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제국이 붕괴할 무렵부터 13~14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의 전장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중무장한 기병대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체인메일과 기병창과 방패를 기본으로 무장해서 전투를 벌였는데, 기본적으로 기사전술은 한명의 기사와 소수의 호위보병이 한 단위(Banner)가 되어서 전투에 참가하는, 오늘날의 군사개념으로 말하자면 '분대단위전술'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석궁, 폴암등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출현하면서 14세기이후 중무장기사들의 종횡무진은 차츰차츰 그 위력을 잃기 시작해서 핸드고네, 아르케부스같은 초창기 화약무기들이 일반화되는 16세기에는 완전히 그 힘을 잃게됩니다. 봉건기사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13세기 중엽부터 그들이 착용했던 체인메일에서 팔다리, 가슴과 같은 취약부위를 철판으로 강화하기 시작했는데, 14세기 말엽에 이르면 드디어 갑옷 전체가 철판으로 만들어진 플레이트메일(Platemail, Plattenpanzer)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위 그림은 15세기 중엽의 목판화로 한무리의 전투를 벌이는 부대가 보입니다. 이들은 말에서 내린 기사들로 제각기 다양한 형태의 플레이트메일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사실 플레이트메일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오래되었는데,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에 입었던 청동흉갑이나 가야를 비릇한 삼국시대의 판갑도 플레이트메일에 속합니다.
플레이트메일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합니다. 위의 것은 15세기 경에 만들어진 이탈리아식 플레이트메일의 모습입니다. 흔히들 하는 오해로 '플레이트메일을 입고 혼자서는 말에 올라탈 수 없고 기중기를 이용해서 기사를 말에 올려야했다.' 라던가 '플레이트메일의 무게는 60~70kg씩 한다.', '플레이트메일은 칼을 맞아도 찌그러지지조차 않는 갑옷이다.'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위 갑옷의 무게는 불과 23kg정도밖에 하지 않으며, 12세기의 체인메일 한벌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무게와 거의 비슷합니다. 또한 몸전체에 갑옷을 입는것이기 때문에 무게분산이 골고루되어 입은 느낌조차 거의 들지 않습니다. (잠깐동안 살이 23kg 쪘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것 같습니다.) 보기에 무거워보이지만 플레이트메일이 무게가 별로 나가지 않는것은 생각외로 철판의 두께가 얇기 때문입니다. 플레이트메일의 두께는 'gauge'라는 단위로 나타내는데, 전투용갑옷의 두께는 14 gauge (1.51mm), 마상시합용 갑옷의 두께는 16 gauge (1.89mm) 정도입니다. 이렇게 얇은 판으로 어떻게 화살이나 칼날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바로 열처리에 있었습니다. 초창기 플레이트메일은 경험미숙으로 인해 쉽게 깨지는 약점이 있었지만 15세기에 들어 열처리기술이 완성되면서 충격을 흡수하면서도 잘 찌그러지지 않는 중탄소강 철판이 개발되었는데, 이러한 철판을 이용해서 갑옷을 만들었기때문에 최대 280J의 충격까지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이정도의 방어도면 아주 근거리에서 발사하지 않는이상 철석궁으로도 뚫기 힘든 수준입니다. (물론 플레이트메일도 핸드고네나 아르케부스로는 뚫리며 모든 갑옷의 천적인 메이스류에는 약합니다.)
고딕아머(Gotische Rüstung - 위)와 막시밀리안 아머(Maximilianrüstung - 아래)의 다양한 모습 15세기 말엽 독일의 갑옷장인들은 물결무늬와 경사각도를 도입한 갑옷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고딕아머'라고 부르는데 고딕아머의 장점은 물결무늬 처리를 통해 같은 두께의 갑옷이라도 훨씬 더 높은 방어효과를 냈다는 점과 피탄각도를 고려한 갑옷의 설계를 통해 당시 일반화되기 시작한 아르케부스에 의해 갑옷이 뚫리는 일을 최소화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고딕아머는 16세기초에 '막시밀리안 아머'라고 불리는 형식으로 발전했는데, 막시밀리안아머는 고딕아머와 제작기법은 동일하지만 고딕아머에 비해 물결무늬처리와 피탄각도처리가 더욱 더 복잡해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물결무늬처리를 하는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제작비용이 매우 비쌌기때문에 막시밀리안 아머는 왕이나 유력귀족과 같은 계층에서만 사용했습니다. 사실 중세시대 모든 갑옷의 제작단가는 매우 비쌌는데, 15세기경 영국 기사의 연봉은 20파운드 였고 (당시 1파운드는 20쉴링이고, 1쉴링은 12펜스.) 일당이 1쉴링 4펜스였던데 반해 당시 많이 입었던 '코트 오브 플레이트'의 가격은 13쉴링 9펜스(156+9P), '체인메일 튜닉'은 11쉴링 6펜스(132+6P)로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비싼 돈 들여가며 갑옷을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이후 플레이트메일은 나날이 화력이 강해져가는 총의 위력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아무리 갑옷을 두껍게 해도 총알을 막아낼 수 없었고, 그렇다고 갑옷을 두껍게 만들자니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워져 버려서 오히려 착용자의 목숨을 위협하게 됩니다. 플레이트메일은 총을 맞아도 그다지 큰 상처를 입지 않는 부위인 발과 팔등을 과감히 제거하거나 장갑의 두께는 줄인 퀴라시에 아머(Cuirassier armour)라고 부르는 최후의 단계까지 발전하지만 결국 16~17세기경에 이르면 플레이트메일은 더이상 전장에서 활약하지 못하고 의장용갑옷으로 전락해버리게 됩니다. 위의 그림은 '30년전쟁'당시 신성로마제국 퀴라시에 기병의 모습으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퀴라시에 아머를 착용하고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16세기 중엽에 이르면 결국 기사들도 전통적인 기병창과 기사전술을 포기하고 화약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