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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붉은 꽃
게시물ID : panic_373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홍화
추천 : 10
조회수 : 1611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2/10/07 22:13:10

어느 산 중턱에는 붉은 꽃 한 송이만이 탐스렇게 피어있다.

 

가파른 절벽 위에 볼록 튀어나온 넓적한 돌 한 켠에

잡초 몇뿌리와 피어있는 이 꽃은 이름은 없으나

10년에 한번 딱 30일만 피고 져 이름난 꽃이었다.

 

그 자리에는 항상 붉은 꽃 한송이만이 피었는데

그 송이가 탐스렇고 고와 멀리서도 그 자태가 보였다.

 

허나 꽃이 피는 산은 산세가 험해 오르는 이가 거의 없었고

산세보다 더 험한 절벽의 경사와 형태는

꺾으려 드는 자들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곤 했다.

 

산을 올랐던 자들중에 벌써 여덞명이 죽어 나갔고

그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으나

그런 '불가능'이란 것이 사람들의 흥미를 더 돋구어 주었을 뿐이다.

 

이에 더해 꽃을 달여먹으면 무슨 병이든 낫는다는 것 따위의 소문이 무성해졌고

그에 천냥이든 이천냥이든 내어줄테니 꺾어만 오라는 양반네들도 수십이 되었다.

 

오늘이 10년만에 오는 그 날 중에 하루였다.

 

그리고 오늘은 붉은 꽃이 만개하는 날이었다.

 

곧 있으면 시들해질것이고 꽃잎이 질것이다.

만개한 날에 꺾어오는 자에게는 배로 준다는 양반들도 있었다.

 

그에 오늘은 산 아래 마을이 가장 시끌벅적한 날이었고

산을 오르려는 자들과 꽃을 사려는 이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 와중에 산 중턱 큰 바위에 앉아 밥 몇 덩이를 나누어 먹는 사내들이 보인다.

거무스름한 피부에 비쩍 마른 사내 하나와 족히 여섯척은 넘어보이는 사내 하나.

둘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죽마고우 였다.

 

 

"자네,춘식이는 아직인감?"

 

"그렇지 뭐.꽃분이네는 어떤가?"

 

"오늘 꼭두새벽부텀 놈들이 찾아와 쑥대밭을 만들고 갔더만."

 

 

무덤덤하게 말하면서도 두 사내의 표정은 좋지 않다.

 

춘식이는 키 작은 사내가 결혼해 얻은 하나뿐인 자식이었는데

아내는 춘식이를 낳다 죽어버렸고

춘식이는 세살이 되던 적부터 이름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아 누웠다.

 

 

"자네,최대감댁 사람이 다녀갔다믄서?"

 

"..."

 

"최대감은 영 믿음이 안가는 사람일세."

 

"..."

 

 

꽃분이는 키큰 사내와 정을 튼지 2년쯤 되는 처자였다.

마을에서도 곱기로 소문난 처녀였으나

그의 아비가 투전으로 집을 말아먹고 빚이 몇백냥은 된다 하였다.

그로 인해 다된 혼사가 엎어지고 사내와 정분이 났으나

사내 역시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라 그 빚을 갚아주지 못했다.

요새는 빚을 받아내려던 자들이 집에 찾아와 쑥대밭을 만드는것도 모자라

꽃분이에게 추근덕거린다는 사실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내 꽃을 먼저 꺾으면 자네에게 줌세."

 

"아닐세.춘식이 생각은 안하는가."

 

"춘식이는 이미 늦은거 같으이."

 

 

키 작은 사내의 눈시울이 붉어진듯 했다.

 

허나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넉달동안 둘은 조금씩 준비해왔다.

조금씩 산세를 익혔고 꽃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을 세웠다.

 

한달전 키 큰 사내가 발을 헛디디고 구르는 바람에

발견한 길이 절벽바로 위를 향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길은 몇 보 되지 않았으나 폭이 좁아 한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바로 아래로 떨어질수 있었다.

 

그 길 중간에는 바위틈에 자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리 크진 않으나 풍파를 견뎌 낸 나무라

장대같은 사내가 심하게 밀어도보고 당겨보아도 끄떡도 없었던 터였다.

 

 

"내가 내려감세."

 

"....조심하게."

 

"믿고 내려감세."

 

 

키 작은 사내는 허리춤에 밧줄을 묶고 나무에 그 매듭을 지었다.

키 큰 사내가 힘이 더 좋으니 밧줄을 잡고 지탱해줄 터였다.

사내가 손과 발을 이용해 엉금엉금 기어내려갔다.

조금씩 조금씩 내려가던 그는 드디어 붉은 꽃을 꺾을 수 있었다.

붉은 꽃을 꺾자 줄기로부터 나온 붉은 액체가 사내의 손을 적셨다.

사내의 눈이 반짝였다.

 

 

"자네,찾았는가?"

 

"꺾었네."

 

"잘했네.잘했어 그려!"

 

 

두 사람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올라오는 길을 내려가는 것보다 더 힘들었으나

사내는 엉금엉금 잘도 올라갔다.

 

 

 

"손 내밀게."

 

"고마우이."

 

 

좁은 길을 빠져나오자마자 사내는 품안에서 붉은 꽃을 꺼내보였다.

 

 

 

"이게...이게..진짜 붉은 꽃인건가.."

 

"그럼!그럼 이게 진짜지!하하.."

 

 

 

두 사내는 얼싸안고 소리를 질렀다.

