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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글을 읽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게시물ID : sisa_2349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민중의대생
추천 : 0
조회수 : 21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10/11 02:00:06

스압주의

우선 요약하면.

1.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이상하다. 드러난 성범죄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자신들에게 잠재적 성범죄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도 분노한다.

즉, 성범죄자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인종으로 생각한다.

2. 성 역할에 대한 관념이 바뀌면서 이런문제들이 초래되고 있다.

남성이 향유하던 권리와 책임을 여자들또한 맡게 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남자들, 그 분노가 표출되고있다.


전 솔직히 맞는말도 있는것같지만,

현재 남성이 받는 억압과 남성이 느끼는 박탈감은 너무하다는 생각이드네요.

(특히 아청법이랑 뭐 5초간 여성을 보면 성희롱? 이딴 개소리를 씨부리는데 말이되는 소리를해야지 그럼 시발 지하철 버스만 타면 눈감고 있어야되고 지하철 계단 에스컬레이터에서 앞에 치마입은 여자만 있으면 눈감고 ㅇ걸어야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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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섹슈얼리티1) - 여성혐오의 기원에 관하여

-괴물의 탄생

지난 7월22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는 두건의 테러가 발생했다. 해외의 유명언론들은 7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당연한 수순인양 이슬람과 알카에다를 배후로 지목했다. 그러나 막상 체포된 범인은 32세의 평범한 노르웨이 출신의 백인 청년이었다. 안드레스 베링 브레이비크 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성은 다문화주의를 반대하고, 이슬람을 혐오했으며, 기독교근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극우파였다. 그는 1500쪽 분량의 “2083:유럽 독립선언”이라는 문건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는데, 이 길고 긴 선언의 전반적인 입장은 기독교근본주의를 강화하고 다문화주의를 배격하여 이슬람을 몰아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는 “가부장제의 회복”을 주장하기도 했다. 한국, 일본, 대만을 일컬어 단일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가부장제와 가족의 가치가 잘 보존되고 있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언급했다. 다음의 기사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는 반(反)페미니즘과 여성혐오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한 성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선언문에선, 성인이 된 후 느낀 개인적 좌절감을 정치 이슈로 확장한 듯한 느낌도 배어난다. 친구들이 동등한 경제권과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여자들과 사귀며 겪는 고민을 실명을 밝혀가며 자세히 소개하고 이를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여권 신장 운동 탓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가부장제 회복이 대안이며 일본이나 한국 모델이 해결책”이라고 하는 식이다. 그는 “친구들 중 나만 여자 친구가 없다. 2011년 8월부턴 어떻게든 여자를 만날 것”이라고 다짐하는가 하면(...)”2)

“외신에 따르면 브레이빅은 183cm의 훤칠한 키에 푸른 눈을 가진 금발의 백인이지만 32살이 되도록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고 여성으로부터 사랑받아 본 적이 없다.

A씨는 인터뷰에서 “브레이빅이 여자친구를 만나고 싶어 미국에서 성형수술을 받았다”며 이마와 코, 광대뼈 수술을 받아다고 밝혔다. 또한 브레이빅이 6학년 때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은 후에 근육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3)

이것이 테러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섣부른 말이 될 것이다. 가령 이 테러의 이면에는 최근 유럽과 미국등지에서 불어 닥치고 있는 신보수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이민자에 대한 불관용의 증대와 같은 정치적 ․ 사회적 배경들이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극히 사적인 프로필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상태의 ‘범상함’ 때문일 것이다. 사건 이후 한국의 인터넷에 출몰했던 브레이비크에 대한 옹호들은 차치하더라도, 온갖 XX녀들에 대한 비난이나 선호는 브레이비크가 가지고 있던 순종적인 여성에 대한 판타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만약 이 벽안의 백인 청년이 한국에 왔다면 그 누구보다도 된장녀를 소리 높여 비난하는 인터넷마초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명확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인터넷에서 소위 “된장녀”나 “보슬아치”를 비난하며 여성들에게 인격적-성적 욕설을 놀이처럼 즐기는 한국의 ‘평범한’ 남자들과 괴물 테러범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물론 이러한 ‘인터넷 마초’들이 테러범으로 돌변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범상한 욕망의 구조가 불특정 다수(여성)에 대한 증오로 표출되고, 인종주의적인 방식으로 옮아가는 비슷한 전개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만약 이들이 동일한 성적 욕망과 판타지(‘인격적 ․ 성적으로 순종적인 예쁜 여성’이라는), 그리고 ‘박탈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면, 이 동일성은 무엇에서 연유하는 것이며 또 어떤 효과와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세요”

