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다. 결국은 이런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던 나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엄마가 싫어하는 행동이었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다. 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목이 메인 듯 말을 하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생방송 중에 저래도 되는 건가? 되든 안 되든 아무튼 곧 화면이 바뀌며 광고 방송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채널을 돌리자 침통한 표정으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화면 귀퉁이에 KCS독점 생중계라는 광고성 멘트가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까지 광고에 집착하는 인간들의 심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젠 다 끝이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억 6천만년이나 지구를 지배했던 최강의 생물 공룡. 그들도 견디지 못하고 멸종해 버렸다. TNT(트리니트로톨루엔)폭탄 1억 메가톤급 규모의 폭발과 섭씨 2만도의 온도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뜨거운 불길이 지구를 휩쓸고 지나간 뒤, 충돌로 인하여 형성된 먼지구름이 햇빛을 차단시켰다. 그것은 운 좋게 살아남은 소수의 생명체들에게 영하 30도 이하의 혹독한 겨울을 선사해 주었다. 먼지 층이 제거된 후엔 고온에 의해 기화된 바닷물이 다시 온실효과를 일으켜 지구의 온도를 상승시킨다. 다량의 플랑크톤이 폐사하고, 용존산소와 먹이의 부족으로 인해, 마저 살아남은 생물군까지 모두 죽는다. 6천 5백만 년 전에는 공룡이었다. 이젠 아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운석충돌은 사전에 대비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나사에서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부어 우주를 관측하는 일은 단순히 고용창출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쏟아 부운만큼의 성과도 있어 운석의 행방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구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상태였다. 그것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 또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하지만 과학 기술의 발달은 6천5백만 년 전에 공룡이 하지 못했던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사실 지구와 충돌 확률이 매우 높은 운석의 궤도를 수정하는 일쯤은 현생 인류에겐 문제도 아니었던 것이다. 최첨단 과학기술이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고작 별 볼일 없는 운석의 궤도 하나 바꾸지 못한다면 애당초 최첨단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다.
제법 열심히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에서 운석의 궤도를 바꾸는 작업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름이 4킬로미터에 달하는 화강암 덩어리는 그것으로 영영 지구와 작별했다. 인간들은 환호했다. 물론 챔피언스 리그 따위에도 환호하는 족속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저명인사들이 연일 TV에 나와 현대 과학기술이 이룩한 신기원에 대해 떠들어대었다. 그들은 자연의 섭리마저도 바꿀 수 있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예찬했다. 혹자는 오직 인간만이 전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며 '우리는 그 증거를 방금 목격했다.'는 식의 극단적인 논리를 전개하기도 했다. 분명히 그로부터 8개월 후에 2차 운석 군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처음 것은 그저 맛 배기에 불과했다는 듯이 '그것들'은 소리 없이 지구와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귀찮지만 지금이 얼마나 상황적으로 심각한지 알기 위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이쯤에서 멕시코 유카탄 반도 지하에서 발견된 직경이 각각 180, 100킬로미터에 달하는 크레이터(운석구덩이)에 대해 거론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건 공룡을 멸종시켰으리라 추정되는 운석충돌의 흔적으로 이정도의 크레이터가 생기려면 적어도 충돌당시 운석의 지름은 10킬로미터 이상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10킬로미터는 되어 줘야 가속도나 질량 같은걸 따져 보았을 때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군을 멸종시킬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역시 나머지 것들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가 않았다. 이젠 정말이지 큰일 났다.
2차 운석군의 정확한 개수는 49개였다. 가장 작은 운석의 지름이 2킬로미터였고, 큰 것은 50킬로미터에 육박하기도 했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현대의 최첨단 과학기술로도 이것만은 감당할 수 없었다. 먼저 번 보다 더 열심히 한다고 해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고작 5개 뿐이었다. 각도가 달라 지구를 비켜가는 것들이 7개였고, 그 외에 나머지는 모조리 지구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나운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것은 여기까지 말한 후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적어도 30개 이상의 운석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뜻이었다. 지구는 입안에 들어간 비스킷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이다. 운석충돌 8시간 전에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그 이야기를 했다. '죄송합니다. 이제 지구는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도대체 지구가 멸망하는데 대통령이 왜 죄송한지 그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예전에 어떤 개그맨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진즉에 출근하셨고(새벽에 집에 들어오다가 경찰서에 비상이 걸려 출근하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보험설계사인 어머니도 아침부터 출타중이셨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생은 2주에 한 번씩 집에 내려오곤 했는데 여자 친구가 생긴 후론 그마저도 뜸해졌다. 집에 남은 사람이라곤 군대를 갓 제대하고 복학할 준비를 하고 있던 나뿐이었다. 전날 친구들과 늦게까지 과음을 하고 새벽에 집으로 기어들어와 11시간을 잔 뒤, 일어나 오줌을 누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마신 다음 텔레비전을 켰을 때 대통령이 나와 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했다.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지구가 멸망한단다. 이건 정말이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원래는 인터넷으로 영화를 다운받아 볼 생각이었지만 덕분에 이젠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을 때, 이런 걸 해야겠다고 미리부터 생각해 두는 녀석은 아마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아까부터 발가락이 간지러웠지만 별로 긁고 싶지도 않았다. 지구가 멸망하는 시점에서 발가락은 긁어 뭐하겠느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느새 발가락을 긁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린 것은 그 다음이다. 발신번호를 보니 동생이었다. 아마 녀석도 뉴스를 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나는 머리를 탁 치며, 좀 더 빨리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행동이란 가족에게 전화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동생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얼이 빠져서 발가락이나 긁고 있는데 그새 정신을 차리고 전화해 준 한 동생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기철이냐?"
"어, 형. 나야. 뉴스 봤어?"
