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비빅거리는 경쾌하면서도 맑은 전자음이 온 집안에 울린다.
반사적으로 눈을 떠보지만
침대위 내 옆자리는 비어있고
급히 나간 흔적만이
그가 나갔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아니 내 남편은 두달동안 도망치듯 출근을 하고 있다.
작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는 죄책감에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심정일 뿐이었다.
시간만 더 내어준다면 그는 언제든지 좋은 남편으로,좋은 아빠로 돌아올 것이다.
"지우 일어났니?"
지우의 방문을 빼곰이 열어본다.
지우는 대답하지 않는다.
"지우 좋아하는 토스트 해줄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지우.
그 작디 작은 입술로 '엄마'를 불러준 것도 두달전의 일이었다.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고 햄을 꺼낸다.
톡톡 작고 단단한 부엌의 소리들만이 울려퍼진다.
지우 아빠,재현씨를 만난건 8년전의 일이었다.
9살이나 차이나는 우리가 결혼하게 된데는 지우의 존재가 컸다.
이 집에서 우리는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지우가 태어났다.
그렇게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버린 집인데
이제는 익숙치 않은 정적과 재현씨의 부재만이 이 넒은 집을 가득 메우고 있다.
지우는 토스트 두개를 오물오물 먹고는 그대로 돌아누웠다.
"그래,지우야,좀 더 자."
돌아누운 지우의 등을 토닥여준다.
그대로 조용히 지우의 방문을 닫아준다.
여섯살난 아이가 겪기에는 너무도 큰 일이었다.
두달전의 기억은 떠나가지 않고 우리 셋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도 추웠다.
오랜만의 고등학교 동창모임이라 빠지기도 어려웠다.
빨리 결혼한 탓에 어색한 동창들까지도 결혼식에 와 축하해주었고
그뒤론 지우 핑계로 모임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지우도 여섯살이고 재현씨가 나서서 지우를 봐주겠다고 했다.
"걱정하지말고 갔다와."
"그래두..."
"지우야,엄마한테 인사해야지-엄마-안녕-"
재현씨는 지우의 작은 손을 잡아 흔들어보였다.
지우는 해맑게 웃으며 인사해주었다.
그리고 모임에 도착한지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았을때
나는 시내 한복판을 뛰고 있었다.
구두는 언제 벗겨졌는지 한쪽뿐이었고
오랜만에 한 화장도 거의 다 지워진 채였다.
아파트 근처 파출소 앞에서
우두커니 담배를 문채 서 있는 재현씨와 마주쳤다.
"재,재현씨..지우는..?지우는 어딨어?"
재현씨는 내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채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대답 좀 해봐...응?...재현씨..."
그의 품에 매달려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쾅쾅 쳐댔다.
그래도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대로 넒은 가슴으로 날 안아주기만 할 뿐이었다.
재현씨는 지우와 공원에 갔다고 했다.
지우는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보다 근처 공원을 더 좋아했다.
재현씨는 지우가 또래 아이들과 노는 걸 지켜봤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고
지우와 아이들 생각에 잠깐 공원 옆 길목으로 빠져나왔다고 했다.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댔다.
그리고 재현씨가 자리를 비운 몇분 사이에 지우는 사라졌다고 했다.
지우는 그대로 증발하듯 사라졌다.
실종신고를 해야할지 납치신고를 해야할지도
누가 그랬는지 왜 그래야 했는지도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일주일이 지났다.
"미안해..미안해,선정아.."
"..."
"정말..미안해..."
일주일간 나는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런 나를 붙잡고 재현씨는 울고,울고,또 울었다.
지우를 데려간 사람은 단 한통의 전화도 하지 않았다.
얼마만큼의 돈을 준비해야하는지
적금 통장들을 꺼내 셈하고 있던 나와는 달리
범인은 단 한번의 연락도 하지 않았다.
8일째 되던 날,
다행히 지우는 안전하게 돌아왔다.
돌아왔다기보다는 발견되었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빈 상가에
애정행각을 하려고 들어갔던 고등학생 두명이
화장실 칸막이에 갇혀있던 지우를 발견했다고 했다.
안전하게 돌아온 것은 맞지만
지우는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다.
어둠과 배고픔 속에서 여섯살난 아이는
이미 희망을 포기했던 터였다.
지우는 그 뒤로 단 한번도 말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도리질하는 것이 다였지만
그런 지우의 아픔과 고통은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것이 아니어서
그저 어둡지 않게 자기전 방의 불을 켜주거나
끼니를 거르지 않게 해주는 것 밖에는 해 줄 것이 없었다.
지우를 또 다시 혼자 둘 수는 없기에
내가 현관문을 나서지 않은지도 두 달째였다.
가끔 지우의 방문을 열어 대화를 시도하거나
집안일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