서울의 지하철. 광고가 하나 걸려있다. “국제결혼”이라는 커다란 글씨 옆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남성과 백인여성이 결혼식을 올리는 사진이 있다. “시민단체”가 주선한다는 이 국제결혼 광고에는 “한국남성의 성실함만으로 해외에선 이미 1등 신랑감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대체 무슨 시민단체인가 했더니 “남성연대”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 광고에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섹슈얼리티의 현 주소를 알려주는 수많은 요소들이 집약되어 있다. 이것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자면 ‘한국사회 남성들이 느끼고 있는 성적박탈감’정도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사진을 보자. 평범해 보이는 동양인 남성이 금발의 백인과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상식적이다.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국제결혼이 증대하고 있지만, 동양인 남성이 서구에서 성적으로 배척당하는 존재라는 것은 여전하다. 동양인 남성은 가부장적이고, 덩치(그리고 성기)가 작으며, 체면 때문에 제대로 즐길지도 못하고, 일만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동양인 남자의 남성성 이래봤자 기예에 가까운 무술을 제외하고는 발휘될 여지가 없다.4)

이것에는 오리엔탈리즘적인 편견이 당연히 녹아들어 있다. 알제리의 정신과 의사였던 프란츠 파농은 이 식민지적 편견이 어떻게 식민국의 사람들에게 체화되는지에 대해서 잘 기술한바 있다. 그의 저서인 《검은피부 하얀가면》에서는 프랑스에서 “미친 백인여자”와 섹스를 하고 돌아와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는 흑인남성들이 등장한다. 이들에게 백인여자와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백인처럼 느끼도록 하는 행위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열등감이 묻어있다. 그리고 이 열등감은 하필이면 백인여성을 등장시킨 이 광고에서도 당연히 읽힌다.

그러나 사실 이 광고가 향하고 있는 대상은 백인여성이 아니다. 오히려 이 광고에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남성의 성실함 만으로도 해외에선 이미 1등 신랑감입니다”라는 문구를 다시보자. 이것은 성실한 한국 남성은 해외에서는 1등 신랑감이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경에 깔아두고 있다. 요컨대 이 광고는 한국남성들의 성실함을 몰라주는 한국의 여성들에 대한 일종의 시위인 것이다.

이 광고는 인터넷상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흘러 다니던 이야기를 어느 심각하고 진지한 누군가가 현실로 구현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국의 남성들이 중앙아시아의 미녀들을 보면서 “김태희가 밭 갈고, 한가인이 김매는 곳”이라며 열광했던 것과, “된장녀”를 에서 “보슬아치”에 이르기까지 한국 여성들의 허영심과 속물성을 맹렬히 비난했던 것을 남성연대라는 이름의 괴상한 시민단체까지 만들어 가며 오프라인상의 현실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광고로 확인된 것은 한국사회를 휘감고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열등감과 박탈감들일 따름이다.

