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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임금들의 패턴(2)
게시물ID : humorbest_3724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25
조회수 : 4144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7/20 16:55:13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7/20 04:01:11
지난 번에 조선조 임금들의 패턴을 정리하여 올리기로 했는데, 중종에서 1편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member&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istory&no=1899&page=1&keyfield=&keyword=&mn=96867&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1757145&member_kind=total
을 마친 채 
2편을 쓰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선조-광해군-인조 트리오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극명하게 갈라지고 저 스스로도 생각할 것이 많아 
글로 정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편에서 말했던 "선대의 정치에 대한 반작용이 후대의 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중기 이후부터는 이런 패턴이 구체화되어

"그러한 작용-반작용의 원동력은 권력쟁탈에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뭐....뚜렷한 정책대립이나 국가전략의 차이점없이 권력 그 자체를 쟁탈하기 위해 
왕은 왕위유지 그 자체에, 신하들은 관직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둔거죠.
민생을 위한 정당정치? 그런 건 18세기 유럽에서나 찾으시죠. 근데 18세기 유럽에서도 잘 안될 겁니다.

아, 물론 식민사관의 당파성론은 껒.
무제한 경쟁이 허용되는 시장이 있으면 player들은 승자독식을 추구하는 게 지구촌 보편원리 아닙니까-_-;;;;
권력의지 없는 현실정치인이란건 허무맹랑한 이야기죠.

게다가 동시대 유럽의 권력투쟁에 비하면 조선당쟁은 세련된 편입니다.
더군다나 조선법제도는 당대 세계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게 평민들에게 유리했죠.
권력투쟁한건 사실이고 권력투쟁의 원동력이 민생이 아니긴해도 임금신하들이 술쳐먹고 맨날 논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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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종 : 착실한 세자수업을 통해 성리학군주의 비전을 품은 인물이었지만 요절

13. 명종 : 명종의 치세는 어머니 문정왕후의 섭정과 윤원형의 전횡으로 요약됩니다.
문정왕후의 섭정이 끝나고도 스스로의 정치를 펼치지 못하다가 문정왕후 사망과 함께 윤원형도 제거.
독자노선을 펼쳐보려 하지만 배운 게 그것밖에 없는 탓에 외척에 기대는 형태가 되었고
(중종이 그랬듯이) 부담스러운 신하는 제거해가며, 2년만에 죽음. 
중종 이래 심화된 망국적 증상(임꺽정, 을묘왜변)이 대외적 표출. 
문정왕후가 죽은 뒤 불과 2년만에 명종도 죽음으로써, 명종은 스스로 이렇다 할만한 시도도 해보지 못한 채
길었지만 실속이라곤 없는 치세도 끝이 나고 왕위는 빽도 없고 혈통도 방계인 선조에게로 넘어갑니다.
보통은 이런 테크트리는 나라가 망할 때에 보이는 전형적 패턴이죠.


14. 선조 : 무능하고 용렬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으나, 
영리하지만 제잇속만 차리는 스타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정확한 상황판단능력은 명재상으로 알려진 류성룡/이덕형/이원익보다도 한 수 위. 
문제는 인간이 찌질해서 질투가 심하고 의심이 많다는 거죠.

① 즉위 당시의 상황
선조의 정치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대 명종이 후사가 없어 
(1)임금팔자와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오던 선조가 : 선조는 명종의 조카뻘
(2)세자책봉도 안 받은 상태로 : 제왕교육 못 받음
(3)열일곱 나이에 벼락 임금이 되어 : 권력암투하기에는 너무 어린
(4)중앙정계 한복판에 홀로 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 토끼가 사자굴에 떨어진 격

② 선조가 선택한 방법
결국 선조가 선택한 것은 적당한 인재를 적당하게 신임하다가 적당한 때에 내팽겨치는 것 + 신하들을 이간질하여 경쟁시키는 것.
선조집권 시절 정계의 실세는 이준경-박순-이이-이산해-정철-다시 이산해-류성룡-이원익-오성 한음-유영경으로 끝없이 교체되었고 
누구 하나 선조의 완전한 신뢰를 얻지 못한 채 사소한 실수나 모함으로 정치퇴갤.
훈구파가 사라진 힘의 공백 상태인 중앙정계는, 겉보기에는 사림이 집권하고 당쟁이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다 선조손바닥 위에서 벌어진 일들. 
노회한 정치9단들이 득실거리는 약육강식의 중앙정계에서 외척이나 권신의 엄호도 없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41년이나 헤쳐먹음.
어떻게 보면 인간승리라고 할만한....

