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도모르 (Holodomor)는 우크라이나에서 공산화 기간중인 1920~1921과 스탈린의 농장 집단화 정책 기간중인 1931~1932년 사이에 일어난 2번에 걸친 대 기근사태로서, 추정집계되는 사망자만해도 2차 홀로도모르에서만 최소 5백에서 ~최대 1천만 사이로 알려진 역사상 최악의 기근 사태이다.
이글에서는 홀로도모르와 카니발리즘에 관련된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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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우크라이나어로는 "기아로 인한 치사(致死)"라는 뜻에서 온
우크라이나·오스트레일리아·헝가리·리투아니아·미국·바티칸 시국의 정부·국회는
우크라이나에서 매년 11월 네 번째 주 토요일은 대기근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기념일이다
▲ 홀로도모르당시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사람들
▲ 홀로도모르 희생자를 기념하는 촛불행사
▲ 대기근 당시의 모습
농민들은 집단농장에 농사일에 필요한 소들을 내놓느니 차라리 도살하였다. 그 결과는 참담하여 몇 달이 지나서 비옥한 토지로 유명한 우크라이나의 농촌은 대기근을 맞이하게 되었다.
▲ 이오시프 스탈린 (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 .12 .26 ∼ 1953 .3 .5
역사에 길이남을 독재자 스탈린은 반쿨라크 운동, 반체제 인사와 사보타지 탄압, 대숙청, 홀로도모르와 소수 민족 탄압 정책으로 구 소비에트 연방의인구를 어마어마하게 줄여놓은 주범으로 꼽힌다. 대략적인 수치를 들자면 구 소련에서 2차대전으로인해 사망한 군인의 숫자가 2천만임을 감안했을때, 스탈린의 정책으로 죽어간 자국내 시민들이 최소한 4천만에서 최대 5천8백만~6천만 까지 추정집계 되어진다는 사실을 본다면 실제로 그가 어째서 그토록 역사에 길이남은 독재자가 될수있었는지를 알수있다. 이러한 공로(?)로 말미암아 붙은 그의 별명은 "그루지야의 인간 도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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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정부는 처음에는 대기근에 대한 보고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모든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지급하도록 지시받고,
▲ 대기근 당시의 어린아이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역부족이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이 굶어죽는 동안에도 소련의 농산물 수출은 증가했다.
그러는 한편 스탈린은 농장 집단화를 반대했거나 한편 외화벌이용 곡물 수탈은 계속되어 농민들의 반발이 잇따랐으나
출처 . 위키피디아
기근으로 사망한 아이들의 시신
홀로도모르가 단순한 기근사태에서 머무르기만 했다면 내 블로그에 포스팅 됬을 일은 없었을것이다.
보통 역사적으로 유명한 대기근 시기에는 천편일률적으로 예외없이 그 어두운 역사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하나의 반윤리적 사건이 존재한다.
카니발리즘(cannibalism), 바로 식인행위이다
인간의 생존에대한 본능이 이성을 잠식할때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수있다는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식인행위는 아닐까.
아래는 1920년대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찍혔던 홀로도모르사태와 관련된 식인에관한 사진자료이다.
▲ 1921년 볼가강유역에서 발견된 절단된 인간의 신체.
부가적인 설명으로 식인뒤 강근처에 버려진채
▲ 위 사진 자료가 러시아에서 찍인것인지 썰매에 실려서 이동중인 시신들이다 사진속엔 러시아어와 중국어로 자필된 간략한 내용만 남겨져있다. 이사진을 보관하고있던 중국인은 누구인가에대해 아직까지 알려진바가 없다.
▲ 러시아 Samara 항구의 한 가구에서
부가설명은 다음과같다
사진과 함께 보관된 설명들 中
"한가정의 식량창고에서 우리는 2덩어리의 사람신체를 발견했다. 툇마루안쪽에는 잘 저며진 부드러운 고기들이 있었다.