-성과 폭력

이러한 박탈감들은 점차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성폭력을 성토하는 인터넷의 댓글란에서도 기묘한 기류를 감지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한국사회에 성폭력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게 된 것은 거의 최근의 일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판사가 법정에 온 강간피해자를 가해자와 부부로 맺어주는(?) 엽기적인 일5)이 존재하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비하면 성폭력에 대한 양형과 처벌의 증가를 주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작금의 반응은 일정한 진전을 이룬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응들을 천천히 살펴보면 이런 분노들이 정작 성폭력이라는 개념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성폭력을 대하는 한국 남성들의 분노에는 어떤 기묘한 패턴이 존재한다. 기사들의 댓글란에는 성폭력에 관련된 양형을 대폭 늘려야 한다거나, 심한경우 거세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지기 일쑤다. 그러나 이런 격렬함의 이면에는 자신과 성 범죄자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숨어있다. 가령 한국에서 특히 근친성폭력 같은 것에 자주 사용되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사자성어를 생각해보자.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의 이 사자성어는 은연중에 성 범죄자를 “짐승” 혹은 “괴물”로 지칭한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상당히 높은 성범죄율을 가지고 있으며, 그토록 “변태의 나라”라고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일본에 비해서도 훨씬 높은 성범죄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성 범죄자들을 극소수의 일탈자들로 만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범죄의 원인을 다른 무언가로 돌리려는 노력도 꾸준히 존재한다. 성범죄의 증가가 성매매 특별법과 관련 있다는 논의는 이미 단골 레퍼토리처럼 존재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남자들의 성욕은 반드시 해소되어야할 무엇이고, 성매매는 그것을 해소하는 하수구와 같은 역할을 맡으며, 그래서 보호되어야할 여성들에게 해가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들의 옷차림을 성범죄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주장도 횡행한다. 야한 옷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주장은, “귀중품을 맡기지 않고 아무데나 놔두어서 절도를 당하는 것은 주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비유와 함께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 역시 상당수의 경우 성폭력이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은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민주화 시위에서 출발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리비아에서 카다피군은 반군을 강간하라는 것을 지령으로 내보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행되는 강간은 적에게 공포심과 무력감을 불어넣고, 아군의 공격성을 북돋는 “전술”로 심심치 않게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다니는 이슬람의 몇몇 국가들에서 성폭력은 종종 더욱 잔혹하게 벌어진다. 나아가 성폭력의 가해자들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가족과 친척을 비롯한 “아는 사람”이며, 장애인이나 어린이 등등 저항이 어렵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이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더욱 많다. 한국사회의 상당수의 여성들이 일생동안 크고 작은 성추행이나 폭력을 경험한다는 것은 주변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이런 주장들의 이면에는 어떤 근원적인 몰이해와 뒤틀림이 존재한다. 가령 한국의 90년대 이른바 영 페미니스트들이 활발히 벌였던 “반성폭력운동”과 지난 7월 한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슬럿워크”6)에 대해서 일부남성들은 “왜 나를 성범죄자로 만드는가?”라며 분노했다. 성범죄로부터 안전할 권리에 대한 주장이 어떻게 불특정 다수의 남성을 성범죄자로 매도할 수 있느냐는 상식적인 의문은 접어 두더라도, 드러난 성범죄에 대해서는 그토록 격렬하게 성토하는 이들이 왜 잠재적인 성범죄의 위험에 대한 언급에는 그토록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다소 역설적으로 비춰진다. 대체 이들은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성폭력이라는 개념이 한국사회에 등장하고 점차 정착해가는 과정에서 기존에 존재해왔던 어떤 행동양식들을 규제하고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존에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해왔던 성적인 언행이나 행동이 성폭력개념의 정착과 확대 과정에서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법과 처벌의 영역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에 가깝다. 다시 말하면 성폭력이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사회문화적 함의는 한국사회에 온전히 정착되지 못했다. 때문에 성폭력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은 그것과 자신을 분리하기 위한 몸짓으로 과격한 수사들을 동원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들과 나의 구분만을 강조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성찰하지는 못하는 어떤 문화적 지체현상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다.

