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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록 밴드 The Byrds에 대해서 알아보자!
게시물ID : music_545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yrds
추천 : 1
조회수 : 48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10/21 12:10:53

제가 네이버 블로그에 쓴 글인데요. 그대로 퍼와도 상관이 없겠죠? 제 글이니까.


밴드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는 인터넷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는데요.


그 이상으론 더 이상 찾을 방법이 없어서, 팬으로서 직접 해외 사이트 돌아다니며 얻은 정보로 글을 써봤습니다.


이 밴드에 대한 야사입니다. 이런 게 진짜 재밌는 거라고 생각해서요.


멤버 진영의 변화에 대해서 썼습니다. 2부도 곧 완성할 예정이고요.


이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버즈의 결성부터 알아보자.

 

버즈는 Roger Mcguinn (처음에는 Jim Mcguinn 였는데 'Subud'라는 인도네시아 종교에 빠져 이름을 바꾸었다.)과 Gene Clark이 만나 Peter & Gordon 스타일의 듀오를 결성한 게 시초였다.


그 후 David Crosby가 들어와 이름을 The Jet Set으로 바꾸었고, Michael Clarke, Chris Hillman이 차례로 들어왔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영향으로 이름을 영국식인 The Beefeaters로 바꾸었다. 


비피더스라는 이름이 영국적인 느낌이 나는 건지 아니면 뜻 그대로 런던탑의 경비병이라 그런건지..


나는 한국인이라 잘 모르겠다. 아는 분은 제보 부탁드려요.


이후 하늘을 난다는 느낌을 주면서, The Beatles란 이름을 '일부러 틀리게' 한 느낌을 주도록 The Byrds로 개명했다.

 

 

1. 1966년 2월, 첫 탈퇴... Gene Clark.



포크 록이라는 장르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 버즈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공연에 나섰다.

 

비단 유럽 뿐만이 아니라 L.A.에서 결성된 그들로서는 뉴욕 등 동부에서도 공연을 해야 해 비행기가 필수였다.

 

하지만 진 클락은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했다. 어린 시절 비행기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에.

 

뉴욕 행 비행기가 출발하기 직전 그가 내리자, 로저 맥귄은 '비행기를 탈 수 없다면 자네는 버즈가 될 자격이 없어.' 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가 탈퇴하게 된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진 클락이 밴드 내 주 작곡가였는데, 저작권료로 그룹 내에서 가장 부유한 멤버가 되자 남은 멤버들이 시기를 했다. 


또한 핵심 작곡가로서 부담도 컸다고 한다.

 

탈퇴한 이후 67년에 잠깐 되돌아 왔지만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같은 이유로 3주만에 나가게 되었다.

 

73년에 버즈가 해체된 후 초기 멤버들끼리 버즈를 재결성했는데, 이 때 다시 한번 참여했지만 보통 솔로로 활동했다.



2. 1967년 8월, 두 번째.. Michael Clarke.

 

 

마이클 클락은 사실 버즈에서 그다지 비중이 큰 멤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작곡을 하지 못 했기에. (다른 포스트에서 다룰 것.)

 

멤버들 간의 논쟁, 주로 작곡을 하는 멤버들이 그에게 대하는 푸대접에 감정이 상한 그는 버즈를 나갔다.

 

그 후 녹음 세션으로 다시 한번 참여하긴 했지만 또 다시 나갔다.

 

드러머, 피아노 세션으로 명성을 날리던 Jim Gordon이 버즈의 녹음에 잠깐 참여했지만 공식 멤버는 아니었다.

 

그가 1970년 에릭 클랩튼과 만나 데릭 앤 더 도미노스를 결성하고 Layla의 피아노 연주 파트를 작곡했던 그 짐 고든이다.

 

마이클 클락이 탈퇴한 이후에는 Kevin Kelley와 Gene Parsons가 차례로 그 자리를 꿰차게 된다.

 

케빈 켈리는 버즈의 베이시스트 크리스 힐먼의 사촌이었고, 그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여기에서 다루기로 한다.

 

진 파슨스 역시 버즈가 해체할 때까지 활동했지만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래서 큰 맥락으로 다룰 것이다.)