"봤지 그럼. 시발 좆됐다. 인제 어떡하냐?"
"형...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난 그냥 여기 남아 있을게. 여자 친구랑 지구가 멸망할 때 까지 함께 있기로 했어. 내가 지켜주고 싶어. 부모님한테 대신 안부 좀 전해줘. 방금 엄마한테 전화 왔는데 당장 오라고 난리도 아니야. 이런 날 일수록 가족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데 그놈의 극성 알잖아. 어차피 차편도 다 끊겨서 못 갈 거야.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버스 운행이 가당키나 하냐고. 아무튼 그동안 수고 했어 형. 앗... 미진아, 거긴 깨물지 마. 형, 잘 지내고. 참, 내 책상서랍 3번째 칸에 15만원 넣어놨거든. 그거 쓰려면 써."
전화를 끊은 후 나는 다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발가락을 긁던 손톱이었다. 어쩐지 짭짤하더라. 나는 시부렁거리며 입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그러다 또 발가락이 간지러워져서 마저 긁었다. 시계를 보니 11시 45분이었다. 지구멸망까지는 7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아까 하던 생각을 마저 할까 하다가 이내 관두기로 했다. 뭘 해야 할지 생각하는 건 그냥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일단 밖으로 나가서 뭐든 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세상의 마지막 날이므로 뭘 하든 상관없지 않겠냐는 식이었다. 어제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전날 술자리에서 바지에 안주를 흘리긴 했지만 이젠 별로 갈아입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평소 같았음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 만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사람이란 세상의 마지막 날엔 좀 더 자신에게 관대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문밖을 나섰다.
그리고 역시 세상의 마지막 날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아파트 복도에서 내려다보이는 광경은 한마디로 요약해 아수라장이었다. 마치 B급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규칙과 질서가 사라진 곳에서 유일한 진리는 역시 폭력이었다. 옆집 아저씨가 아파트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그 아수라장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가 내가 급작스럽게 문을 열고 나오자 필요 이상으로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저씨는 곧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민망했던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우리는 어정쩡하게 눈을 마주친 뒤 계면쩍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왜 저래?'라고 생각하며 복도 아래를 내려다 본 후에야 나는 아저씨가 왜 그렇게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시선은 한 무리의 집단적 광기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제각각 쇠파이프로 무장했으며, 피를 잔뜩 머금은 쇠파이프를 어깨에 둘러매고 어슬렁거리며 아파트 주차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차가 박살이 난 상태였다. 필시 녀석들의 소행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는 듯 놈들은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주변엔 십 수 명의 사람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기까지 했다. 남자, 여자,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쇠파이프에 얻어맞아 머리통이 박살난 상태였다. 역시 세상의 마지막 날이니까 저런 놈들도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경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말 그대로 무법지대였다.
놈들은 모두 12명이었는데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나이는 많아 봐야 나와 비슷한 또래 거나 혹은 그보다 어려 보였다. 개중엔 아직 젖살조차 빠지지 않아 영락없이 어린애처럼 보이는 녀석도 있었는데, 그런 놈들이 건들건들 거리며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흉포한 놈은 파란 모자를 쓴 녀석이었다. 내가 녀석을 관찰한 것은 불과 몇 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놈이 가장 잔인했다. 한 대 쳐 맞으면 바로 울어버릴 것 같은 샌님 같은 얼굴로 벌써 다섯 명 째다.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순식간에 다섯 명이나 해치워 버렸다. 내가 보기 전부터 그랬을 테니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마치 두더지 게임이라도 하듯 눈에 보이는 족족 쇠파이프로 머리를 찍어대는 모습이 구역질 날 정도였다. 한방에 죽지 않는 사람들은 죽을 때 까지 몇 번이고 머리통을 얻어맞아야 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한 사람씩 죽을 때마다 그 미친놈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친다는 사실이었다.
놈들의 행태를 지켜보는 것은 정말 고역스러운 일이었지만 극한에 다다른 그들의 폭력이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난 5층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영역 밖이었다. 그들도 아파트 복도에서 자신들을 관찰하는 눈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듯 했지만 굳이 이곳까지 찾아 올라올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마치 '너희가 아니어도 우린 죽일 사람 많아'라고 하듯이 말이다. 덕분에 난(옆집아저씨도) 이렇게 관조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지켜볼 수가 있는 것이다. 단지 리얼한 공포영화를 보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자 좀 더 마음이 편해졌다. 나중엔 제법 흥미로운 구석까지도 발견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복도엔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의 폭력을 감상하고 있었다. 생기 없는 사람들의 눈동자엔 말초적인 쾌감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한동안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한 채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자 그들은 이곳에서 더 이상 사냥감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무리를 지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처럼 찾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쳐버린다는 생각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막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려는 찰나 회색 승용차 한대가 아파트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것이다. 나는 반색하며 다음에 벌어질 폭력적 상황을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꼬리뼈를 타고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싸늘함을 맛보았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느낌을 받은 적도 드물었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엄마가 아끼던 화병을 깨던 날에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물을 주지 않아서 혼나는 일은 없겠지'라는 해방감과 함께 깨진 화병 때문에 쳐 맞게 될 거라는 불안감이 혼재된 기분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습관적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파란 모자를 쓴 녀석이 뭐라고 소리치자 그 집단적 광기가 승용차를 향해 쏟아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지상주차장으로 들어오던 회색 세단은 12명의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와 휘두르는 쇠파이프 질에 막혀 멈추고 말았다. 아마 나였다면 훨씬 더 저돌적으로 돌진해 그들을 모두 깔아뭉개버렸겠지만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승용차의 주인은 그런 건 둘째 치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얼마나 놀랐는지 시동까지 꺼먹은 상태였다. 엄청난 쇠파이프 세례가 순식간에 고급승용차를 폐차와 다름없이 만들어 버렸다. 그 중 한 녀석이 승용차의 문을 열고 운전자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잔뜩 겁먹은 아주머니였다. 이웃집 아저씨가 담배를 피워 물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더니 한숨처럼 토해내며 말했다.
