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비빅대는 경쾌하면서도 맑은 전자음이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현관문 앞에 재현씨가 서 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재현씨는 대답하지 않는다.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그의 손을 잡아 끄려는데
그의 품에서 독하리만큼 세하게 술냄새가 풍긴다.
"술 마셨어?"
"..."
"왜 이렇게나 마셨어?"
그는 내 손을 부드럽게 놓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비틀비틀 안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우리 얘기 좀 하자."
재현씨의 굵고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가던 나는
혹시나 지우가 깰까 안방문을 굳게 닫는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재현씨는 침대 앞에 서 있다.
"앉아-술도 마셨으면서."
"...."
"꿀물 타다 줄까?"
"...."
얘기하자더니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였다.
"있어봐,꿀물 타올게."
"우리...."
"응?"
"이혼하자."
"...뭐?"
"이혼하자,선정아.나 너무 힘들다."
"...."
두달동안의 긴 소통의 부재가 끝나고
60여일만에 첫 대화에서 그는 '이혼'을 말한다.
명치 끝에서 먹먹하게 뭔가가 걸린듯 하더니
갑작스레 토악질이 나려한다.
어릴때부터 예상치 않은 일이 생기거나
기분이 안좋아지면 줄곧 이런 느낌이었다.
"조만간 서류 준비할게."
그에게서 등을 돌리곤 화장실로 뛰어간다.
먹은 것이 없어 나올건 없지만
그래도 게워내야 살것만 같았다.
웩웩거리는 소리는 화장실이 작아서인지 울려퍼진다.
마주하고 앉아있던 변기의 커버를 내리고
그대로 화장실벽에 기댄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뺨으로 흘러내린다.
이상하다.
게워냈는데도 뭔가가 걸린듯이 답답하다.
한참을 있다 화장실을 나왔다.
안방의 불은 꺼져 어두컴컴하다.
지금 안방으로 들어가면 내가 우스워보일지 이상하게 보일지
어찌되었던 들어가고 싶지 않다.
지우 얼굴을 봐야 나아질거 같단 생각이 든다.
작은 침대였지만
지우 옆에서 잠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지우 옆에 눕는다.
잠결에 꼬물거리는 지우..
저 작은 아이가 겪었을 일이 어느정도일지,
왜 내 아이어만 했던건지..
지우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으..음..엄..마..엄마.."
지우가 엄마를 찾는다.
지우 목소리가 이렇게도 작았던가..
시야가 흐려진다.
"지우야,엄마 여깄어..."
지우의 작은 손을 꼭 쥐어본다.
불덩이 같다...
지우의 이마를 찾아 손을 갖다 대본다.
역시나 뜨겁다.
그대로 일어나 안방으로 달려간다.
"지우아빠!"
얼마만에 큰 소리를 낸건지 목소리가 갈라진다.
재현씨는 놀랐는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지우가..지우가 아파."
"뭐?"
"지우가..많이 아픈가봐,여보.."
눈물이 났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게 끝이라고 말하는 남편과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불덩이처럼 열이 나는 딸아이
둘 중에 어떤게 더 눈물이 나는건지도 모르겠다.
"진정 좀 하고..병원부터..아니.."
"어떡해..어떡해..지우 불쌍해서 어떡해.."
지금까지 막혀있던걸 토해내듯 울었다.
두달동안 집안을 가득 메웠던 정적을 토해낸다.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남편에 대한 원망을 토해낸다.
도리질만 해대던 딸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토해낸다.
토해내고 토해내는데도 끊임없이 뭔가가 올라왔다.
"정신 좀 차려!!!좀!!!!"
바닥에 주저앉은 내 어깨를 거칠게 흔든다.
"그..그래..지우아빠.병원부터..."
힘겹지만 재빠르게 일어나려는 내 팔을 낚아채듯 끌고 가는 재현씨였다.
그리고는 지우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놀란듯한 지우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본다.
"놀랐구나.놀라지마..지우야.."
지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다.
지우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런 지우를 보고있자니 재현씨가 원망스러워진다.
"당신-"
"잘봐."
재현씨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리고는 지우를 들어올린다.
"지우는 죽었어."
"뭐?"
"지우는 죽었어.두달전에! 시체로 발견됐어,
그 화장실에서..손발이 묶인채로."
"아니야..거짓말하지마."
"TV에 지금 얘 얼굴이 나와..
선정아,얘도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는 애야.
그만하자..얘 보내주고.."
"거짓말 하지마!!!!!!!!"
"우리같이 아파하는 부모가 또 생겨야겠니?"
"거짓말..이잖아.재현씨..응?..아니잖아.."
"우리만으로 충분하잖아..보내주자.응?"
"아니야...아니..잖.."
하얀 천이 생각난다.
그 아래로 보인 지우의 손이 생각난다.
"싫어.."
"선정아."
그의 품에서 지우를 빼앗아 든다.
그대로 어디로 가야할지 헤매다
식탁위에 있던 지갑을 챙긴다.
"최선정!!"
적막하다.
두달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집안에는 적막함만 가득하다.
죄책감에 말문을 닫아버린 남편과
상처를 부둥켜안고 작은 새마냥 부들부들 떨어대는 딸과
우리 셋은 그렇게 적막함사이에 있다.
가슴에 자리했던 먹먹한 것들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단지 희미해지는 정신과
우리 셋을 이어주는 붉고 진득한 것들만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