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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明)정권 - (7)
게시물ID : humorbest_3714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유없음
추천 : 10
조회수 : 1078회
댓글수 : 7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7/16 13:19:51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7/15 21:54:55

무한(武漢)에서 양자강을 타고 쭉 올라가면 남경에 도착한다. 그 무한을 점령했던 청군은 지체않고 바로 남경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청군이 남경 근처인 양주(楊州)에까지 이르르자 마사영은 크게 당황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있는 양주의 수비대장, 사가법에게 출전하여 양주성을 거점으로 맞서 싸울 것을 명한다. 이 사가법은 소위 말하는 충신이었다. 청군 수만을 막기엔 아군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고 패배는 자명했으나 사가법은 명조의 충신으로서 그 이름을 남기고자 했다. 

사가법은 양주성에서 청군과 정확히 '10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의 수비가 어찌나 견고하고 대단했던지 당시 청군을 지휘하던 청의 황족, 예친왕 도르곤은 항복권유를 3번이나 했다고 한다. 

“우리의 강대한 군사들이 장강의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세를 날아 넘지 못할 줄 아는가? 채찍만 강에 던져도 흐르는 강물이 멈춰 설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무모한 짓을 그만두고 투항하라. 나는 그대의 충절을 높이 산다. 우리 대청(大淸)으로 오라."

도르곤이 전했던 말이다. 그러나 사가법은 이미 명조의 충신으로 죽고자 다짐한 터였다. 웃기지 말고 어서 싸움이나 계속하자는 답변을 전한다. 한창 잘나가던 도르곤(이건 청나라 역사를 알아야 한다)의 자존심에 제대로 먹칠하는 발언이었다. 이 말을 들은 도르곤은 사가법은 물론이요, 양주성 내의 사람들에게 큰 앙심을 품게 된다.

허나 애시당초 중과부적의 싸움이었다. 전투 열흘째 되던날, 청군의 대포에 의해 성벽은 맥없이 무너졌고 성문도 모두 뚫리게 된다. 사가법은 장졸들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하지만 결국 붙잡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내가 앞에서 '10일'이라고 강조한 이유가 있다. 이 전투 직후, 양주성을 함락한 청군은 양주성 내의 남명군을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처참하게 학살했다. 남녀노소 안가리고 모두 도륙을 내버렸다고 한다. 앙심을 품었던 도르곤의 지시였다. 이 사건을 '양주십일(揚州十日)'이라 한다. 이 사건 외에도 청군은 또 한번의 학살경력이 있는데 그 사건은 '가정삼도(嘉定三屠)'라 불리운다. 이건 나중에 언급하겠다.

번외 이야기로 이 양주십일에서의 생존자가 하나있었는데 양수초(王秀楚)라는 사람이다. 그는 이후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라는 책을 써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했다. 하지만 그 책은 청 조정에서 금서로 분류되었으니 당시 청나라에서도 그 사건을 어찌 생각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양주성을 함락한 청군은 이제 남경만을 앞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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