"내기할까? 두 방에 죽는다에 담배 한 갑."
나에게 하는 말이 분명했지만 지금 내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파란 모자를 쓴 녀석이 이번에도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놈은 쇠파이프를 건들건들 흔들어 대며 겁에 질린 아주머니를 향해 휘적휘적 다가갔다.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미처 어쩔 틈도 없이 놈의 쇠파이프가 여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나는 그걸 보며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쇠파이프가 마치 내 머리통을 후려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파란 모자의 쇠파이프 질을 본 나머지 놈들이 자기들끼리 웃으며 박수를 쳤다. 마치 게임이라도 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내 얼굴은 기이하게 비틀렸다. 순식간에 충혈 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더 이상 이건 영화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방금 우리 어머니가 죽었으니까.
공황상태에 빠진 나는 무작정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뭘 찾는지도 모른 채 미친 듯이 온 집안을 헤집어 놓은 후에 내 손에 들린 것은 공구함에서 꺼낸 망치와 스패너였다. 옆집 아저씨가 담배를 물고 복도 난간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다가 양손에 연장을 들고 악귀 같은 형상으로 나오는 날 보더니 번개같이 집안으로 뛰어들어 가버렸다. 문이 쾅 닫히더니 잠금장치를 채우는 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나는 다시 복도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놈들은 아쉬운 듯 이미 죽은 어머니의 머리통을 쇠파이프로 장난스럽게 꾹꾹 누르고 있었다. 순간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아파트 복도에 쭈그려 앉아 한동안 헛구역질을 해야 했다. 아침에 마신 오렌지 주스가 쓰디쓴 위액과 함께 흘러나왔다.
"개새끼들 다 죽었어..."
견딜 수 없는 분노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도저히 놈을 죽여 버리지 않고는 사라지지 않을 분노가 내 세포 하나하나에 집요하게 달라붙어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그야말로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다. 옷소매로 대충 입을 닦고, 길게 늘어진 복도를 바득바득 따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화살표 버튼을 거칠게 두 번 눌렀는데 뭐가 문제였는지 엘리베이터는 8층에 딱 달라붙어 도통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던 나는 하는 수 없이 비상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마침 젊은 여자 하나가 계단을 오르다가 날 보고(정확히는 내 손에 들린 연장을 보고) ‘헉’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서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여인의 손을 부적처럼 꼭 붙들고 있던 사내아이가 ‘우와 망치다’하며 놀라워했지만 곧 여인의 손에 입을 가로막히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나 계단 아래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 짓을 하다니 놈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거다. 다 죽여야지. 이젠 정말 다 죽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막 1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야이 개새끼들아. 내 동생 살려내."
그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12명의 청년들을 향해 무모한 돌진을 벌이고 있었다. 녀석들은 우리 엄마만 죽인 게 아니라 저 무모한 남자의 동생도 죽인 것이 틀림없다. 그의 손에 들린 식칼이 제법 흉흉한 기세를 발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쇠파이프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수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파란 모자가 휘두른 쇠파이프 질 한방에 맥없이 꺾이고 말았다. 이에 뒤질세라 또 다른 쇠파이프가 그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그는 괴상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바닥에 꼴사나운 자세로 쓰러졌다. 나는 호화로운 파티에 초대된 가난한 집 소녀가 자신의 초라한 구두를 내려다보듯 들고 있던 망치와 스패너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보니 꽤나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길이도 짧고, 사람 한명이나 제대로 죽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낡아빠진 연장이다. 그제 서야 조금이나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을 할 수가 있었다. 겨우 이런 것으로 쇠파이프 12개와 맞서려 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다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분노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설쳐대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1분만, 아니 30초만 더 늦었어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아마 내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순간 30초 늦게 내려왔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특히 저 무모한 남자의 광대뼈가 형이상학적으로 함몰되는 것을 볼 때에는 더욱 그랬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은 차라리 내 목숨을 살리기 위한 신의 배려로까지 생각될 정도였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분노에 화신이었던 그 남자는 순식간에(정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냥 다진 고기가 되어버렸다.
현실적인 공포와 마주하는 순간 혈관을 타고 빠르게 역류하던 분노는 차갑게 식어갔다. 다진 고기가 되어버린 사내의 시선이 하필이면 내 쪽을 향해 고정되었던 탓에 아파트 복도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관찰하던 난 공교롭게도 그와 몇 번이나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때마다 사내의 처참한 몰골에 내 얼굴이 오버랩 되면서 서늘한 한기가 마치 거미처럼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혀를 길게 빼어 물고 죽어 버린 그의 눈이 무슨 조화였는지 한 번 깜빡였을 땐 혼이 빠져나갈 만큼 놀라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망치가 바닥에 닿으며 꽤나 시끄러운 소음을 발생시켰는데, 설상가상으로 놈들 중 한명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내가 숨어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복도 벽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저 망치와 스패너를 꽉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내 심장 뛰는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헤비메탈 그룹사운드의 드럼 대용으로 박자를 맞출 수도 있을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다. 물론 진담도 아니다. 아무튼 놈의 발걸음 소리가 바로 지척까지 왔을 때 나는 기어코 선택의 기로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사실 선택이란 놈은 그림자만큼이나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어딜 가든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요리경연대회에 초청된 미식가의 혓바닥 돌기세포 같아서 참치초밥이 아무리 맛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안심스테이크에게 손을 들어주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통장 잔고 확인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 선택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선택의 미학이란 거다. 혹 무리를 해서 둘 다 맛있다고 해줄라치면 반드시 탈이 나게 되는 법이다. 근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어쨌거나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특히 쇠파이프에 머리통을 얻어맞고 혓바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 채 죽는 것만큼은 정말 질색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택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맞서 싸울 것인가, 혹은 개발에 땀나도록 도망을 칠 것인가 하는 그 단순 명쾌한 이분법 말이다. 미식가니, 선택의 미학이니 아무리 떠들어 봤자 결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혹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해 버리는 간단한 문제였다. 싸워도 좋고, 달아나도 좋다. 물론 난 후자를 선택하기로 진작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사지가 후들거리는 통에 손가락 하나 제대로 까딱하기가 힘이 들었다. 아무리 애써봤자 죽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망상처럼 두개골을 박박 긁어대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웬일인지 나는 도망칠 수 있는 모든 시간적 여유를 소진하고 나서도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지척까지 온 놈의 발자국 소리가 멈추는 것과 동시에 아파트 현관문이 오래된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내 심장은 이미 폭주기관차처럼 폭주하고 있었고, 망치와 스패너를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잡이에 손가락 자국이 다 남을 지경이었다.
