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줄 알았던 내 삶은 몇년 가지 못했다.
준우아빠는 검사가 되었고 나는 검사 와이프가 되었다.
결혼한지 1년쯤 뒤에 준우를 낳았지만
6살이 되던 해부터 준우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가장 큰 병원을 데려가보아도 병명을 알지 못했고
결국 병원에서 근 5년간을 지냈다.
하지만 준우는 10살이 되던 해,3개월전에
생일도 맞아보지 못하고 준우는 세상을 떠났다.
준우가 세상을 떠나고 내가 말문을 닫아버리자
준우아빠는 겉돌기 시작했고
매일 낯선 향수냄새를 풍기며 집안을 돌아다니곤 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소리내어 울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언니가 생각났다.
언니도 아버지를 잃은 적이 있었고
언니라면 함께 울어줄 수 있을테였다.
무슨 낯짝으로 그럴까하며 수화기를 몇번이나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큰 맘먹고 전화를 걸었다.
뜻밖에도 언니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려오라고,보고싶었다며 나를 불러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10년만에 재회한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니 언니가 이미 이부자리를 펴두었다.
풀을 빳빳이 먹인 이불은 아마도
언니가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일 것이다.
"미안해.TV도 고장났고.."
"아니야.피곤하네.나두."
"푹 자는게 좋은거야...자자.그럼.."
빳빳이 세워진 이불의 감촉은 너무도 좋았다.
이렇게 언니와 나란히 자본적이 언제였던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언니는 머뭇거리다가 내 손을 찾아 더듬거렸다.
"여기야."
내 손을 쉬이 찾지 못하는 언니의 방향잃은 손을 꼭 잡았다.
"헤..."
언니는 내 손을 문질러보고 꽉 잡아도본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랫목 뜨듯하다못해 답답하다.
눈을 떠보니 이불이 휑하다.
언니가 없다...
"언니-"
대답이 없다.
불안한 마음에 가디건 하나를 걸치고 나와본다.
부엌에도 없고 창고에도 없다.
어딜 갔을까...
안방으로 다시 들어가려다 문득 고개를 돌린다.
저쪽 어디즈음에 서낭당이 있다.
서낭당...
잊고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가 과도 하나를 챙긴 후 서낭당으로 발걸음을 뗐다.
10년전쯤 내 소원을 들어줬을때
소녀는 다음 소원을 빌땐 더 많은 피를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더 많은 양이라면 그 유리조각으론 어림도 없을터였고
지금까지 그 유리조각이 있을리도 만무했다.
예전의 나보다 더 겁이 없어지고 커져버린 탓인지 서낭당은 그리 멀지 않았다.
서낭당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자 걸음을 재촉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작게 들리는 말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마지막 기횔 쓰겠단거지?"
보이진 않지만 소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네..쓸게요."
어둠에 잘 보이진 않지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재밌네.오늘따라 찾아오는 이도 많고."
"네?"
언니 역시 서낭당을 찾은거였다.
언니는 사랑하는 남자를 뺏은 이복동생이 미웠을 것이고
아마도 내 불행을 빌었을 것이다.
아니,준우의 죽음을 빌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까지 드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저 년 때문이야...
저 년 때문에 준우가 죽은 거야...
손에 들고 있던 과도를 꽉 움켜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혜...혜원아.."
"언니,지금까지 재밌었겠네?"
"...아니야..아니야.그런거.."
"내가 불행한게 좋아 미치겠더지?그치?"
"아니야..혜원아..아니야.."
"사실대로 말해."
"...."
"뭘 빌었어."
"...."
"뭘 빌었냐고!!!"
언니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언니 뒤로 소녀가 보인다.
소녀는 이 와중에도 히죽 웃고 있었다.
"우진씨 일...니가 너무 미웠었어...
근데.."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언니는 내 행복을 바래준 적이 없었다.
날 초대하고 다독여주면서 언니는 속으로 비웃었을테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년이라며 비웃었을 것이다.
준우의 차가운 작은 손이 불현듯 떠오른다.
준우 생각에 왈칵 드는 감정에 언니를 향해 과도를 찔렀다.
칼에 딱딱한 뭔가가 부딪히는 느낌이 난다.
하지만 그대로 칼을 빼내 몇번이고 몇번이고 더 찔렀다.
"아..으..으..."
언니는 두 손으로 칼을 찌르는 내 손을 감싼다.
언니의 옆구리에서 칼을 빼내자 피가 쏟아졌다.
칼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혜..혜원아.."
언니의 뺨에 눈물이 타고 흐른다.
언니의 눈과 마주치자 정신이 든다.
이럴 생각은 결코 없었다.
주저앉은 언니를 흔들어본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내 뺨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니 소원은 뭐지?"
소녀는 내 눈앞에 서있다.
히죽거리는 입꼬리가 보인다.
"저..저는..."
피를 쏟아낸 언니가 보이고 준우가 생각난다.
소원해진 사이지만 사랑하는 남자 우진씨도 생각난다.
단 한번의 기회...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눈앞에 희미해진다.
"니 소원을 말해."
"저..저는.."
마지막 기회다.
"준우를..살려주세요.."
"그래?알았어."
"감사...감사합니다..."
이제 언니의 시체를 처리할 일만 남았다.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다..
하지만 준우가 돌아온단 사실만으로도
이 모든걸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근데 말이야-"
"네..?"
"쟤는 죽기 직전에 뭘 빌었는지 알아?"
소녀는 가는 손가락으로 언니의 시체를 가리킨다.
"똑같은 소원이었지.니 애를 살려달라는 소원."
소녀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말을 이어갔다.
"너처럼 걔도 두번째 소원은 추악했어.
널 불행하게 만들어달랬지.
그러더니 오늘은 갑자기 그런 소원을 빌더라구.
근데 말이야-난 산신이 아니거든.
난 배려심이나 선행에서 나오는 소원따윈 들어주지 않아.
그런건 범새낄 타고 다니는 산신할아범이나 들어줘."
소녀는 이제 나무 가지 위로 올라가 걸터 앉아있다.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난 인간들이 불행해지는 걸 원해.
난 너네의 불행,좌절,슬픔같은걸 먹고 살아.
피는 그냥 절차일 뿐이랄까....
너네 둘 사이에서 난 꽤나 재미 좀 봤지.
이젠 배도 좀 찼겠다,니 마지막 소원은 들어줄게."
"당신은...누구죠?"
"뭐라고 부르든 상관은 없어.악마든 악귀든 귀신이든.
중요한건 넌 너를 신경써주는 한 인간을 죽였지.
너같은 애들이 많아야 살만한데 말이야.
암튼 너같은 애들땜에 이골난 산신 할아범은
수십년전에 서낭당을 떠났어.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버렸다던데,암튼.
그냥 배고프고 심심하던 차에 너넬 만난거지.재밌었어."
"왜...왜 이렇게 만든거죠.."
"내가?아니지.니가 한거야."
소녀는 한참을 킬킬대며 웃어댔다.
그리곤 자취를 감추었다.
멍하니 그녀가 앉아있던 가지만을 바라본다.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뻗어있던 아버지가 보인다.
작고 여린 손으로 '엄마'를 부르다 간 준우가 보인다.
뒷모습뿐인 우진씨가 보인다.
언제나처럼 머리가 핑 돈다.
빨갛고 파란 천들이 감긴 가지들을 본다.
뒤죽박죽 그 모습들과 나무 가지의 모습이 섞여 빙글빙글 돈다.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