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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말기 연(淵)씨 가문에 대하여 (2)
게시물ID : humorbest_3717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ish
추천 : 14
조회수 : 2713회
댓글수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7/18 01:05:20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7/16 21:16:05
1부를 보시려면 (1)에서는 삼국말 정치상황과 연씨가문의 대두 과정, 그리고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연자유(淵子遊, ?~?)와 연태조(淵太祚, ?~?)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먼저 고구려 연씨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연개소문(淵蓋蘇文, ?~665) 에 관해 몇자 써보겠습니다. 우리는 연개소문에 대해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연개소문의 일생은 상당부분 베일에 쌓여있습니다. 그의 조부, 부친과 마찬가지로 출생년대를 알수 없고, 사망년대는 기록이 엇갈립니다. 삼국사기에는 666년에 죽은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의 묘지명에 의하면 665년에 죽었다고 쓰여있습니다. 아무래도 당대인이고 그의 아들인 연남생 묘지명 기록이 더 신빙성있으나 아무튼 생몰년대가 모호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한 아버지 연태조의 동부대인(혹은 서부)직함을 물려받아 정계에 진출하기 이전의 삶 역시 전혀 알수가 없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갓쉰동전>이라는 고전소설을 근거로 연개소문이 젊었을 때 중국 등지를 유랑했다고 하나, <갓쉰동전>은 오직 신채호 선생의 저서에서만 인용되고 있고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유력 귀족가문의 차기 후계자인 연개소문이 타국을 유랑할 가능성은 희박해보입니다. 성장한 후의 연개소문은 성품이 호방하고 겉모습이 매우 위엄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포악하고 잔인한 면도 있어, 5개의 칼을 차서 위엄을 강조하고 말에서 오르내릴때 시종을 엎드리게 해 발판 으로 삼았다는데 이러한 성정은 연태조 사후 그가 아버지의 직을 세습하는 것을 귀족들이 반대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죠. 귀족들에게 겨우 인정을 받아 동부대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귀족연립체제하에서 연씨가문이 너무 강력해진 나머지 나머지 귀족들의 심한 견제를 받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동부대인이 된 연개소문은 632년경에 천리장성 축조현장의 감독을 맡았는데 이는 연개소문이 귀족들의 견제가 심한 평양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건의했다는 설과 영류왕이 연개소문을 중앙정계에서 도태시키기 위해 좌천시켰다는 설이 서로 엇갈리고 있으나 자료의 부족으로 진실은 알수 없습니다.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연개소문은 서부국경지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642년 어느날, 연개소문은 장성 축조를 지휘하던 중 평양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진행중인 것을 알게 됩니다. 선수를 치기로 결심한 그은 자기 휘하 부(部)의 군사들을 소집하여 평양성 아래에서 사열을 하고 귀족들을 초대합니다. 아마도 이 사열은 연개소문이 평양성을 포위하고 벌인 무력시위이거나, 귀족들을 죽이기 위해 가장한 사열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리에 참석한 자들을 모두 죽이니 그 숫자 가 10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반대파 귀족을 일소한 연개소문은 바로 궁으로 난입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국정을 장악합니다. 이 때 귀족연립체제가 타파되고 연개소문의 강력한 독재체제가 구축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는 반면 연개소문의 독재도 귀족연립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설도 있습니다. 제 생각엔 연개소문의 정권이 귀족연립체제보다 강력한 권력을 누린건 맞으나 귀족연립이라는 체제 자체는 변화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으로 안시성주(야사에 나오는 이름으로는 양만춘)는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연개소문은 군사를 동원해 그를 공격했으나 끝내 항복시키지 못해 성주의 지위를 유지해주었고, 반대로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의 집권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승복했죠. 이처럼 연개소문은 쿠데타 정권의 빈약한 정통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각지의 세력가들과 제휴를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과정이 어떠했든,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그 체제를 공고히 해나가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치적을 쌓았습니다. ①천리장성 축조 - 16년간의 대역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처음 장성 축조를 위해 파견된 연개소문은 자의든 타의든 중앙정계에서 한걸음 떨어진 상황속에서 목숨마저 위태로웠습니다. 그러나 장성이 완성될때의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최고권력자였습니다. 장성은 북으로는 만주 한복판의 부여성부터 남으로 요동반도의 해안 요충지인 비사성까지 연결되어있으며 장성이 완성된 해는 647년이라고 하네요. 당의 침입이 645년부터 있었으니 연개소문은 장성을 축조하는 동시에 당군의 침입을 격퇴한 것입니다. ②신(新)도교 수입 -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연개소문은 <도덕경>을 수입하고 도교를 받아들입니다. 고구려에는 원래 불교와 더불어 도교가 존재했으나 이는 기초적인 형태의 도교였고, <도덕경>을 수입하고 도사 숙달 등이 들어오면서 이를 한단계 발전 시킨 것입니다. 물론 연개소문은 순수히 문화발전의 측면에서 도교를 수입한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를 통해 불교 등을 믿는 귀족들을 억압하고, 종교세력을 자신이 장악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③중앙아시아와 외교 - 당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현재 몽골일대의 설연타(薛延陀), 우즈베키스탄의 강국(康國) 등과 교류를 했습니다. 이를 통해 당나라를 포위하는 형태의 외교망을 구축하고자 했는데, 연개소문을 비롯한 고구려 지배층의 국제감각이 상당히 뛰어났다고 생각되네요. ④사수(蛇水)전투 - 662년 당의 2차침입 때 당의 장수 방효태의 20만 대군이 평양 인근으로 진격해왔습니다. 연개소문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대동강인 패수(浿水) 상류의 지류인 사수에서 당군과 격돌하여 방효태와 그 아들 13명, 그리고 20만 당군을 전멸시킵니다. 이로 인해 당군은 한 축이 꺾여, 소정방의 군대는 신라군의 보급만 받고 허겁지겁 퇴각하고 맙니다. ---------------------------------------------------------------------------------------------------- 쓰다보니 또 너무 길어졌네요 ㅠㅠ 원래 이번 글에서 적어도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 이야기까지 쓰려고했는데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이랑 업적 쓰고나니까 상당히 길어져서 연개소문에 대한 비판적 평가나, 그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는 3부에서 써야할것 같습니다. 동생인 연정토에 대한 것도 쓰려면 적어도 4부작은 될것 같은데 졸작이 이렇게 길어지다니 면목이 없네요. 아무튼 긴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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