"야, 거기서 뭐해? 여기 더 볼 거 없다. 다른 데로 가자."
"벌써? 알았어."
모든 것은 타이밍의 문제였다. 나는 아파트 출입문이 열리고 놈이 막 안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녀석을 부르는 목소리의 타이밍을 말하는 것이다. 열렸던 출입문이 닫히며 그 놈이 사라지자 끊어지기 일보 직전의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내 온몸의 신경세포는 일순간 녹은 젤리처럼 흐물흐물하게 늘어지고 말았다. 그 짧은 순간 천국과 지옥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다시 문이 열리고 그놈이 기어코 들어와 내게 등을 돌린 채 오줌을 누고 있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뭔가 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주변적인 것을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놈이 아파트 출입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왔을 때 분명히 녀석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도 놈은 마치 나를 보지 못했다는 듯이 바지 지퍼를 내리고 복도 구석에서 소변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고상처럼 굳어서 꼼짝 못하고 있었던 나도, 오줌을 누고 있던 녀석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오줌을 누며 슬그머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녀석을 보며 나 역시 쥐고 있던 망치를 찬찬히 들어올렸다. 이번에도 역시 타이밍의 문제였다. 그리고 내가 더 빨랐다. 쇠망치를 쥔 손에 묵직한 손맛이 느껴졌다.
바닥에 쓰러진 녀석의 머리통에서 피와 뇌수가 흥건하게 번져 나와 티셔츠를 적셨다. 놈은 자신이 누던 오줌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꼴사나운 자세로 쓰러졌는데, 가관인 것은 놈의 방광에 축적된 여분의 오줌이 계속 흘러나와 바지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녀석의 머리통이 으깬 감자처럼 잘게 부숴 질 때 까지 미치광이 같은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내 얼굴은 피와 뇌수로 인해 번들번들 거리고 있었지만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녀석의 머리통은 절반쯤 남아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잘게 조각이 난 상태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억누르며 찬찬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생각보다 쉬웠다. 어쩌면 그래서 더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머리통이 박살난 오줌싸개 자식은 기묘한 자세로 누워 경련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소변을 내뿜고 있었다. 녀석의 오줌 방울이 산발적으로 튀어 내 신발에 달라붙었다. 빌어먹을 오줌. 그제 서야 얼마쯤 정신을 수습한 나는 욕설을 지껄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얼굴에 잔뜩 피 칠갑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신발에 묻은 오줌 파편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오줌이 튄 부분을 바닥에 문질러 대충 닦아낸 후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앞에는 웬 쇠파이프를 든 녀석이 고개를 죽 빼고 서서 죽은 녀석과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녀석은 내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멀뚱히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마치 ‘니가 이런거야?’라고 묻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 나는 대답대신 망치를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이윽고 쓰러진 녀석의 방광에서 오줌 줄기가 차츰 잦아들다가 이내 완전히 그쳤다. 우리는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서로 들고 있던 무기를 휘둘렀다. 쇠파이프와 스패너가 부딪치자 ‘까앙’ 하는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손이 떨어져 나갈 듯 저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무기가 짧은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는 내가 더 유리했다. 나는 즉시 왼손에 든 망치를 휘둘러 녀석의 옆구리에 한방 먹여주었다. 성공이다. 놈은 쇠파이프 대신 옆구리를 부여잡고 쓰러져 비명 같은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맛이 어떠냐? 개새끼야. 나는 의기양양하게 서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저 새끼 뭐야?”
“야이 씹새끼야. 너 일로와봐.”
두 번의 살인으로 인한 악마적인 쾌감에 도취되어 있던 나는 그만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놈들의 패거리가 10명이나 더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두 놈을 해치우면서 방심하는 사이에 녀석들도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남은 10명의 쇠파이프 집단이 나를 향해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져 옴을 느끼며 즉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십색기들, 입에 게거품을 물고 쫒아오는 모양새가 가관이다. 고작 나 하나를 잡기 위해 10명씩이나 뛰어오는 것을 보니 못난 놈의 새끼들이 분명하다. 그래도 상황적으로 봤을 때 잡히면 죽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특히, 나는 누구보다도 처참하게 죽을 거다. 이런 짓을 해버렸는데 곱게 죽일 리가 없었으니까.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달아나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시켰다. 애초에 내려오는 게 아니었다. 내가 복수를 한다고 해서 죽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뭣 하러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운석이 떨어지면 개나 소나 다 죽어버릴 판국에 왜 사서 수명을 단축시키려 하느냔 말이다.