-욕망하는 여자: 된장녀의 계보

이런 지체현상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남성들이 느끼고 있는 성적 박탈감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좀 더 핵심적인 부분은 따로 있다. 그리고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된장녀”에서 시작해서 “보슬아치”에까지 다다른 어떤 계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번 더 환기해야 하는 것은 성폭력사건에 대해서 극렬한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과 여성들을 된장녀/보슬아치라고 지칭하며 비난하는 이들이 ‘겹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된장녀”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된장녀는 일반적으로 온몸에 명품을 휘감고 다니고, 허영심과 사치에 물들어 있으며, 데이트비용과 선물을 비롯해서 이러저러한 대접을 당연하게 받고, 그러면서도 고마워하거나 감동할지 모르는 존재를 일컫는다. 이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경험담, 미디어에 등장한 몇몇 재현물, 그리고 포털이나 커뮤니티 등에서 직접 발화된 이야기들을 상상적으로 이어 붙여 만들어낸 “합성(괴)물”이다. 그리고 이 합성(괴)물을 만들어낸 상상력의 근간에는 오늘날 남자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가 있다.

이 공포는 무엇에 대한 것인가? 여기에는 기존에 존재하고 있다고 여겨지던 어떤 교환체계의 붕괴가 있다. 즉 남자는 여자에게 금전과 시간을 투자하고, 관계가 심화될수록 여자가 남자에게 헌신하게 되는 것을 통해서 그것을 회수한다는 공식 말이다. 그러나 된장녀라는 존재는 이 회수의 공식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는 지점을 묘사한다. 밥을 사주거나, 어려운 과제를 대신 해주거나, 심지어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한 돈을 모아 명품을 사줘도 미지근한 반응만이 돌아올 뿐이고, 외제차를 끌고 나타난 부잣집 도련님에게 달려가는 된장녀의 모습을 묘사한 클리셰들은 남성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만족시킬 수 없다’는 좌절감은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욕망하는 그녀의 욕망을 나의 능력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다는 어긋남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이 간극이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와 낮은 교육수준 같은 것에 의해 일정부분 극복 가능했었던 반면에, 민주주의의 진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필요에 의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고, 이에 따라 여성들의 억눌렸던 욕망이 비교적 자유롭게 분출되면서부터는 이 간극의 존재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된장녀의 계보에서 하나의 큰 획을 그었던 “루저녀”사건은 매우 상징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180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이 방송에서 등장한 이후, 우리는 그야말로 범사회적이라고 할법한 남성들의 분노를 볼 수 있었다. 이 발언이 차별적인 함의를 내포한다는 것은 굳이 논박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문제이지만, 이에 대한 반응이 이상하리만치 격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7). 그리고 이런 격한 반응의 한켠에는 적어도 외모에 있어서는 언제나 ‘평가하는 자’였던 남성들이 순식간에 ‘평가받는 자’로 격하 당했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과 분노가 있었다. 여성의 외모와 신체에 대한 실로 방대하고 상세한 품평의 기준들에 비하자면 180cm라는 기준은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은 여성이 나름의 기준으로 남성의 외모를 평가하고 그것을 욕망의 지표로 삼기 시작했다는 위협적인 선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된장녀라는 존재는 이런 변화에 대한 공포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도덕적 대비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된장녀는 등장이후 빠르게 언론과 미디어 등에 소개되었고, ‘나쁜여자’의 이념형을 순식간에 잠식했다. 이후로 원두커피를 마시거나, 조금 비싸 보이는 가방을 들거나, 남자에게 밥을 얻어먹는 여자들에게는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기묘한 느낌의 “혹시 된장녀?”라는 말이 의례 뒤따르게 되었다. 된장녀가 공공의 지탄을 받는 존재로 격상(?)되면서 동시에 여자들은 자신이 된장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순간순간마다 증명해야 하게 되었다. 이 반대의 사례로 제시되었던 “개념녀”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행위에 대해서 무엇을 된장녀라고 칭하고, 무엇을 개념녀라고 칭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남자들의 판단에 달려있기 때문에 XX녀들의 계보는 여성들의 행동에 대한 제약의 시도로 작동하게 된다.

