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한사전에서 crank의 뜻을 찾아보면 구어체 영어에서 괴짜, 괴상한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쓴다고 나와 있을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용법으로, 크랭크(crank)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킬 때도 쓴다.
이는 반드시 현재 인정받지 못하면서 논란거리가 되는(언젠가는 사실로 입증될지도 모르는) 주장을 하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론이나 실험으로써 틀리거나 무의미함, 경우에 따라서는 심지어 해로움이 충분히 입증된(사실로 입증될 가망이 거의 0에 가까운) 것을 사실처럼 논하고, 주장의 근거가 빈약하거나 오해에 기초한 경우를 뜻한다. 한편 크랭크라는 표현에는 어떤 분야에서 발견된 사실과 다른 내용, 또는 다른 방법론을 쓰면서 그 분야를 논한다고 주장하는 '가짜 전문가'라는 뜻도 포함된다.
크랭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유형이 있는가는 여러 웹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각 분야별로 인터넷에서 발견되는 크랭크의 언행을 모아 놓은 Crank Dot Net(
http://www.crank.net/)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크랭크는 엄밀히 정의된 학술 용어도 아니고,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그리 큰 관심을 끌거나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 아니라서 대응되는 번역어(이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널리 쓸 정도의)는 없었다. 표제에도 일단은 영어 그대로 크랭크라고 썼는데, 여기서 crank의 역어로 괴벽가(怪癖家), 또는 오론가(誤論家: 이론가와 대치되는 의미로 지었다)라는 번역어를 제시한다. 이 글에서는 일단 오론가라는 역어를 쓴다.
crank가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의미로, 특히 수학이나 과학 같은 특정 분야와 연관되어서 널리 쓰이게 된 주된 동기는 미국 수학자 언더우드 더들리(Underwood Dudley)가 쓴 책에서 수학 오론가(mathematical crank)라는 용어가 쓰인 것이다.
더들리는 미국 수학협회(The Mathematical Association of America: MAA)에서 발간한 ≪수학 오론가들≫(
The Mathematical Cranks)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 유형의 수학 오론가들의 사례를 수집하여, 이들이 보이는 논법의 오류나 오개념을 지적하고 특징을 분석하였다. 그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불가능함이 입증된 문제 증명: 3대 작도불능 문제, 5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 도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나 골드바흐의 추측 등 현대 수학의 난문을 중/고교 수준으로 증명 시도
- 수학적으로 무의미하거나, 일상의 경험에서 유추한 잘못된 용어나 진술을 사용
- 널리 인정되고 확고하게 정립된 사실을 부정: 원주율 π는 3, 0.999… = 1이 아니다
- 어떤 수학 문제나 개념에 과장된 의미 부여: 마방진(수학자들의 관점에서는 정수 부정방정식에 지나지 않는)에 우주 운행의 원리가 내포
≪수학 오론가들≫에서 제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오론가들이 가장 많이 손을 대는 문제는 3대 작도불능 문제이다. 그 중에서도 각의 3등분 작도, 정육면체 배적 문제가 1, 2위를 차지한다(π의 작도 문제는 5위권 밖이다). 더들리는 ≪수학 오론가들≫을 쓰기 전에도 각의 3등분 작도를 시도하는 사람들과 그 증명을 수록하고 오류를 분석한 ≪3등분가≫(
The Trisectors)라는 책을 쓴 적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3등분가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자신의 이론에 엄청난 확신을 품고 있다.
- 전문 지식이 부족하다.
- 나이 많은 남자다.
- 스스로를 진리 탐구를 위해 몸바친 순교자로 생각한다.
- 전문가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신의 주장을 일부러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 진리 수호를 위해서는 저작권이나 사재 같은 것은 미련 없이 포기한다.
- 문제 자체와는 무관한 일반론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수사로써 설득력을 구한다.