“거기서 개새끼야.”
“서란다고 서는 병신이냐 내가?”
남들보다 특별히 운동신경이 뛰어나지도 않은 내가 단지 달리기만으로 놈들을 따돌린 다는 것은 애당초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이 잡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거나 살아날 방도를 찾아야했다. 몇 시간만 지나면 멸망해 버릴 코딱지만 한 행성에서 뭐 한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려고 하는지 조금 회의적인 기분도 들었지만 그래도 쇠파이프에 맞아죽는 비참한 죽음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그럴 거다. 마지막이 그렇게 초라하고 비참할 바에야 차라리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게 백배는 깔끔한 죽음이다. 그리고 이왕 죽을 거면 지구의 최후라도 지켜보고 싶었다. 과연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스펙터클한 해일이 밀려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인지 궁금했다. 당장이라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는 녀석이 하기엔 조금 배부른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머릿속이 온통 운석, 죽음, 공포, 삶, 쇠파이프, 오줌 따위만으로 가득 찬 멍청이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나마 그 중에서 가장 필요악이라고 부를 만한 생각이라면 ‘어디로 도망치느냐’ 하는 정도였다. 나는 그 때 4층을 막 오르고 있었는데 그 순간 겨우 떠오른 생각이 잽싸게 집으로 들어가서 숨어버리는 거였다.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당연한 방법이었지만, 사실 이런 상황에선 이 정도가 최선이다. 게다가 타이밍만 잘 맞으면 탁월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놈들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 빨리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그고 숨어 버린다면 내가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지 녀석들이 알게 뭔가? 그 부근의 집을 한 집씩 모두 뒤진다고 쳐도 날 발견할 때쯤이면 이미 지구는 완전히 멸망하고 난 뒤일 것이다. 임기응변으로 떠올린 것 치고는 꽤나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녀석들과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차이를 벌릴 요량으로 단숨에 5층 계단을 뛰어 올랐다. 그런데 쉬지도 않고 복도로 들어서려는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눈앞을 가로 막는 것이다. 이런 씨부랄 어느새. 녀석들 중에는 ‘모리스 그린’보다 더 빠른 녀석이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들고 있던 망치를 휘둘렀다.
‘텅’하며 두개골 깨지는 소리가 났다. 여인이 쓰러졌고,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꼬마는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끄아아아’ 괴상한 신음소리를 흘려대던 여인은 곧 힘없이 축 늘어져 버렸다. 방금 전에 계단을 내려가면서 마주친 모자였다. 아까부터 괜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찌질 대더니 결국 이 모양이다. 아, 씨발 일이 더럽게 꼬이는구나. 그러는 동안에도 쇠파이프를 든 놈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계단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계단으로 통하는 비상구 문을 열고 그 틈으로 아이를 숨겨두었다. 어느새 녀석들 중에서도 걸음이 빠른 한 녀석이 거의 다 쫒아와 10계단 쯤 아래서 씩씩 거리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스패너를 무작정 녀석에게 던졌는데 그게 운이 좋아서 숨을 고르던 녀석의 미간에 적중을 해버렸다. 놈이 구겨진 종이처럼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바로 뒤따라오던 녀석에게도 왼손에 든 망치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놈은 쇠파이프를 절묘하게 틀어 망치를 막아내 버리는 것이었다. ‘깡’ 하는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일었다. 놈이 말했다.
“내가 검도가 13단이다. 이 존만아.”
“좋겠다. 개새끼야.”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놈은 9명.
바로 코앞까지 뒤 쫒아온 녀석들의 숨소리가 목덜미에 와서 닿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분명히 아침까지만 해도 난 평범한 복학준비생이었다. 그러나 이젠 살인자에 도망자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 애매모호한 멍청이가 되어버렸다. 쇠파이프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치며 날아갔다. ‘이런 두더지 같은 새끼’ 가장 앞에서 쫒아오던 놈이 아깝다는 듯 지껄였다. 근데 왜 하고 많은 새끼들 중에 하필이면 두더지 새끼였을까? 괜히 궁금해졌다. 아무튼 가슴을 쓸어내리며 간신히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 할 때 아슬아슬하게 문틈으로 다리 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에이익. 개새끼야. 이 개새끼야.”
나는 문을 닫으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 쳤지만 놈의 오른발은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러다가 남은 놈들이 모두 도착하면 난 끝장이다. 놈의 다리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 쳤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문틈으로 얼핏 보니 녀석의 얼굴엔 묘한 여유로움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대로 동료들을 기다리기만 하면 게임 끝이라는 심산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던 나는 아까 망치와 스패너를 꺼내다가 너무 작아서 신발장 근처에 아무렇게나 버려두었던 송곳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말듯 하며 내 애간장을 태우던 송곳이 간신히 손가락에 걸렸다. 금방이라도 열릴 듯 위태로운 문의 손잡이를 애써 부여잡은 채로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녀석의 발등에 혼신의 힘을 다해 송곳을 찔러 넣었다.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발이 빠져나가자 나는 잽싸게 문을 닫았다. 잠금 장치를 걸어두고 삼켰던 숨을 모조리 토해내었다.
“헉, 헉... 씨발... 좆됐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엄청난 쇠파이프 질이 현관문을 부술 듯이 쏟아졌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나는 공구함으로 가서 되는 데로 연장을 챙기기 시작했다. 펜치, 중망치, 장도리, 드라이버, 송곳, 프라이, 대못 몇 개, 볼트, 너트... 오, 여기 좋은게 있다. 절단기. 나는 중망치와 장도리를 허리춤에 차고, 송곳을 벨트에 끼워 두었다. 그리고 족히 일 미터는 되어 보이는 절단기를 들고 뭔가 더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나 찾아보았다. 물론 아무리 많은 무기가 있어도 혼자서 놈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총이라도 있다면 모두 다 쏴 죽여 버리겠지만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잖은가? 기껏 가지고 있는 총이라고 해봐야 어릴 때 가지고 놀던 공기 압축식 물총이 전부였다.