 

참고로 마이클 클락은 진 클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진 파슨스 역시 진 클락, 밑에 다룰 그램 파슨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3. 1967년 10월, 세 번째.. David Crosby

 

 

 

예술가들은 자의식이 강하다. 자의식이 강하다는 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도 되고, 고집이 세다는 말도 된다.


데이비드 크로스비와 Yes의 베이시스트 Chris Squire를 보면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


버즈와 비틀즈를 보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 간다.' 란 말이 떠오른다.


버즈에선 데이비드와 로저가 자주 충돌했다. 그리고 로저와 친했던 크리스 역시 데이비드를 싫어했다.


로저는 Bob Dylan을 무지 좋아했지만 (버즈의 명곡들 중 밥 딜런의 곡이 차지하는 비율이 큰 이유다.) 데이비드는 밥 딜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목소리를. 


하긴 밥과 데이비드는 41년 생 동갑으로서 데이비드는 한창 이름을 떨치던 그에게 열등감이 있었을 것 같다.


지금 모던 포크 록 장르에서는 밥과 데이비드가 양대 산맥이라고 하는데 그 땐 그랬을 것이다.


버즈가 1집 Mr. Tambourine man 음반에 수록하기 위해 밥 딜런의 곡인 Chimes of Freedom를 녹음하려고 할 때, 데이비드는 이 곡을 절대 녹음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매니저 짐 딕슨은 그에게 '이 노래를 녹음하지 않는다면 자네는 절대 이 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 나를 밟고 지나가던가.' 라고 했다.


고집을 부리던 데이비드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며 녹음에 참여했다. 하지만 역시 멋진 하모니를 들려 주었다.


3집 Fifth Dimension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멤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는 Jimi hendrix, Love, Deep Purple, The Yardbirds 등의 버전으로 유명한 Hey Joe를 수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집 Younger than Yesterday를 녹음하는 과정에서, 데이비드는 리듬과 멜로디가 없는,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음악을 만들어 놓고는 이것도 수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 데이비드는 밴드의 주도권을 잡으려 해 리더인 로저의 비위를 상하게 했고 또 독단적인 밴드 운영으로 멤버들의 반발을 샀다.


1967년 6월에 있었던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에서 데이비드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이나 LSD의 효용성을 주장하는 등 민감한 주제의 이야기를 해 사회 비판적인 노래와 거리를 두었던 버즈를 난감하게 했다. 


또 경쟁 그룹이었던 Neil Young 대신 Buffalo Springfield의 무대에 올라 멤버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의 주장대로 그가 지은 곡인 Lady Friend 싱글로 발매했는데 상업적인 실패로 그의 밴드 내 입지가 추락했다.


비록 Bob Dylan's Greatest Hits의 인기에 힘입어 The Byrd's Greatest Hits가 곧바로 실패를 만회했지만. 


1967년 12월 5집인 The Notorious Byrd Brothers의 첫 싱글인 Goin' back (캐롤 킹의 곡으로 이지 라이더를 본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알 것이다.)을 녹음하기 전 데이비드는, 그 곡은 자작곡인 Triad보다 허접한 곡이라고 말했다.


또한 '멤버들은 당장 커버 곡에 의존할 게 아니라 자신들만의 곡으로 음반을 채워야 한다' 며 녹음을 거부했다. 


이 곡은 일부 다처제를 주장하는 다분히 반발을 살만한 곡이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데이비드는 이 곡을 경쟁 그룹인 제퍼슨 에어플레인에게 넘겨 버렸다.


차라리 그없이 밴드를 운영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로저와 힐먼은 그의 집으로 차를 몰아 그를 해고하기에 이른다. 마지막 봉급으로 데이비드는 보트를 사 하와이로 휴가를 떠났다.


그가 탈퇴한 직후 진 클락과 마이클 클락이 다시 돌아왔다.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에서 맺은 우정으로 데이비드와 버팔로 스프링필드의 Stephen Stills는 영국 밴드 The Hollies의 Graham Nash와 함께 미국 밴드 The Lovin' Spoonful 리더인 John Sebastian의 집에서 Crosby, Stills and Nash를 결성했다.


이들은 버즈를 뛰어넘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닐 영이 참가해 CSNY로 불리기도 했고, 스티븐 스틸스가 탈퇴해 CN로 불리기도  하지만 기본 포맷은 CSN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여기에서도 충돌이 심했다. 그래서 CSNY의 2집 Deja Vu를 녹음하는데 800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Eric Clapton, The Rolling Stones 못지 않은 마약 남용으로 감옥과 병원을 여러 번 갔다 왔다.


