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은 후 언니는 한달 가까이 말문을 열지 않았다.
휑한 집안 안방에서 언니는 나오지 않았고
난 마당에 멍하니 앉아있거나 둑에 올라 걸터앉아있곤 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더 친절해졌지만
우리는 각자 사람들을 피해다니고 있었다.
"혜원아."
조그마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던 내게 언니는 말을 걸었다.
"응?"
"우리.이제 서낭당은 가지말자."
작지만 힘있게 말하는 언니에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고
언니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때와 똑같이 나는 수돗가에 앉아있다.
그때 내가 앉곤 했던 작은 의자는 이미 버린지 오래였지만
그냥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내 어깨를 언니가 톡톡 두드린다.
"이거."
언니가 내민 것은 빨간 홍시였다.
"할머니가 주시더라.너도 가보는게 좋지 않아?"
"아..내일 갔다올게."
홍시를 받아들긴 했지만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니는 마루에 앉아 내 쪽을 바라보았다.
"준우 아빠는 어떻니?"
"...."
"미안,괜한걸 물어봤네."
언니는 당황한듯 고개를 떨군다.
"나,나갔다 올게."
"어디가?"
언니의 물음을 뒤로 한채 나는 대문을 빠져나왔다.
그냥 무작정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서낭당이 보이지 않는 반대쪽 길로 무작정 걸어나간다.
얼마쯤 갔는지 벌써 빈집 한채가 보인다.
떨어져나간 문짝과 음산한 분위기가 더해진 집이다.
그리고 준우아빠가 살던 곳이기도 했다.
준우아빠는 십여년전 이 집에서 살았다.
이곳은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빈 집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음산하지 않았고
주인이 누구네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준우아빠가 세를 들어 살았던 곳이었다.
"혜원아."
내가 스물 한살이 되었을때 준우아빠는 언니와 같이 집에 찾아왔었다.
"누..구?.."
"내가 만나는 사람이야.혜원아.인사해."
11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언니도 예전의 밝은 성격을 되찾았고
그런 언니가 결혼할 사람이라며 데려온 사람이 준우아빠였다.
"안녕하세요.강우진입니다."
"아..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준우아빠는 도시에 사는 대학생이었는데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전 언니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훤칠한 키에 착하고 겸손한 남자였다.
두사람의 행복해보이는 모습에
부러움과 동경...그리고 묘한 질투심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였다.
준우아빠를 보러 간다던 언니는 수줍어했다.
어림짐작으로 언니는 오늘 밤 들어오지 않을거란걸 알았다.
나는 집 주변을 걸어다니다 서낭당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쩌면...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때와 똑같이 서낭당 나무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기도했다.
"우진씨가 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저랑 결혼하게 해주세요.."
같은 말을 되뇌이고 있는 도중에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가 위에서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어올리자
헝클어진 긴 생머리에 새하얀 얼굴을 한
열살도 채 되보이지 않는 소녀가 있었다.
"흐음-"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나무 아래로 가볍게 내려왔다.
"저..저기.."
입이 얼어붙은 듯 그녀의 존재를 물어보지도 못했다.
더듬거리기만 할뿐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저번에 들어줬잖아.니 소원."
씨익 웃어보이는 소녀였다.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지만 기절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요새 사람들은 여길 찾아오지도 않지.
넌 두번씩이나 찾아와줬으니 상을 줘도 괜찮겠어."
"저..정..말..소원을 들어주시나요..?"
"대신 세개까지만 들어줄 수 있어.
넌 이미 한번 기회를 썼으니 두번 남은거지.
그리고 그 소원이 위험할수록,
더러운 것일수록 대가는 더 커져."
"대가가 뭐죠?"
"어릴적 니가 찾아왔을땐 그래도 순진했어.
지금처럼 추악하게 이기적인 소원을 빌진 않았지.
니 탓은 아니야.
인간은 원래 나이를 먹을수록 그렇게 되지.
대신 그런 소원을 들어주려면-"
소녀는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어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니 피를 줘야해."
"피..피요?"
"그렇게 많이는 필요없어.널 죽여봤자 쓸모도 없지."
"그럼 얼마나 드리면 되죠?"
"그냥 아주 조금.조금이면 돼."
소녀는 고개를 돌려 한곳을 쳐다봤다.
소녀가 바라본 곳에는 낡은 유리조각 하나가 있었다.
아무말도 할 수 없었고 할 필요가 없었다.
소녀를 한번 바라본뒤 난 유리조각을 들었다.
소녀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히죽 웃어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괴기스러웠으나
소원만 들어준다면 사실 그녀가 진짜 산신이던 악귀던 상관없었다.
그리고 내 소원은 이뤄졌다.
이듬해 준우아빠는 고시에 합격했고 나는 그를 따라 마을을 떠났다.
언니를 볼 용기가 없었던 나는 잠든 언니의 머리맡에
편지 한장만을 달랑 남긴채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