우리가 그녀에게(사진속 성인여성) 이 고기들의 출처를 묻자 그녀의 15살된 딸 Anna 와함께 아들의 무덤에서
그뒤에 더이상 남은 고기가 없어지자,
그녀의 딸들중 선택되었던 한명이 잠들어있을때 그녀는 또한 다져진 고기와 간을 그녀의 이웃들인 Aculina와 Evdokia에게
그리고 그녀가 찍힌 또다른사진
▲ 알아볼수 있겠는가? 다져진 고기가 담긴 양동이 바로위에 그녀가 자리잡고 있다. 보이는 시신의 주인공역시 그녀의 딸로 같은 인물이다
이 구성원들이 모두 그녀의 가족인지에 대한 여부는 알수없다.
▲ 같은사람에 의해서 찍힌 사진이라 추정되는 또다른 사진
이사진을 찍은사람이 개인적으로 이런자료를 수집하기위해 사진을 찍고다녔는지, 아니면 당시의 비극이 역사에 기록될것을 알고서 사진을 찍었는지에대한 여부는 필자로서는 알수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식인,즉 카니발리즘은 이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보기힘든 희귀한일도 아니었고, 사진자료를 수집하는일도 역시 별로 어렵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래 이야기는 관련된 도서중 위내용과 관련된 일부를 발췌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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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집과 민족주의에 대해서 스탈린은 굶주림이라는 무기로 대응했다.
(중략)
당시 빅토르는 열네 살이었다. 그들은 마을에 들어와 애완동물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들은 마을 사람들이 새를 잡아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빅토르의 집에서 긴 막대기로 집 밖의 마당을 쑤시고 돌아다니며 숨겨 둔 식량을 찾았다.
(중략)
마침내 빅토르는 떨면서 말했다. "그 놈이 그 애를 먹었어요." "누구를 먹었다고?" 아버지가 물었다. "야나요." "야나? 그게, 무슨 소리야?" 당황한 어머니는 빅토르에게서 시선을 옮겨 페트로를 바라보았다. "저 아래 쪽에서 살던 야나요. 그 애가 실종되었거든요. "뭐라고?" "토막이 나서 냄비 속에 들어 있었어요.
데모사이드 (Never Again Series) 中 루돌프 J. 러멜 지음. 이남규 옮김. Page126 Line24 ~ Page127 Lin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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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정보를 수집한 사진자료는 아직까지는 이정도가 전부이다. 사진만 보고싶으시다면 구글에서 홀로도모르만 검색해도 수십장의 사진이 쏟아져나오기에 자료를 구하는일은 어렵지않을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진에 관련된 내용을 알고있는 사람은 해외의 웹에서도 거의없었다. 그동안 홀로도모르와 관련된 식인관련 사진자료자체가 그냥 보고 지나치는 3류 가십거리로만 취급되었다는 반증인것같다.
물론 이런것과 관련된 내용을 추적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본인도 1차적인 목적이 흥미인것은 사실이지만 자료안에 담긴 내용과 견주어본다면 시각자료가 흥미거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개인적으로 그다지 높진않다.
수집한 이런 자료들로만 봤을때, 개인적으로 가장좋다고 느끼는건 항상 사진들과 그속의 이야기가 결합된 완전한 형태의 자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아직까지 계속해서 이와관련된 정보와 내용을 수집중이며 다른글과 마찬가지로 후에 또다른사실이 발견되거나 내용의 추가가 있을시엔 새로운 글이 아닌 이글을 수정 보완해나가면서 조금씩 글을 완성해나갈것이다.
혹시라도 홀로도모르시기의 카니발리즘과 관련된 자료를 가지고계시거나 관련된 웹을 아시는분이 계시다면 본인에게도 알려주시면 참으로 고맙겠다.
내용 출처. 위키피디아에서 홀로도모르 관련 설명글을 발췌 데모사이드 (Never Again Series) 내용중 일부를 발췌 (루돌프 J. 러멜 지음. 이남규 옮김.) 해외 블로거들의 홈페이지에서 설명을 수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