-도덕과 평등에의 주장

요약하자면, 오늘날 한국의 상당수의 남성들은 이성애적인 성애에 있어서 급격한 환경변화속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의 근간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진전이 있고, 그것에 의해서 이루어진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다소간의 상승이 있다. 여기에는 성범죄라는 개념의 강화와 확장에 의해서 여성의 몸에 대한 물리적 접근에 대한 제제가 훨씬 더 강해진 상황이 있고, 고등교육과 소비시장의 발달 속에서 ‘주체화’되어가는 여성들이라는 두개의 변화지점이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남성들은 성범죄에 대한 인식의 지체현상에 시달리는 동시에, 스스로의 욕망을 가지기 시작한 여성들로 하여금 선택받아야 하는 위치에 놓이는 수모(?)를 당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XX녀의 계보들로 대표되는 인터넷상의 반여성적 수사의 확산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반여성적인 수사들은 사실상 두개의 운동을 하고 있다. 그중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금지”의 움직임이다. 이 금지에서 익명의 남성들은 여성이 쾌락(단지 성적 쾌락을 뜻하는 것만은 아닌)의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것을 방해하고, 막으려고 한다. 이때 이 익명의 남성들이 들이미는 것은 일종의 도덕률이다. “착한여자(개념녀)”가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응징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협박이 신상털기를 비롯해서 온라인 오프라인 상의 크고 작은 폭력에 의해 강제된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개념녀는 된장녀 만큼이나 상상과 허구의 산물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여성에게 가해지는 볼멘소리와 폭력들의 이면에는 남성들간의 권력투쟁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익명의 남성들이 주장하는 것은 “평등”, 좀 더 정확하게는 “(여)성의 평등한 분배”이다. 특히 양극화와 불안정성의 증대, 노동유연화 같은 것에 의해서 “이성애 정상가족”을 꾸릴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좌절은 이러한 불만과 불안들을 점차 증대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평등의 투쟁은 대체로 대놓고 행해지기보다는, 은밀하게 우회적으로 행해진다. 가령 “사회지도층”에 대한 불신과 규탄 속에는 그들만이 즐기고 있다고 가정되는 성적쾌락(텐프로, 연예인 성매매, 스폰서 등등)에 대한 “쾌락의 평등주의”가 암암리에 숨어있다. 아마도 이 두 운동의 결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故 장자연씨의 죽음에 대한 반응들일 것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것이 고위층들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였다는 지점이었으며, 이것이 여성의 신체를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남자들의 권력체계에서 비롯된 성폭력이라는 사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오늘날 반여성적 수사들에 동원되고 있는 도덕과 평등은 여성의 종속이라는 더 큰 불평등을 위해 동원된다는 점에서 논박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외모와 소유물로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것이 문제라면, 그 질문자역시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반여성적 수사들을 생산하고, 퍼 나르고, 발전시키고 있는 수많은 익명의 남성들에게서 이런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가볍고 경쾌하게 폭력에 동참하는, 자못 의기양양해 보이기까지 한 행렬들뿐이다.

