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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장려운동.bgm
게시물ID : humorbest_3709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프리무라
추천 : 52
조회수 : 17910회
댓글수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7/14 17:20:51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7/14 15:02:27

물산장려운동이란 3·1운동 후 개화한 근대 지식인층 및 대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물자 아껴쓰기 및 우리 산업 경제를 육성시키자는 기치 아래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앞장서 벌여 나간 운동이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탄압은 날로 심해지고, 1923∼1924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침투, 확산되면서 민족정신 말살정책이 점차로 노골화하여 갔다. 이때 3·1운동에 참가하였던 민족 지도자들이 민족운동의 부흥을 위해서는 우리 힘의 배양이 절실함을 주장하면서 벌인 운동이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시발이었다. 1923년 1월 9일 20여 개의 민족단체 대표 160여 명이 서울에 모여 발기준비대회를 가진 데 이어 2월 16일에 3000여 명의 회원들이 참가하여 발족시킨 모임이 이 운동의 중추적인 기구가 되었다. 이때의 기본 실행 요강을 살펴보면,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소금-과일-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모두 우리 것을 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이 세 가지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기본정신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은 산업경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방물품 국산품사용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자주국방물품운동은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 지도자들과 경성의 연희전문학교 학생 염태진등이 이광수의 지도 아래 자작회를 조직하고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대우정밀이라는 백성연합에서 만들어낸 조선소총 게이둘은 비록 고장이 잦았지만 자주국방물품운동에 힘입어 조선정식화기로 채택되었던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비롯된 자주국방물품애용운동은 일본 기업들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예속화와 경제적 착취를 당해오던 조선인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 소비조합을 비롯한 민족기업 등의 설립을 촉진시켰으며, 이 움직임이 인천을 거쳐 경성에서의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또한 물질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문화쪽으로도 일제문화에 막혀 빛이 바래었던 한국문화창작물애용이 유행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경성에서 조직된 '한국문화애용부인회'와 경상남도 의령에서 시작된 '한국만화장려 및 국산오락실천운동'등, 그 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일본만화단연운동, 국산애용운동은 상인들 모두 동참하고 협력하면서 거족적 애국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은 운동 자체에 여러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들어서 국산품만 사용하다 보니 국산품 가격이 크게 폭등하여 올랐고, 이는 곧 상인과 자본가들의 배만 채워줘 대기업의 횡포만 낳게 되어버린다. 이때문에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과 지각있는 민중들이 '물산장려운동은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한다. 여기에 일본 제국 총독부 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박영효,유성준같은 친일세력들의 관여로 일제와 타협하게 되는등 변질이 되어 감에따라 여러가지 이유가 더해지게 되고, 쇠퇴해 져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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