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월 중국 귀주 육군강무학교 졸업 및 중국 육군 소위 임관 1926년 중국 국민혁명군 북벌에 참여 (중국군 소령)
1928년 중국 국민혁명군 22사단 1연대장 (대령)
용담전투 승리 (공로장 수여)
1937년 중국군 제4군단 102사단 참모장, 사단장 대리
만가령 전투 승리 (대 일본군106사단)
1939년 중국 중앙군 소장 (중앙군 최초 한국인 장성)
1939년 중국군 19집단군 참모장
1941년 중국군 19사단장
중일전쟁 상고회전 승리 (대 일본군 33, 34사단) 1943년 중화민국 육군대학 졸업
1944년 중국군 2병단 참모장
1944년 중국 지식청년군 참모장 (신편 중앙군)
1945년 중국 중앙군 중장 1945년 한국광복군 사령부 참모장
1945년 11월 중국군 중장 복귀
동북변사처 고급참모 및 한교사무처장 1948년 8월 중국군 예편 및 한국 귀국
1948년 12월 대한민국 육군 준장 임관 (전무후무 장성 임관)
1949년 1월 육군 사관학교 교장
1949년 3월 육군 소장 (최초)
1950년 6월 육군 참모학교 교장
1950년 6월 시흥지구 전투 사령관 (한강선 방어의 영웅)
1950년 7월 초대 제1군단장
1950년 9월 육군 종합학교 총장
1951년 3월 중장 진급 및 예비역 편입
주중대사 (중화민국 - 現 대만)
1980년 8월 타계
일화 1
광복후 창설된 한국군에는 사단급이상을 지휘해본 경력자는 김홍일장군밖에 없었고 따라서 육군총사령관에 가장 어울렸다. 하지만 총사령관은 일 육사출신의 병기장교인 채병덕이 보임되었다. 그리고 김홍일장군은 사관학교 교장같은 직책에 보임되었다. 한국군의 주요 지휘부는 총사령관인 채병덕의 출신에서도 알수있는것처럼 군지휘에는 무능했다. 그때 이범석장군은 김홍일장군에게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지못해 미안하다고 했다고한다.
일화 2
기습적인 북한의 남침에 지휘경험이 없었던 채병덕은 우왕좌왕하다 지리멸렬하게 북한군에게 패퇴하고있었다. 이때 시흥지구전투 사령관으로 장군이 보임되었는데 전황은 암울하였다 그때 장군은 패퇴한 장병들을 모아 3개사단을 급히 편성하였는데 말이 사단이지 연대에 지나지않은 규모였다. 하지만 장군은 패잔병을 수습하는과정에서 어떠한 질책보다는 따뜻한 밥한그릇을 주라며 명령했다고 한다. 시흥지구전투 사령부는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북한군의 남침을 7일이나 저지해내는 전공을 세우게된다
일화 3
장군의 연혁을 보면 중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별을 달았으며 광복군에서도 투신하였다. 광복군에서는 김구 주석의 설득으로 광복군 사령부 참모장을 맡기도하였다. 장군은 이봉창의사의 의거, 윤봉길 의사의 의거때 사용된 폭탄을 조달하는등 무장독립투쟁에 있어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다
일화 4
장군은 중국군에서는 중장(별 두개) 한국군에서도 역시 중장(별 세개)의 직위를 가지고있었다. 때문에 장군에게는 별 두개와 별 세개를 합하여 오성장군이라는 별칭이 생겼고 또한 업적또한 오성장군 못지않은 업적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