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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 선 대한민국 사법부(4)-한일회담반대시위와 동백림사건
게시물ID : history_36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5
조회수 : 58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3/03 22:04:02
동백림 사건의 재판광경. 1,2심에서는 사형을 포함한 중형이 선고되었지만 대법원에서는 간첩죄 부분에 대해 대부분 무죄가 선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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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반대시위와 동백림 사건

1.한일회담 반대 시위
61년 쿠데타 이후 지속되어온 국가재건최고회의 체제는 63년 12월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막을 내렸다. 한일회담은 51년, 53년, 57년, 58년 열려왔으나 번번이 결렬되어 왔고 4.19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열리지 않고 있었다. 군사정권은 61년 당시부터 의욕적으로 한일회담을 진행하였고 김종필이 도일하면서 사실상 타협점을 찾았다.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 시위는 1964년 3월부터 시작했고, 5월 20일 서울대에서 대학생 1500여명이 모여‘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2.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1) 무장군인들이 법원에서 행패 : 경찰은 이 시위와 관련된 학생과 시민 180여명을 연행하여 서울형사지법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영장담당 양헌 판사가 일부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러자 이튿날 새벽 4시 30분경 권총과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수도경비사 1공수 소속 군인 13명이 경찰의 인도를 받으며 서울형사지법 당직실에 난입한 것이다. 양헌 판사가 이미 퇴청한 사실을 확인한 이들은 곧 양헌 판사의 집으로까지 쳐들어가 “영장을 기각한 판사가 누구냐?”며 행패를 부렸다. 이 사건의 파장은 매우 컸다. 

2) 난입사건이 몰고온 파장 : 대법원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엄중 항의하였고, 국회에서 야당은 이를 '국기를 흔드는 난동'으로 단정하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 사태의 근본원인을 엉뚱하게 “일부 정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과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에서 찾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학생들의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박정희는 6월 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사건은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6·3사태로 비화되는 데에서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정부는 군인 8명과 법원난입을 지시한 최문영 대령을 구속해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무죄로 석방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도 얼마 안 가서 모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3) 정권의 사주가 있었는가? : 무장군인 법원난입사건은 흔히 정권차원에서 기획된 공작이라기보다는 “쿠데타와 군정을 통해 기세가 오른 일부 장교들이 즉흥적인 감정에 따라 행동한 결과”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당시 군검찰관으로 이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백형구**, 최영도*** 변호사에 따르면 당시에 민간인으로 기소된 김상목과 유국준은 공수특전단 출신 예비역 중령으로 중앙정보부 과장으로 근무하던 자였다. 
최영도 변호사는 김상목과 유국준의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고 의심했으나 증거가 없어 거기까지는 파헤치지 못했다고 회고하면서, 이 두 명의 민간인과 관련된 부분을 공소장에 밝히려 하다가 청와대와 육군본부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백형구 변호사는 두 사람이 중앙정보부 출신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공개했다가는 정말로 내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냥‘민간인’이라고만 밝혔다고 증언했다. 백형구는 이에 덧붙여 “중앙정보부나 국가권력이 직접적으로 개입 혹은 주도했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정보기관이나 정권 차원의 개입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3. 동백림사건 
1) 동백림 사건 : 1967년 7월 8일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한의 대남공작단 사건을 발표했다. 유럽의 유학생과 교민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하거나 평양을 왕래하고 공작금을 받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200여 명에 달하는 사건 관련자 중에는 화가 이응로 부부와 독일에서 활동해온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부부를 포함해 지식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의 1심과 2심에서는 사형을 포함하여 중형이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는 간첩죄 부분에서 대부분 무죄가 선고되는 등 파기환송 판결이 많이 나왔다. 

2) 재판외압 의혹 : 그런데 윤이상씨 부인 이수자씨 등은 재판과정에 중앙정보부 등 외부의 압력이 작용했다면서 “중정은 재판관과 검사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재판관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3일간 호텔에서 감금되다시피 했다”고 주장했다. 
공식적으로는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 당시 재판 진행절차만큼은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의자 대부분은 독일, 프랑스 등에서 중정에 의해 연행되었기 때문에 양국 정부가 백주에 자기 영토 안에서 한국 정보부가 불법납치를 저질렀다며 강력하게 항의하는 등 이 사건에는 국내외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때문에 재판과정 전체는 이례적일 정도로 민주적이고 적법하게 진행되었다. 1심 재판장 김영준 판사는“1심 기간 중 판사들을 특정 호텔에 집단 투숙시키면서 판결문을 특정 방향으로 작성하도록 강요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사건 기록이 방대해서 처음에는 우리 집에서, 나중에는 호텔에서 숙박****하면서 검토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정에서 관여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3) 여전히 의심스러운 증거 : 그러나 이 사건의 판결에 외압이 있었다고 의심할만한 증거가 있다. 당시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이후 중정에서 작성한 <동백림 사건 등 증거보강 추가수사계획>에는 검찰지원비 25만원(검사 3명, 검사서기 2명) 및 재판 후 지원비 추가분 25만원(판사 5명) 등 예산이 책정되어 있어 중정이 검찰·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최소한 행사하려고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중정에서 사건을 맡은 판검사에게 사용하기 위해 예산을 배정한 것이다. 쌀 한 가마가 5250원이던 당시 시세로 볼 때 50만원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이에 관해 1심 재판장 김영준은 중앙정보부에서 금품이나 향응을 제공받은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으며 당시 지출결의서 등 회계장부가 보존되어 있지 않아 과거사위원회에서 이 예산이 실제 집행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4) 괴벽보 사건 : 동백림 사건 재판과 관련한 또 다른 의혹은 대법원 파기 환송 이후의 ‘괴벽보’ 사건이다. 대법원 선고 3일 후인 1968년 8월 2일, 서울 시내에 애국시민회 명의로 “김일성의 판사를 잡아내라! 북괴와 야합하여 기회를 노리는 붉은 도당을 처단하라!”는 내용의 전단이 배포됐다. 다음날도 대법원주변에 애국시민회 명의로 작성된 벽보가 붙었다. 같은 날 대법원장에게는 “사법부 안에 용공판사를 두어서 되겠느냐”는 투서가 날아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재판에 관여했던 최윤모 판사가 돌연 사표를 제출하였다. 자연스럽게 이 괴벽보와 협박편지 사건의 배후에 중정이나 행정부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강력하게 제기됐다. 대한변협은 물론 국회에서도 주모자 색출과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대법원장도 행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해명이나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이 담화가 오히려 여론에 불을 끼얹었다.
**백형구는 검사 생활을 거쳐서 형사법 학자가 되었고 현재 국내 형사법계의 권위자이다.
***최영도는 판사 생활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고 민변 회장, 참여연대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회 제2대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판사와 변호사들 중에는 업무량이 많아 단기간 강도 높은 집중을 해야할 때에 밤을 새기 위해 자택에서 나와 여관이나 호텔에서 밤을 새우며 재판을 준비하는 관행이 과거에 있었다. 이 경우는 여관이나 호텔이라고 하면 흔히 의심하기 쉬운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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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광은 저서 <간원제명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뒷날 사람들이 장차 그 이름을 낱낱이 손가락질하며 논할 것이다. 누구는 충성했다, 누구는 속였다, 누구는 곧았다, 누구는 굽었다
(某也忠, 某也詐, 某也直, 某也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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