-참을 수 없는 욕망의 지리멸렬함을 넘어서

이 장구하고 기구한 성적박탈감의 서사에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 하나가 빠져있다. 대체 ‘누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박탈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욕망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전형성’과 만난다. 이 전형성 속에서는 남자들은 얼마나 예쁜 여자와 얼마나 많이 섹스를 할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에 여념이 없고,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길가는 (예쁜) 여자를 불러 세워 “나와 섹스를 하지 않으니 너도 된장녀가 틀림없다”며 난데없는 성토를 벌인다. 또 여자들은 이 안에서 성적으로 대상화(혹은 사물화)되고 소모되는 존재가 되거나, 물질적 보상을 얻어내지 못하는 모든 섹스를 “손해”로 계산하는 법을 배운 독한 존재가 된다. 이 전형성 안에서는 어떤 종류의 쾌락도 모두 경쟁의 일환일 뿐이다. 동성(同性)과 이성(異性)을 망라하고 벌어지는 암투와 모략이 우리들의 욕망의 근간을 잠식해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섹슈얼리티는 수많은 위험들을 내포한 채로 위태로운 모양새를 띠고 있다. 그동안 존속되어왔던 “이성애 중심”의, “정상가족”을 위한 틀로는 수용할 수 없는 들끓음이 사회 곳곳에서 감지된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욕망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있다.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성적 디스토피아가 이 인위적인 경쟁구도 속에서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성혁명(性革命)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욕망이 우리를 잡아먹고 우리를 괴물로 만들기 전에, 욕망을 주조하고 있는 틀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가 하루빨리 서로를 돌보는 힘을 기르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 길게 늘어선 시련들을 결코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섹슈얼리티와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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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섹슈얼리티(Sexuality)는 간단히 말해 성적실천, 성정체성, 성적 욕망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기존의 성욕이라는 개념이 그것을 생물학적 결정론의 영역에만 묶어두는 반면, 섹슈얼리티는 이것의 사회적인 성격을 포착하고자 한다. 성욕이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구상은 미셸 푸코의 연구들에서 제기된 것이다. 푸코의 주장이후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는 ‘프로이트에 근거한 본질론’과 ‘푸코가 제기한 구성론’간의 논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조선일보>, “[노르웨이 테러] 이슬람․  페미니즘 증오로 똘똘 뭉친 ‘인간 괴물’”, 2011.07.25, 정시행 기자

3) <연합뉴스>, “노르웨이 살인마, ”여자 한번도 못 만나봐“, 2011.7.27

4) 반면 동양인 여성들은 서구의 남성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브레이비크를 포함한 서구 남성들의 판타지 속에서 이들은 순종적이고, 이국적이며, 신비하고, 작고 귀여운 존재로 여겨진다.

5) “5월 3일 鄭모군(17·경북 김천(金泉)시)은 짝사랑했던 이(李)모양(17)을 꾀어내 강제로 욕을 보이고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을 선고받고 고법에 항소했는데 이날 판사들은 『그럴 게 뭐 있느냐? 기왕 버린 몸이니 오히려 짝을 지어 주어 백년해로시키는 게 좋겠다』는 식으로 양가 부모를 설득, 법정에서 약혼까지 치르게 했다는 것.” [선데이서울 73년 5월 20일호 제6권 20호 통권 제 240호]

6) 슬럿워크(SlutWalk)는 캐나다의 한 경찰이 “성폭행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여성은 매춘부 같은 야한 옷차림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반발한 여성들로 부터 시작되었다. 성판매 여성을 일컫는 속어인 “Slut”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 행사는 야한 옷을 입은 여성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현재 미국, 영국, 노르웨이, 인도를 비롯한 30여 곳에서 진행되었다.

7) “남자들의 반응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개념찬 ’(외국)여자들에 대비되는 한국여자들에 대한 비난 ▲키가 작지만 훌륭한(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거나…) 남자들에 대한 재인식 ▲테러하겠다는 협박 ▲성적인 욕설 ▲외모에 대한 비하 ▲여성 루저의 기준을 만들자는 주장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이 반응들 가운데는 비슷한 혐의로 욕을 먹고 있는 다른 한 명의 여대생과,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밝힌 여대생에 대한 혐오 섞인 비난, 마지막으로 ‘루저 발언’에 반론을 제기한 독일인 고정 출연자와, 서울대를 다니며 책이 많아서 핸드백이 아니라 배낭을 메고 다닌다는 여성에 대한 애매한 ‘찬사’가 곁들여져 있다. 여기까지가 현재까지 진행에 대한 스케치다.” 최태섭, <180cm, C컵, 그리고 루저의 난>, [온라인 당비의 생각]http://dangbi.tistory.com/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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