그런대 물총을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눈이 따끔따끔 거리며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어렸을 때 동생이 쏜 물총에 얼굴을 얻어맞고 기절했던 기억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던 탓이다. 동생은 이따금씩 무지에서 비롯된 잔인한 행동을 순진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는데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물대신 락스를 집어넣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것도 모른 채 락스물을 얼굴에 뒤집어쓰던 아찔한 기억이 섬전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즉시 장롱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물총을 꺼내 들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세탁기 옆엔 섬유유연제와 합성세제, 옥시크린, 그리고 가장 뒤쪽에 락스까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물 대신 락스를 가득 채운 후 펌프질을 해서 공기를 잔뜩 압축시켰다. 이건 눈에 들어갔을 때 방치하면 자칫 실명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거다. 개새끼들 모조리 장님으로 만들어주마. 나는 물총을 목에 걸고, 동선을 고려해 적당한 곳에 절단기를 세워두었다. 하지만 아직도 뭔가 불안하다. 와일드카드가 될 만한 뭔가를 찾아야만 한다. 저 빌어먹을 새끼들을 모조리 보내버릴 수 있는 뭔가를. 불현듯 머릿속 한 구석에서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살면서 문제가 생길 때 마다 동생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해결책을 제시해 주곤 했다. 물론 녀석이 어떤 철학적 사유 끝에 내뱉은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동생의 말 한 마디가 절묘하게 상황과 부합하며 일종의 깨달음을 이끌어낸다는 데에 있어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도 동생의 목소리가 구원의 종소리처럼 귓전을 울렸다.
‘내 책상서랍 3번째 칸에 15만원 넣어놨거든. 그거 쓰려면 써.’
에이 병신 같은 새끼.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결정적인 순간엔 이렇게 꼭 초를 쳐버린다. 그렇다고 놈들에게 15만원을 주면서 ‘오늘은 이 정도 밖에 줄 수 없어. 그러니 이쯤하고 돌아가.’라고 말할 순 없잖은가? 쓸데없는 망상에 가지가 뻗치는 동안에도 종잇장처럼 구겨진 문은 금방이라도 열릴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쇠파이프 질에 기가 다 질려버릴 정도였다. 저런 걸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오금이 저려왔다. 죽도록 얻어 맞다보면 정말 다진 고기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럴 수야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오감을 모두 동원해서 집안을 샅샅이 훑던 내 시선은 가스밸브 위에서 멈췄다. 그래, 저거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나는 절단기를 들고 가스렌지 앞에 섰다. 가스 밸브와 연결된 고무관을 잘라버리는 거다. 일이 잘못되면 모두 함께 죽을 수 있도록.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의 보험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런 미친 짓을 하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걸 보니 나도 미친게 틀림없다. 절단기의 날이 너무 무뎌서 죽을똥, 살똥 안간힘을 쓰고 나서야 고무관을 자를 수가 있었다. 다 자르고 나니 싱크대 위에 걸린 가위가 비웃기라도 하듯 내 코앞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가위새끼. 어쨌거나 작은 고무호스를 타고 천천히, 하지만 차곡차곡 역한 도시가스 냄새가 거실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너덜너덜해진 문이 힘없이 열렸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들고 있던 물총으로 가장 앞서 들어오던 놈들의 얼굴에 락스를 퍼부어 주었다.
“죽어라, 이 개새끼들아.”
“으아악, 내 눈...”
“크하악... 뭐야 이거...”
락스 맛이 어떠냐? 하하, 병신새끼들. 꼴좋다. 녀석들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있는 사이 뒤쪽에서 쇠파이프 하나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별이 번쩍 하며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어쩌면 몇 초쯤 기절이라도 했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았고, 놈들이 날 에워싼 채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 녀석이 쇠파이프로 내 배를 내려찍었다.
“이 존만한 새끼.”
쿠억
그 한방으로 난 뱃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게워내야 했다. 물론 먹은게 없었던 지라 헛구역질만 몇 번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벌써 죽을 듯이 괴로워졌다. 나는 바닥을 북북 기며 달아나려 했지만 어림없다는 듯 내 등짝으로 다시 한 번 쇠파이프가 내리꽂혔다. 너무 아파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눈앞으로 운동화 하나가 날아들었다. 제멋대로 고개가 돌아가더니 입안에서 딱딱한 것들이 핏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대여섯 개의 이빨 조각이 초라하게 거실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아픈 줄도 잘 몰랐다. 뭐야, 겨우 이대로 죽는 건가? 나는 힘겹게 숨을 토해내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라이터가 만져진다.
이제 라이터의 줄날 바퀴를 가볍게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 쇠로 된 회전체가 라이터 부싯돌이라 불리는 발화합금(세륨)과 마찰을 일으키며, 화학적인 연소를 진행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찰나의 순간 생명을 얻은 불꽃이 거실에 가득 찬 도시가스와 만나면서 수천억 배의 힘으로 나와 녀석들을 무자비하게 찢고, 발기고, 태워버리며, 결국 그 압도적인 힘 아래 모두가 굴복하게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쇠파이프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여기까지다. 이제 다 같이 죽는 거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사라질 행성이니까. 라이터를 꺼내든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래도 쪽팔리니까 가급적 떨지는 말자. 엄지손가락을 슬며시 라이터에 얹어 놓으려는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이런 개새끼들 당장 안 멈춰?”