그 폼이 우는것인지 웃는 것인지도 모르게 말이다.

내려오는 길에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웠다.

두 사람은 이 꽃을 어찌해야할지 논의하며 즐거워했다.

서로에게 양보하겠노라 싸우기도 했다.

 

 

"아!"

 

 

키 작은 사내가 발을 헛디뎌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네!괜찮은가!!!!"

 

"아...으..."

 

 

키 큰 사내가 허겁지겁 내려와 그를 부축한다.

하지만 크게 다쳤는지 무릎과 정강이에서 피가 멈추지 않는다.

 

 

"잠깐 쉬었다 가세."

 

"미..미안하네."

 

 

오른쪽 발을 절룩거리는 사내와 부축하는 사내는

그대로 어느 나무 아래에 앉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산세가 험해 부상자가 내려가기엔 너무 위험했다.

 

 

"차라리 여기에 있으면 오르는 자들에게 도움이라도 청하세."

 

"안되네.이 꽃은 어쩌고.."

 

"꽃은 숨겨두면 되지 않겠나."

 

"그럼 어디에다 두지?"

 

"자네가 맡게.부상당한 자라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게야."

 

"알겠네."

 

 

키 작은 사내는 그의 품에 있던 꽃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두 사내는 꽃을 꺾으려는 자들을 기다렸지만

쉬이 올라오지 못하고 있듯 싶다.

벌써 한시진은 다 지났을텐데 사람의 인기척이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 불 지필 것을 찾아옴세."

 

 

키 큰 사내는 소매를 걷어올리며 사내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두드린다.

자기만 믿으라는 듯이.

그리고 이내 사내는 나무가지 더미를 한아름 가져왔고

불을 지핀 그들은 노곤해졌다.

 

 

"눈 좀 붙이게.자네는 쉬어야 하네."

 

"고맙네."

 

 

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내 모두 잠든듯 했다.

 

한 사내가 일어난다.

사내는 다른 사내가 제집 안방에서 자듯 코를 골아대는 소리를 듣는다.

 

찌르르 찌르르 울어대는 벌레소리가 들린다.

뭔가가 사박사박 지나다니는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불붙은 나무 가지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사내는 손에 집히는 큰 돌을 조심드레 들어올려

자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간다.

 

둔탁한 소리만이 서너차레 들린다.

 

 

 

 

그리고 산은 조용해졌다.

 

 

 

 

날이 한참 밝고 나서야 사내는 깨어났다.

사내는 배가 고팠으나 가슴에 품은 꽃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산길 가장자리로 흐르는 물을 손으로 몇번 떠먹기만 하고

조심스레 하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간다.

 

그러다가 사내는 맛있는 냄새를 맡는다.

 

배가 너무 고팠다.

사람을 죽인것보다도 품안에 붉은 꽃보다도

당장의 배고픔이 그를 한발자국도 더 못가게 했다.

 

 

"아..."

 

 

사내는 침이 고이는 걸 느끼곤 냄새를 따라 방향을 튼다.

그쪽으로는 길 자체가 없었으나 냄새 만으로도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내는 아주 작은 움막과 그 앞에 놓은 솥을 발견했다.

 

 

"아.."

 

 

사내는 검은 솥만을 바라보느라 당장 사내 옆에 서 있는 노인은 보지 못했다.

 

 

"어찌 산을 올라왔는가."

 

"아..예..어르신은 누구신지.."

 

"그냥 노인일세.자네는 누군가?"

 

"아..꽃을 꺾으러 올라왔던 사냅니다."

 

"꽃?"

 

"예.아,물론 꽃 구경도 못하고 포기하고 오는 길입니다..하..하하..."

 

 

아무리 노인이지만 사람 속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내였다.

혹시나 노인이 꽃을 뺏을까봐 걱정됐다.

 

 

"그렇군,밥이나 한술 뜨고 가게.찬은 별로 없네만."

 

"가..감사합니다.어르신."

 

 

사내와 노인은 말없이 앉아 식사를 했다.

찬이라고는 조린 감자 몇알과 고추 된장 조금이 다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노인은  밥만 몇술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망태기와 낫을 들었다.

 

 

"다 들고 가게.마중은 안함세."

 

"어디가십니까?"

 

"내 여기서 이것저것 캐고 키우고 그러는 맛에 사네.

 자네도 구경이나 한번 하고 갈텐가?"

 

 

사내는 마음이 조리고 급하였으나

식사 대접까지 받은 뒤라 노인의 권유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쉽지만 수저를 내려놓고 노인의 뒤를 따랐다.

 

사내는 얼마 가지 않아 꽃내음을 맡았다.

아마 멀지 않은 곳에 꽃밭이 있는것 같았다.


"여기가 내 정원일세.이 맛에 산다네."

 

 

노인은 낫을 들어 휘휘 잡초들을 베어냈다.

 

 

"이놈의 풀들은 왜 이리 잘 자라나 모르겠네."

 

 

노인은 짜증이 섞인 투로 얘기했다.

사내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잡초를 거칠게 뜯어내는 노인의 손에는 붉은 꽃잎들이 보였다.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휘청이며 걸어갔다.

노인에겐 인사 한마디도 없이 말이다.

노인은 사내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한손으론 잡초를 무심히 뜯어냈다.

 

 


"이상한 사내구만."

 

 

사내는 뭐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휘청인다.

 

 

 

"그래도 기골은 장대한 사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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