하지만 이런 돌발 행동 뒤에 음악적 능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그는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The Byrds는 2인조가 되었고 이 때 케빈이 들어오게 되었지만 3인조로는 밴드 운영이 힘들다는 판단 하에


그들은 키보디스트로 Gram Parsons를 뽑았다. 그가 밴드를 얼마나 휘젓고 떠날 지도 모르고.



4. 1968년 새로운 멤버 Gram Parsons를 영입했지만 곧 탈퇴하다...





그램 파슨스는 블루그래스(2차 세계 대전 이후 발생한, 컨트리의 초기 형태) 밴드에서 만돌린 연주자로 활동했던 크리스에게서 컨트리 음악에 굉장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컨트리 음악을 하자고 그를 유혹했다. 


이 시기에 리더 로저는 '전통적인 포크 음악에서 무그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미국 대중 음악사의 집대성'을 꿈꾸고 있었다. 


로저 맥귄은 이런 이유로 데이비드를 해고한 전례가 있었지만 그램과 힐먼의 설득으로 어쩔 수 없이 전향할 수 밖에 없었다.


컨트리의 본고장인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녹음을 한 후 지역 방송국인 WSM의  대표 프로그램이자, 컨트리 음악의 상징이었던 Grand Ole Opry에 출연했다.


머리가 긴 히피 족이 컨트리를 한다는 이유로 (테네시 주로 대표되는 남부는 매우 보수적이다.) 그랜드 올 오프리의 팬들과 평론가, 대중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 얻어 먹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지금은 그들의 음악이 컨트리 록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컨트리의 일파인 얼터너티브 컨트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램은 '컨트리 록의 아버지'라고 추앙받지만 당시에는 그랬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램은 그의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램은 리드 보컬이 되었고 로저에게 페달 스틸 기타리스트를 고용하자고 했다.


하지만 로저가 거부하자 봉급을 높여달라고 했으며 밴드의 이름을 'Gram Parsons and the Byrds'로 바꾸자고 했다. 


한마디로 그의 백밴드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역시 크리스도 엉뚱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고 로저는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밥 딜런의 곡인 'You ain't going nowhere'가 그램의 목소리로 녹음되어 싱글로 발매한 직후, 그들의 첫 컨트리 록 음반이자 6집인 Sweetheart of the rodeo를 발매되자 전세가 뒤집혔다. 


버즈의 팬들은 낯선 그램보다는 친숙한 로저를 더 선호했던 것이다. 그 곡이 컨트리 록이었음에도.

 

또한 계약 문제로 컬럼비아 레코드로부터 소송을 당한 그램 때문에 밴드는 여러 곡에서 그램의 목소리를 빼고 재녹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리드 보컬로서 그램은 남아 있었다.


1968년 버즈는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로얄 앨버트 홀과 남아공에서의 공연을 추진했다. 


영국 공연이 끝난 직후 그램은 남아공에 따라가지 않고 버즈를 탈퇴했다.  


당시에는 남아공에 인종 차별이 만연했는데 (94년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자신은 그런 인종 차별주의자들 앞에서 공연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그램의 탈퇴 사유는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바로 '그램이 롤링 스톤즈와 친구가 되고 싶어서'라는 것이었다. 


1965년 1집 Mr. Tambourine man이 영국에서도 인기를 끌자 그들은 첫 영국 공연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비틀즈, 롤링스톤즈와 친구가 되었다.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 그램이 버즈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램은 영국의 미들섹스에 있는 Keith Richard의 집에서 머무르며 Mick Jaggar와도 친구가 되었다. 


실제로 롤링 스톤즈와 그램의 우정은 두텁기로 유명했는데, 롤링 스톤즈의 음반인 Sticky Fingers에 수록된 Wild horses와 같은 곡은 그램의 영향을 받은 믹과 키스가 만든 컨트리 록이었다.


밴드는 급히 그램을 대체해 리듬 기타리스트를 투입했지만 공연은 최악이었다. 그램의 탈퇴에 남아공 관객들은 밴드에 야유를 퍼부었고 (자기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밴드는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또 영국과 미국의 언론들은 인종 차별이 만연한 곳에서 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깎아내리면서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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