人의 장막에 둘러쌓였음에도 불구하고 흉금없이 믿고 의지할 인간적 신뢰의 대상이 없었다는 점이 선조를 끝없는 의심병환자로 만든 듯.그래도 님아가 41년이나 헤쳐먹었으면 의심을 거둘 법도 한데 요단강 건너는 날까지 친아들 광해군까지 질투. 이이로 밀고 나갔으면 대박이 났을테고 이원익/오성 한음/광해군으로 밀고 나갔어도 2타점 2루타는 쳤을텐데.....

어쨌거나 난세는 난세라 인재가 필요하기도 하고 인재를 보는 안목도 있기는 있어서 
왕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는,
이율곡/류성룡/권율/이순신/김시민/오성과 한음/한석봉/허준같은 기라성같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보내 능력을 펼칠 여건을 줬음.
원균이나 이일같은 병신들한테도 관대하게 기회를 준 건 실수지만;;;

③ 선조의 치세
사림 집권. 동서당쟁 시작. 명종代의 말기적 증상에 대한 치유책이 행하여짐. 
광해군을 세자로 세워놓고도 늘그막 10년 동안 후계문제에 대한 불확실한 태도를 취한 것이 상상도 못할 파장을 몰고 올 줄이야..
선조의 왕권유지 패러다임은 기본적으로 당파 간의 갈등을 이용하는 형태. 어느 한 쪽의 독식을 허용하지 않고 견제세력을 둠으로써 왕권을 극대화하고 조정 내 세력균형을 도모함. 이 절묘한 신의 한 수는 후대임금들이 무한하게 응용하는 고전 패러다임이 되었다.
집권초반 無당파 이율곡에 대한 각별한 신임(이율곡이 만든 당파라면 나도 들어가겠다!)이 특기할만하나 이율곡이 비교적 단명. 

④ 왕조교체의 가능성?
조선의 국가시스템은 중종의 관리소홀로 인해 삐걱되기 시작해, 명종 대부터 모순이 터져나오고
선조에 이르러서는 집권세력교체(사림)와 능력있는 군주(선조)의 결합에도 불구하고 한계에 이르렀음.
그런데 왜란이 터지면서 독자적으로 흘러오던 역사의 흐름이 Reset...

특히 임진왜란같은 전국토를 전장으로 삼는 총력전은 반드시 급격한 사회변화를 수반하게 되고(ex.6/25가 있은 후에야 신분질서가 비로소 해체됨) 거기다 명종 대의 말기적 증상+선조의 다소 찌질한 임진왜란 행보까지 감안하면 새 왕조가 들어설 확률도 어느 때보다 높았음.
일반적으로 전쟁 후에는 전쟁영웅이 민중의 지지와 신진지배세력의 엄호를 받으며 건국하기 마련인데
임진왜란 후에는 여론을 결집시킬만한 전쟁영웅이 없었음.
권율은 그 스스로가 선조가 행한 전쟁영웅 숙청사업에 앞장서던 인물인데다 전쟁직후 사망/이순신은 노량해전 전사/곽재우는 은거/기타 등등...
게다가 신진지배세력도 없음. 개혁군주라는 광해군도 즉위 후 서둘러 5현종사(조선역사상 존경받는 성리학자들에게 국가에게 제사하는 것)를 추진. 즉, 왜란 전의 지배세력이었던 성리학자 관료집단과의 동맹을 재확인함.
왕조교체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았음에도 왜란 전 체제를 순식간에 재건한 것은 결국 조선이 가지는 압도적인 시스템의 위력임.
명나라F4같은 병진들이 있어도 멀쩡하게 국가가 유지되는데 선조같이 똑똑하고 부지런한 임금까지 있다면야...

⑤ 총평
선조에 대해 평가를 내리자면, 발군의 능력으로 자기잇속만 채운 양반.
약육강식의 정계를 비상한 전략으로 돌파하는 능력이 돋보이지만 그 머리를 좀 더 좋은 데 썼더라면...
특히 양당대립구도를 왕권강화에 이용하는 수법은 후대임금들이 죄다 베껴다 쓸 정도로 신의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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