그는 몹시 일그러진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손에는 38구경짜리 리볼버가 들려 있었다. 우리나라 경찰들이 사용하는 총이었다. 그건 어렸을 때 내가 뭣 모르고 가지고 놀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지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모양의 총이었다. 물론 그게 내 잘못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총기 관리를 잘못했던 아버지 탓이다. 나는 아버지가 잘못 관리한 총을 그저 가지고 놀았을 뿐이다. 그 이유로 죽지 않을 만큼 맞아야 했던 유년의 기억은 언제나 앙금처럼 내 기억 속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을 계기로 그 기억을 잊기로 했다. 나는 오늘처럼 아버지가 눈부시게 빛나 보이는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는 경찰이다.
“한석아, 얼른 이리와.”
“뭐야 넌? 이 씨발 늙은이가 어디서 껴들어?”
쇠파이프를 어깨에 둘러맨 한 놈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놈들을 향해 겨눴던 총구를 보란 듯이 등 뒤로 돌리더니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엄청난 굉음이 고막을 때리면서 동시에 식은땀 한줄기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싹한 경험을 해야 했다. 집안엔 지금 LNG가스가 가득 차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나뿐이다. 방금은 상황적으로 운이 좋았을 뿐이다. 아버지가 현관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과 도시가스가 기적적으로 만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계속 방심하다간 모두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게 될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위협사격이든, 조준사격이든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한 번만 더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면, 그 때도 방금 같은 기적이 일어나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아버지의 경고 사격이 제대로 먹혔는지 놈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씹새끼들아. 당장 쇠파이프 내려놓고, 바닥에 엎드려.”
녀석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 대자 아버지가 집안으로 들어와 한 녀석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며 ‘빨리 안 해?’라고 호통을 쳤다. 얻어맞은 녀석이 찍소리도 못 내고 바닥을 나뒹구는 것을 본 놈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천천히 쇠파이프를 내려놓았다.
“다 엎드려.”
이번에도 고분고분하게 아버지의 말을 듣는 놈들이었다. 어차피 폭력을 맹신하는 것들은 더 큰 폭력 앞에 굴복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나는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빨이 부러져서 말도 잘 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녀석들을 죽여버려야 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버지는 잔뜩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데리고 천천히 문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이상한 건, 바닥에 엎드려 있는 놈들의 모습이었다. 마치 매일 보던 친구가 어느 날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할 때 느끼는 이질감이랄까? 놈들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나는 왠지 그런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처음 내가 해치운 놈들이 2명이었고, 계단에서 스패너에 맞은 녀석까지 합하면 모두 3명이다. 그럼 나머지는 아홉이 돼야 하는데 지금 거실에 있는 놈들은 고작 8명뿐이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파란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죽인 그 새끼가 없다. 나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아버지 뒤.”
“뭐?”
고개를 미처 돌리기도 전에 쇠파이프가 아버지의 머리로 떨어져 내리며, 둔탁하고 기괴한 마찰음을 만들어냈다. 아버지는 실 풀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대로 힘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씨발 새끼야.”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아버지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벨트에 꽂아 두었던 송곳을 빼내 파란 모자의 목에 겨누었다. 놈의 뒤에서 오른팔로 목을 휘어감은 채 송곳을 쥔 왼손으로 녀석의 목젖을 겨누고 있는 자세였다. 지금까지 빌빌 대던 것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나조차도 놀라울 만큼 신속하고 정확한 동작이었다. 엎드려 있던 녀석들이 제각각 몸을 일으켜 세우며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나는 위협적으로 외쳤다.
“씨발, 쇠파이프 안 버리면 이 새끼는 죽어.”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천천히 현관문을 넘어갔다. 복도로 나오자 빼꼼히 문을 열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이웃집 주민들이 보였다. 초점 없이 흐리멍텅한 눈으로 마치 영화 관람이라도 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왈칵 화가 치밀었다. 지금까지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분하고 괘씸한 마음에 입맛이 썼다.
“보고 있지만 말고 좀 도와줘요.”
나도 모르게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시니컬하게 외쳐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그들은 ‘안타깝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네 사정이야. 우린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는 듯한 무심한 표정으로 날 관찰하고 있었다. ‘도와달라고 이 씨발.’ 나는 마치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쇠파이프를 든 놈들이 내 말투를 흉내 내며 지들끼리 마구 웃어댔다. 내가 빨리 쇠파이프를 버리라고 악을 쓰자 놈들이 더 크게 웃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말했다.
“죽이려면 죽여. 어차피 걔 오늘 처음 본 애니까. 안 그래도 꼴 같지 않게 대장노릇 하려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 됐네.”
“에이 미친 새끼들. 니들 도대체 뭐야...”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놈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파란 모자를 풀어주고 재빨리 허리춤에서 중망치를 꺼내 놈들을 향해 집어 던졌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녀석이 쇠파이프를 틀어 절묘한 솜씨로 망치를 쳐냈다. 불꽃이 튀었고, 그동안 집안에 쌓인 가스는 충분했다. 내가 복도로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폭발음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아찔한 충격을 전해주었다. 가시거리 내에 있는 모든 유리창이 동시에 깨지며, 일순간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바닥이 위로 솟았다 아래로 꺼졌다 하며 마구 요동쳤다. 부서진 돌가루가 머리 위로 쏟아졌고, 짙은 암회색 연기가 문을 통해 꾸역꾸역 새어나왔다. 나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로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럴수록 번번이 땅바닥에 고꾸라질 뿐이었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렸다. 악마의 담배연기 같은 암회색 연기 사이로 비명 같은 신음소리와 함께 살아남은 녀석들이 비틀비틀 거리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피부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근육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처참한 몰골이었지만 그 어떤 동정심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 끔찍한 고통으로 울부짖는 녀석들에게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새카맣게 탄 피부가 발차기에 한 대 맞을 때마다 잘 익은 홍시의 껍질처럼 벗겨졌다.
