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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누드는 왜 인정받지 못할까?
게시물ID : humordata_11959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뀨잉~?
추천 : 5
조회수 : 115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10/21 19:24:06

 

남성 누드는 왜 인정받지 못할까?

By MARY M. LANE

Fondation Beyeler, Riehen/Basel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

 
남성 누드는 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걸까?

지난 수백년 동안 서양 예술계에서 여성 누드는 욕망의 대상으로 널리 인정돼 왔다. 보티첼리의 1485년작 ‘비너스의 탄생’부터 1991년 애니 레보비츠가 촬영한 데미 무어의 만삭 누드사진에 이르기까지 여성누드는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남성 누드는 이와는 정반대의 대접을 받아왔다. 역대 교황들은 바티칸국에 위치한 남성 누드조각상의 민감한 부위를 가릴 것을 명했으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조차 이런 제약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런던의 미술관에 전시된 다비드상 모작을 본 빅토리아 여왕이 충격을 받자 관계자들은 하반신 일부를 무화과 잎사귀로 교묘하게 가렸다.

이러한 역사를 생각해 봤을 때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미술관이 서양 미술계의 대표적인 남성 누드작품 300여 점을 선보이는 ‘벌거벗은 남자’ 전시회가 반발에 직면할 것이라는 예상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19일(금요일) 개막을 앞두고 주최측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강력한 반대가 포착되고 있다. 이번주 초 미술관 관계자들은 항의가 쇄도한 전시회 홍보 포스터를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레오폴드미술관의 클라우스 포코니 대변인은 “우리 사회는 남성누드에 익숙하지 않다”며 “종교에 기반한 문화적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오폴드미술관은 전시회를 홍보하기 위해 프랑스 예술가 피에르 콤모이와 질 블랑샤르가 2006년 촬영한 벌거벗은 축구선수 3명의 사진을 대형 포스터로 만들어 빈 시내 곳곳에 붙였다. 곧 격렬한 항의가 쏟아졌다. 미술관 측은 시위 대비책을 고안하는 한편, 문제가 된 부위를 적색 테이프로 가렸다.

Reuters
수정된 전시회 포스터

일부 시민은 포스터를 보고 충격적이었던 성경험을 떠올렸다고 항의했다. 포코니 대변인은 “안타깝게도 여성 누드와는 달리 남성 누드를 보고 성적 학대를 연상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고 전했다.

이러한 이중적 기준은 수백년 동안 존재해왔다.

16세기 피렌체의 성당을 장식했던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누드화는 그림에 대한 성적 환상을 품게 되었다는 여신도들의 고해성사가 이어지면서 철거되었다.

1898년 구스타프 클림트는 제1회 빈 분리주의 전시회를 홍보하기 위해 그리스신화의 영웅 테세우스의 누드를 담은 포스터를 만들었지만, 항의를 받고서 민감한 부위를 가린 새 버전을 제작했다. 내년 1월28일에 마감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원버전과 수정버전이 둘다 전시된다.

‘벌거벗은 남자’ 전시회는 기원전 2,40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조각상 등 고대작품도 담고 있지만, 전시 작품 대부분은 지난 200년 내에 만들어진 것이다.

19세기는 남성누드의 황금기였다. 18세기 후반 볼테르와 칸트가 강력하게 주창한 개성과 이성이 프랑스 예술계에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영웅을 일반 대중과 차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누드가 사용됐다.

빈 응용예술대학의 다니엘라 투겐타트 교수는 “영웅적인 죽음으로 끝을 맺을지라도 독립성은 남성누드와 연관지어진다”고 말한다.

탕크레드 바스테의 1883년작 ‘역사화가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예술학교 전경’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누드는 유럽의 저명한 남성전용 예술학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옥스포드대학의 제랄딘 존슨 교수는 “예술학교에서 여성 모델을 고용할 때도 있었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남성 누드모델을 쓰는 것이 더 손쉽고 저렴한 방법으로 인식되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 전시작품인 조제프 데지레 쿠르의 1828년작 ‘히폴리투스의 죽음’은 벌거벗은 영웅 히폴리투스가 계모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모함에 빠져 죽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의 1848년작 ‘죽음 앞의 평등’은 천사가 벌거벗은 시체에 천을 덮어주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존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성 누드는 성적인 논란을 피하기 위해 신화에 나오는 영웅이나 종교적 인물처럼 안전한 주제를 담았다. 종교적 인물을 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로 들어서면서 남성 영웅주의가 퇴색함에 따라 에곤 실레와 리하르트 게르스틀 등 오스트리아 예술가를 중심으로 음울하고 자기성찰적인 분위기의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투겐타트 교수는 “몇몇 역사적 요소가 전통 남성사회를 위협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남성 개인의 힘이 예전에 비해 덜 중요해졌으며, 여성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한편, 오스트리아제국도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예술가들은 남성 누드를 고대영웅으로 묘사하는 관행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쉴레는 28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누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이번 전시회의 큐레이터 토비아스 내터는 “쉴레를 계기로 예술가들이 누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20세기 초에는 누드를 강조하기 위해 옷을 입은 모습과 누드를 같은 포즈로 그리는 경우도 있었다. 게르스틀의 1907년작 ‘팔레트를 든 자화상’에서 그는 진청색 양복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25세에 자살하기 직전 완성한 1908년작 ‘팔레트를 든 누드 자화상’은 같은 포즈지만 누드이며 눈빛에 광기가 어렸다는 점이 다르다.

쉴레와 게르스틀의 작품을 시작으로 남성 누드 자화상의 세기가 시작됐다. 이후 미국의 사진예술가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남성누드자화상이라는 주제에 극단적인 면을 가미했다.

1900년을 전후로 사진이 확산되면서 보디빌더와 운동선수들의 누드 사진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페미니스트 및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시작되면서, 여성 예술가와 앤디 워홀 등 양성애자 또는 동성애자 남성 예술가가 예술을 통해 성적 환상을 표현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번 전시회에서 레오폴드미술관은 워홀의 1982년작 ‘퀘렐’과 성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우루스 뤼티의 자회상을 전시하며 당시 추세를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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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kr.wsj.com/posts/2012/10/19/%EB%82%A8%EC%84%B1-%EB%88%84%EB%93%9C-%EC%9E%91%ED%92%88%EC%9D%80-%EC%99%9C-%EC%9D%B8%EC%A0%95%EB%B0%9B%EC%A7%80-%EB%AA%BB%ED%95%B4%EC%99%94%EB%8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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