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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돌아가신지 3주가 지난 오늘은 저의 생일 입니다.
게시물ID : humorbest_3693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멜리에
추천 : 124
조회수 : 6085회
댓글수 : 8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7/09 02:13:45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7/09 00:03:22

오유가 이메일로 전달되던 시절부터 간간히 오유를 즐기던
지금은 25세 대구에 사는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여자입니다.
이 글이 길기에 다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이렇게 나마 엄마와의 기억을 정리해서 
차곡히 간직해 두고 싶네요.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지 3주가 된 오늘 7월 9일은 제 생일입니다. 
무슨 말을, 누구에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힘들때마다 제게 힘이 되어준 오유에 이렇게 글을 올려 봅니다.

어머니는 간호과 교수님 이셨습니다.
저의 어린시절 어머니는 박사학위를 취득하느라 많이 바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때 엄마는 자궁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수술로 혹을 드러냈는데 이후에 12차례의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으셨습니다.
항암 치료를 할 때, 항상 안방에는 엄마의 토사물 냄새가 가득했고 그랬기에 저는 안방에
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 시절은 트라우마랄까....너무나 어머니에게 죄송한 것이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오유에 글을 쓰면서 조금이나마 속죄해 봅니다. 

하지만 그때는 엄마가 돌아가시리라는 생각, 죽음에 대한 생각은 단한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보같았습니다. 쓰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네요.
엄마는 그 모든 치료를 몇년에 걸쳐 기적같이 이겨내고 정상적인 생활을 다시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꿈꿨던 것들, 저에게 간식을 챙겨 주는것, 고3때 야자를 마친 저를 데리러 와주시는 것...
그 시간들이 지나고 보니 참 행복했는데 우리는 어느새 또 그 행복함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제가 국어교육과에 합격하던 날, 엄마가 기뻐하시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엄마를 업고 안방 한바퀴를 돌면서 우리 딸 잘 키워줘서 너무 고맙다고....
대학교 1,2학년동안 참 행복했습니다. 엄마는 완치 판정을 받으셨고, 연극과 뮤지컬을 좋아하는 엄마와 함께 공연도 보러 다니고 쇼핑도 하고.... 
제가 대학교 1학년때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이별한 날, 엄마가 제 손을 잡고 제 방 침대에 같이 누워서 그 남자애 분명 후회 할거야, 더 멋진 여자가 되렴.... 해줬던 그 말이, 그 손길이 아직 그대로네요.
그러면서도 항상 건강식을 하셨고, 채식을 하셨으며,꾸준히 운동도 하시면서 건강에 대해 누구보다 철저히 관리하셨습니다. 그때는 암환자 분들을 찾아다니며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식단도 짜주시고,
여기저기 봉사활동도 다니고, 악기도 배우면서 늘 즐거워 하셨습니다. 평생 공부만 했기에 지금의
이런 것들이 너무 행복하다고 항상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엄마는 다시 강의를 시작하셨고 6개월쯤 지나자 다리와 허리가 많이 아프다고 하셨습니다. 첨엔 오랜만에 서있어서 그런가 하며 한의원과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는데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결국 처음 암 수술을 했던 대학병원을 찾았고, 저와 함께 검사를 하러 갔던 병원에서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엄마의 몸에는 이미 암이 가득 차있었고, 특히 폐와 혈액에 전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을 쓸 수 없는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건강하고, 예쁘고, 똑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엄마가 이렇게 나약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애 같은 나를 두고 떠난 다는 것은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나마 덜어낼 수 있는 암덩이들을 덜어내기 위한 수술을 하셨고, 병원에서는 항암치료 및 기타 치료는 권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수명은 고작해야 두달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수술 후, 엄마는 여수의 한 요양병원에서 대체의학과 자연치유에 의존한 채 살아가셨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저희가 사는 지역은 대구 였기에 여수를 가는 것은 한달에 고작해야 한번, 혹은 한 학기에 두세번 이었습니다. 갈때마다 엄마는 자고 가면 안되냐, 조금만 더 있다가지 그러니.... 평소에는 잘 하지 않으시던 말씀을 종종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후회되게도 저희는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단 한번도 그런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엄마 또 올게, 또 올게..... 가끔 엄마가 집에 올때면 밤마다 혼자 방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처럼 오늘 처럼 엄마랑 함께 있고 싶은데 왜 자꾸 엄마는 가야하냐고....혼자 그렇게 많이 울었습니다. 