그렇게 두 놈을 쓰러뜨린 후 복도 난간에 기대서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엉금엉금 기어 도망가는 파란 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녀석도 나처럼 폭발 사정권 밖에 있었던 덕분에 중상은 면했지만 역시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근처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쇠망치를 집어 들고 녀석을 향해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이제 끝을 볼 때다.
“하, 한석아...”
그런대 막 현관문을 지나치려는 순간 매캐한 암회색 연기 사이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내 다리를 덥석 붙잡더니, 불쾌한 음색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마치 못으로 쇠를 박박 긁는 듯한 혐오스런 목소리.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새까맣게 타버린 어떤 녀석이 가는 숨소리를 뱉어내며 내 발 아래서 힘겹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버지였다. 쇠파이프에 얻어맞고 기절했던 아버지가 폭발의 충격으로 깨어난 것이 틀림없다. 움직일 때마다 아버지의 새까맣게 타버린 피부가 쩍쩍 갈라지며 붉은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래도 산사람은 살아야죠. 저 새끼만 죽이면 다 끝나요.”
“그, 그만둬... 한석아... 이제 그만둬...”
“그만두긴 뭘 그만둬요. 저 새끼들이 먼저 시작한 거라구요. 이것 좀 놔요.”
나는 귀찮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말했지만 아버지는 끈질기게 내 다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그 모양새에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도대체가 도움이 안 되는 양반이다. 기껏 도와주러 와서는 쇠파이프에 얻어맞고 기절을 하지 않나. 거기까지는 참아줄 수 있지만, 이제는 녀석들을 얌전히 놔두란다. 참 나 이거,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이럴 시간 있으면 총기관리나 똑바로 할 것이지.
“아, 좀 노라구요. 아이 씨발 놔.”
거칠게 다리를 빼내자 질척한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손이 ‘툭’ 하며 끊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다리에 볼썽사납게 달라붙어 길게 늘어진 힘줄을 대롱대롱 흔들어대고 있는 아버지의 손을 보자 욕지기가 치밀었다.
“아, 씨발 더럽게.”
나는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자석처럼 달라붙어있는 손가락을 일일이 때어내야 했다. 흉물스럽게 타버린 손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후 나는 다시 파란 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복도 바닥을 기고 있었는데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꼴이 꽤나 우스웠다.
상황이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자 이웃집 주민들도 철통같이 닫아두었던 문을 열고 하나 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각각 가정용 공구나 주방도구를 하나씩 들고 복도로 나와서는 폭발의 충격으로 다 죽어가는 쇠파이프 집단에게 가서 무자비한 일격을 가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들. 어디 어린노무새끼들이 할 짓이 없어서 사람을 죽여?”
“너희 같은 것들은 죽어야 해.”
“넌 새끼야 생긴 게 밥맛 떨어져.”
옆집 아저씨도 빠질 수 없다는 듯 망치를 들고 나와 파란 모자의 머리통을 내려찍으려 했다. 나는 행여나 그렇게 될까 싶어 얼른 발차기를 날려 옆집 아저씨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꼴사납게 넘어진 그를 향해 말했다.
“저리 꺼져.”
어쨌든 파란 모자만큼은 내가 죽여야 했다. 그게 맞는 거였다. 아저씨가 몰랐다는 듯 ‘미안해.’라고 하며 황급히 날 스쳐 지나갔다. 왠지 분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런 거에는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파란모자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웠는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새끼, 울기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냐?”
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 쇠망치를 고쳐 쥐었다. 몇 마디 쯤 더 해주고 싶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이제 와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녀석을 죽이고 멸망을 기다리는 거다. 나는 파란 모자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벌벌 떠는 모습을 보니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용서해 주기엔 녀석이 저지른 죄가 너무 크다. 나는 망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 다음 ‘텅’하며 두개골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치켜든 망치를 힘없이 떨어뜨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뭐야 이거,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어찌된 일인지 몸을 뜻대로 가누기가 힘이 들었다.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바닥에 처박은 얼굴을 꼴사납게 일그러뜨리며 가쁜 숨소리만 기계적으로 토해 낼 따름이었다. 깨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뇌수가 내 머리통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번져갔다. 머릿속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혼란스러울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 얼토당토하지 않은 망상을 사실을 믿고 있었다.
아마도 옆집아저씨였을 거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니 금세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새끼가 틀림없다. 분하다는 표정으로 내 곁을 스쳐지나가던 그자식의 얼굴이 머릿속에 잠깐 떠올랐다가 이내 연기처럼 흩어졌다. 녀석이 발차기에 얻어맞은 대가로 나의 복수를 망쳐버린 것이다. 분했다. 억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싹 다 죽여 버리는 건데. 파란 모자가 놀란 얼굴이 되어 내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뭘 보고 있길래 그렇게 놀라는 거지? 갑자기 내 모든 걸 망쳐버린 그 자식이 짓고 있을 표정이란 것이 궁금해 졌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웃고 있을까? 분명히 통쾌해 하고 있겠지. 최소한 죽는 입장에서 그 정도는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신히 고개를 돌렸을 때 내가 본 것은 이제 갓 10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사내아이가 피로 물든 쇠망치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형이 우리 엄마 죽였잖아요.”
아까 복도 비상구 문 뒤에 숨겨두었던 꼬마였다.
“여기도 한 놈 있다.”
잠시 후 가정용 공구로 무장한 이웃집 주민들이 몰려 와서 쇠파이프 집단에게 했던 것처럼, 내 머리통에 연장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가는 파란 모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