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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게시물ID : humorbest_3712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5
조회수 : 2829회
댓글수 : 7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7/15 18:28:24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7/13 21:40:05
통상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임금들은 병신 중의 상병신이던가, 말도 못할 정도의 인간 말종인 경우가 많

은데요, 이런 편견을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구스 "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와 마케도니아 지방 드라가스 왕조 출신의 세르비아인 아내 헬레나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냈으며, 1443년 모레아의 황제 소유영지를 통치하고 라틴인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448년 형인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자녀 없이 죽자, 다른 형제인 데메트리우스와 제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중재를 요청한 결과, 콘스탄티누스가 결정되어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1449년).

145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된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위협을 가해오자,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의 재결합에 동의함으로써 서유럽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무산되었다. 결국 가브리엘로 트레비사노가 이끄는 소수의 베네치아 공화국 함대와, 줄리아니 주스티니아니가 이끄는 제노바 공화국 용병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위조직을 갖추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메메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도시를 침공하는 것을 막아낼 수 없었다.

1453년 5월 29일 일화로, 화포를 동원한 메머드 2세의 오스만 군이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을 마주보며 서있었을 때, 팔라이올로고스는 백마를 타고 3중 성벽을 지키는 8천 병사를 시찰하고 있었다. 메머드 2세는 백마를 탄 그의 모습을 보고 '황제는 백마를 타는가.'라고 하며 타고있던 흑마를 물리고 백마로 갈아탔다고 한다. 후에 메메드 2세가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로 칭한 것을 생각나게 한다. 화포가 불을 뿜고 마침내 도시 성벽을 뚫고 들어오는 오스만군이 들이닥치자 그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 메메드 2 세가 항복하는 조건으로 미스트라의 지배자 자리를 제안하였으나 이를 거절했으며 성벽이 무너지

고 병사들이 달아나는 상황에서도 홀로 전선에 남아 물밀듯이 밀려오는 투르크 병사들에 맞서 싸우다 장렬

히 전사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적진으로 돌격하기 이전에 황제를 상징하는 일체의 장신구들을 모두 벗어

던졌기 때문에 그의 신분을 상징할 만한 물건은 발에 신고 있던 보라색 양말 뿐이었다고 합니다.(고대부터 

자색, 즉 보라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었죠) 그래서 전후에 황제의 시신을 찾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했고 우

여곡절 끝에 황제로 "추정"되는 시신을 찾아내 목을 베었으나 그것이 진짜 황제의 시신이었는지는 역사의 미

스테리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할때 하늘에서 한 천사가 내려와 황제를 대리석 석

상으로 만들었고, 석상으로 변한 황제를 금각만 근처의 동굴에다 숨겨두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이 이교

도들의 손에서 해방되는 날, 황제도 오랜 잠에서 깨어나게 될 거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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