저는 2011년 2월초에 서울의 한 사립고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합격을 해서 상경했습니다. 제가 상경한지 일주일만에 엄마의 병은 극도로 악화되어 한쪽 다리를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저는 계약 기간 때문에 대구에 내려오기를 망설였고, 결국 4월경에 엄마가 걷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 저는 계약을 파기하고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마침 집 근처에 있는 사립학교에 자리가 났고 저는 그 학교에 근무 하며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학교 생활이 무척 행복했고, 항상 집에 돌아오면 엄마에게 학교 이야기를 해주면 엄마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천사같네. 오늘 옷 너무 예쁘다. 화장이 참 잘됐네. 애들이 예쁘다고 한거야? 좋았겠네 우리딸. 애들이 오늘은 편지 써줬어? 한번 읽어봐라..... 서술형 답안지를 매길때도 엉뚱한 오답을 보면서 같이 웃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월급받은 돈으로 엄마에게 내복을 사드렸습니다. 더 좋은 것, 정장.... 구두, 가방....이런 것들이 너무나 사드리고 싶었는데...... 

그러다가 6월 첫째주,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셨고 응급실에서 엄마의 폐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CT촬영 결과....그나마 남아있더 엄마의 대부분의 장기도 그렇고, 폐 역시도 하얀색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마치 눈꽃송이처럼 피어있는 암덩이들. 의사선생님은 지금 어떤 치료보다도 친척들을 불러서, 마지막 엄마의 모습을 보게 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응급실에 있는 4일동안 늘 눈물을 달고 살았습니다.
의식만이라도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했습니다. 기적처럼 엄마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그것이 엄마에겐 더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의식이 돌아온 후, 엄마에게 노래를 불러드렸는데 제가 " 엄마 , 나 음치지> " 이랬더니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박수를 세번 쳐 주고 엄지를 치켜세워 주던 우리 엄마........
하지만 의식회복 이후, 엄마는 통증때문에 거의 몰핀에 의지한 생활을 했습니다.

4시간, 3시간....점점 몰핀을 맞는 간격은 좁아졌습니다. 병실 바닥이나 보호자 의자, 침대에서 잠을 자며 엄마와 함께 생활했던 그 시간 몸은 괴로웠지만, 정말...영혼을 팔아서라도 단 하루만이라도 그 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긴 이야기는 많고 많지만 이만 생략하려 합니다.
점점 폐에 물이 차서 괴로워 하시던 엄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의식이 있었습니다. 학교 수업 중에 전화를 받고 달려온 제가 사랑한다는 말을 수십번 되네이자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셨습니다. 제 손을 꼭 잡아주시던 따뜻한 손..... 아직도 손은 따뜻한데, 심전도를 체크하는 기계는 더이상 빨간 불이 들어왔고, 헐떡 헐떡히던 엄마의 심장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6월 21일 화요일 새벽 12시 5분. 저희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직 못해드린게 너무 많습니다. 
엄마는 제가 빨간차를 사서, 함께 여행을 가는게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의식이 조금 회복되었던 어느날, 병원 앞을 휠체어타고 산책하던 엄마는 평생 공부만 하느라 여행 한번 제대로 못가봤다고 했습니다. 어디를 가고 싶냐고 했더니 엄마는 제주도 라고 했습니다. 일단은 가까운데 부터 가고 시간이 지나면 제주도에 꼭 가자고 꼭 가자, 꼭....몇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무런 약속도 지켜 드리지 못한 체 엄마를 보냈습니다.
더 성공해서, 내가 더 좋은 교사가 되서, 좋은 남편 만나서, 그의 아내가 되어서, 또 예쁜 애기들 많이 나아서....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야속하게도 아무것도 저에게 허락된 것이 없었습니다.

화장터에서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나오던 엄마...그리고 흙 속에 뿌려진 엄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하루라도 제게 엄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아직 못다한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엄마를 안아 주고 싶은데, 그리고 엄마가 그토록 원하던
것들을 해 드리고 싶은데 저는 이렇게 엄마를 추억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그래도, 엄마가 여기 이 세상에서 살 때 보다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곳에서
진통제 없이도 아프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겠죠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제 생일이면 건강하던, 그렇지 않던, 늘 미역국을 끓여 주시던 
엄마의 모습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죠.

엄마, 보고싶어. 늘 보고싶고, 그리고 늘 사랑해.
나 지켜보고 있지? 더 열심히, 더 행복하게 살게. 엄마..... 
다들 마음 여린 나라고 걱정하지만 그래도 늘 건강하고 꿋꿋하게 살아왔던 나이기도 하잖아.....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실에서 가끔 오유의 재미있는 사진이나 글을 보여드리면 엄마가 좋아하고, 웃으시던 모습 또한
생각이 나네요.

이 밤....저의 생일 축하해 주세요.
모든 오유님들이 늘 행복하고 따뜻한 사랑 안에 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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