다.
한시간이 좀 더 지나자 우린 울먹거렸다.
울먹거리는 우리를 할머니는 품에 안아주었다.
"저..저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이장 아저씨가 아니라
방앗간 최씨 아줌마였다.
"무슨 일이든?"
"그..그게요..나와보셔야 겠어요."
안절부절 못하는 최씨 아줌마를 따라나섰다.
할머니의 뒤를 쫓아가는 우리는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언니의 손은 축축했다.
그 축축한 느낌이 불쾌해 손을 빼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를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람들 틈으로 보이는 논두렁 사이에서
누런 잠바가 보였다.
논두렁에 머리가 쳐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었다.
언니는 내 손을 놓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