세 번째 사항이 성차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성차별이 아니다. 실제로 더들리가 조사한 여성 수학 오론가의 수는 극히 적다. ≪수학 오론가들≫에서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고 ≪3등분가≫에는 아예 없다. 더들리는 "Men trisect. Women don't trisect."라고 못박기까지 한다. 이것은 여자가 수학이나 과학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별로 권장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고, 모험적/도전적인 행동을 삼가도록 가정 교육을 받아서였을 수도 있다. 만약 실제로 이런 원인 때문이라면, 현 시점에서 수학 오론가들의 사례를 모았을 때는 여성 오론가의 수효도 늘어났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간헐적으로 인터넷에서 눈에 띄는데, 비교적 잘 알려진 경우로는 ≪조선일보≫, ≪한국일보≫ 같은 중앙 일간지에 각의 3등분 작도, π의 작도 등에 성공했다며 신문 광고로 발표하는 최익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최익곤 씨를 비롯한 한국의 오론가들의 특징으로는 위에 열거한 것 외에도 다음을 추가할 수 있다.
- 해당 학문(특히 수학, 과학)의 보편성을 무시하고 국가·민족의 이익, 독자성 같은 요인을 강조한다.
수학 오론가들에 대해 참조할만한 책은 다음과 같다.
Underwood Dudley,
The Mathematical Cranks, MAA, 1992.
Underwood Dudley,
The Trisectors, MAA, 1996.
(주:
A Budget of Trisection이라는 제목으로 1987년 Springer-Verlag에서 발행했다가 절판된 후 MAA에서 재발행)
Edward J. Barbeau,
Mathematical Fallacies, Flaws and Flimflam, MAA, 2000.
여기서는 수학의 예를 중심으로 설명하였으나 이 단어, 아울러 앞서 설명한 오론가라는 인간형의 특징은 다른 분야로도 확장하여 쓸 수 있다. 예를 들면 일상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을 부정하려 들거나, 무한동력기관 제작을 시도하는 사람은 물리 오론가(physical crank), 점성학이나 천동설을 증명하려 하는 사람은 천문 오론가(astronomical crank), 치료 효과가 확인되지 않거나 유해한 것으로 판명된(물론 주류 의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의료법을 선전하는 사람은 의학 오론가(medical crank)이다.
오류에 기반한 설명을 기존 과학에 대한 혁명으로 생각하고, 이를 지적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론가가 생기는 이유를 한두 가지로 요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수학 및 과학 분야로 한정한다면 올바른 과학적 사고를 전해 주지 못하거나 의문을 품었을 때 충분히 이해를 시켜주지 못하는 과학 교육의 문제점도 있을 것이고, 전문가와 일반인들 사이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틀린 사실이 전파되는데도 이를 막지 못하는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들 학문의 본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틀리게 알고 있던 것을 지적받았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새로운 생각을 탄압하려 한다고 곡해하는 개인에게도 책임이 있다. 예를 들면 3대 작도불능 문제가 '불능'인 것은 작도라는 것이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유한 번 쓴다는 조건이 있고, 이 조건 아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인데 대다수 3등분가들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그려나가면 무한히 가까워진다'거나, '자에 눈금을 그어서 표시한 다음 선분을 옮기면 된다'는 등의 논증을 한다. 상대주의 논리를 함부로 적용해서 잘 정리된 이론과 오류에 기초한 논증을 동등하게 놓는 것도 적지 않은 오론가들의 특징이다.
한 분야에서는 전문가라도 다른 분야에서는 오론가가 될 수도 있고, 더들리가 수집한 수학 오론가 중에는 현직 엔지니어, 물리학과 졸업자도 있기에 반드시 교육의 양이 많다고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개개인이 틀린 믿음을 품는 것과 그것이 널리 확산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더욱이 인터넷을 매개로 빠른 속도로 정보가 전파되는 오늘날에는 오류도 빠른 속도로 전파된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이 이러한 지식 전파 양상에 더욱 관심을 보여야 할 필요성(원인을 뿌리뽑지는 못해도 잘못된 사실이 이론 행세를 하는 것은 막아야 하기에)은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