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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를 통일했던 진(晉)나라의 몰락 - (2)
게시물ID : humorbest_3697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유없음
추천 : 11
조회수 : 1993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7/10 14:02:18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7/09 16:33:53
앞 이야기는 첫번째 글에서 보시길..


가남풍은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들인 각지의 왕들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의 숙청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러나 이 라이벌들이 각자 모두 개인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던터라 말이 황후지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가남풍은 먼저 중앙조정의 장악을 목표로 하여, 당시 고위중신들을 제거하고자 역적토벌이라는 황명을 내세워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과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를 불러들인 후, 숙청에 성공한다.

중앙조정을 손에 넣고 황제를 부대끼고 앉은 가남풍을 비롯한 가씨일족의 위세는 당당했다.

대놓고 황제의 침실에서 외간남자와 정을 통해 바람을 피웠다 하니 알만하겠다.

그러던 중 그 떠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어느날 태자였던 사마휼(司馬譎)을 때려죽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잖아도 가씨일족의 횡포에 불만을 품고 진절머리가 나있던 황족 사마씨들이었다. 곧 이를 문제삼았고 또 한편으로는 좋은 명분이 되었으니 너나할 것 없이 각지의 왕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수도 낙양으로 짓쳐들어가 가남풍을 비롯한 가씨일족의 씨를 말려버리는데에 성공한다.

그렇게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고 외척주살의 목적은 이루어 사마씨의 황실은 온전해졌지만 정작 그 거사의 주인공들인 황족들의 분위기가 묘했다. 다름이 아니라 죽은 가남풍처럼 자기들도 황제를 끼고 실권을 휘둘러보고 싶었던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다. 

그리하여 결국엔 자기들끼리 싸우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팔왕의 난' 이라 부른다.

팔왕(八王), 즉 여덟명의 왕이 깽판을 쳤다는 얘기다.

여남왕 사마량 - 사마의의 5남, 사마염의 숙부. 
초왕 사마위 - 사마염의 5남. 
조왕 사마륜 - 사마의의 9남, 사마염의 숙부. 
제왕 사마경 - 사마유의 아들, 사마염의 조카. 
장사왕 사마애 - 사마염의 16남. 
성도왕 사마영 - 사마염의 6남. 
하간왕 사마옹 - 사마부의 손자, 사마염의 6촌. 
동해왕 사마월 - 사마욱의 손자, 사마태의 차남, 사마염의 6촌. 

이렇듯 모두 같은 성씨의 친족인데다 모두가 먼 친척들도 아닌 친형제이거나 6촌이내의 친척들로, 역사에 길이 남을 콩가루 집안으로 기록된다.

흔히 사극에서 볼수있는 궁중에서의 정치적 암투도 아니고 난(亂), 스케일 크게 말그대로 전쟁을 벌인 것이다. 물론 각 왕들이 거느린 사병들로 치고 박고 싸우느라 백성들의 피해나 국토가 피폐해진다던지와 같은 불상사는 비교적 적었으나 그래도 앞서 사마염이 의도했던 것, 즉 황실보전을 위해 쓰여졌어야 했을 각 왕들이 거느렸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이는 곧 훗날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이건 다음편에서).  

어쨌든 300년~306년, 즉 6년동안의 내란으로 사마씨 황족들은 대부분 씨가 말랐고 306년 경에 예장왕 사마치(司馬熾), 동해왕 사마월이 연합하여 모두를 평정하는 것을 끝으로 난은 종결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암군이었던 혜제 사마충이 죽자 사마치(사마염의 25번째 아들)가 제위에 오르니 그를 회제(懷帝)라 부른다.

이렇게 두번의 피바람을 겪고 나서 이제 좀 평안해졌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불과 5년 후에 다시한번 큰 사건이 터지고 마니, 이것을 '영가의 난'이라 한다.

팔왕의 난이라는 사건을 태풍에 비유하자면 이 영가의 난은 그냥 2012라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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