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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에서도 흔하지 않은 남매 싸움[스압]
게시물ID : humorbest_3760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VERGILΩ
추천 : 135
조회수 : 17016회
댓글수 : 8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8/02 19:59:40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8/02 19:46:12
 실제 여동생이 있는 사람이라면 
뭐? 반도의 흔한 여동생?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리 없어?
같은 게시물 보면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올거라는 거 압니다.
그런 차원에서, 반도에서도 흔하지 않은 남매의 데빌 메이 크라이.
글 재밌게 쓰는 재주가 없어서 어쩔지 모르지만 아무튼.
앞으로는 반말.




 연년생 여동생이 있는 나로서는,
여동생이 밤에 방에 들어와서 "오빠 자?" 
뭐 이런 소리들으면 토가 쏠린다.
내 23년 인생의 6할은 여동생과의 전쟁이었다.
그 비극적이고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의 역사를 술회하고자 한다.


 0. 스펙

 여동생은 나와 완전히 정반대의 인간인데,
나라는 존재에 반물질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내 여동생일 것이다.
(반물질이 그런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대강의 스펙은,
 나는 171에 58. 호빗 간지.
깝치기 좋아하고, 개념없다는 말을 내 이름만큼 많이 듣는 보통 남자.
하지만 스스로는 생각이 많고 진지하다고 자부하는 평범한 남자.
올해 23이고, 서울서 4년제 재학 중. 군필이고, 철이 없다.
 동생은 대충 166 정도. 몸무게는 모른다. 야외에서는 나보다 키가 크다.
자기가 존나 쿨하고, 냉정하고, 까리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소심하고, 감정적이며, 찌질하다.
올해 22이고, 사범대 재학 중, 나보다 한 학년 위다. 철이 없다.

 지금은 썩 잘 지내고 있지만, 입대하기 전에만해도 
우리는 정말 죽고 못사는 오누이였다.



 제1장. 개전

 부모님께 듣기로는, 아주 어렸을 때는 우리 둘은 정말 사이 좋았다고 한다.
물론 기억은 나지 않는다.

사람마다 최초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7살 무렵.
하나 뿐인 여동생이 나에게 과도를 던진 것이다.

 뭐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다.
기억나는 건, 장난인 줄 알았는데 동생이 진짜 칼을 던져버린 것.
그게 마룻바닥에서 튀어올라 내 정강이에 박힌 것.
빡이 돈 나는 대청에 피를 쏟으며, 칼이 박힌 다리로 여동생의 어깨를 밟아 뽑아버린 것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영화같은 관절기가 완벽하게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우리 가족은 대도시 근교의 과수원에 붙어있는 작은 한옥집에 세들어 살았다.
아버지는 도시로 출퇴근 하셨고, 어머니는 지인의 과수원에서 과수원지기같은 일을 하셨다.
오전일과를 마치고 점심을 드시러 들어오신 어머니는 
그 참상을 보고 기절할 뻔 했다고 말씀하셨다.
화성연쇄살인 같은 살인마가 집을 습격했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동생은 기절했고, 나는 무서워서 칼을 뽑아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그 길로 우리 남매는 구급차에 실려갔고, 어머니는 부끄러워서 구급차 안에서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정강이에 남아있는 흉터는,
여자친구는 군대에서 수류탄 파편에 맞은 상처라고 알고있지만,
사실 동생한테 맞은 칼빵이다.

 그 후 2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그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설명도, 사과도 듣지 못했다.

 아무튼 그 후로,
우리들은 매일을 아프간 전장 같은 긴장 속에서 죽고 죽이는 일상을 되풀이했다.
...는 건 뻥이고, 틈만 나면 싸웠다. 



 2. 백병전

 우리 남매의 싸움은, 많은 경우 관객들에게 흥분보다는 당혹을 안겨주었다.
각목과 짱돌로 싸우다 머리가 터진 적도 많았고,
서로 멱살을 잡고 등판에 밤송이를 박혀가며 야산을 구르기도 했고,
미끄럼틀에서 떨어뜨리거나, 차도로 밀쳐버리기도 했다.
(교외의 외각도로라 차가 굉장히 빨리달렸다)
한번은 동생에게 계속 살충제를 뿌리면서 괴롭히자
라이터를 들고선 "불 켜면 너도 죽어"라면서 협박받기도 했다.

 오빠가 동생하고 이렇게까지 싸웠다고 해봤자 나만 손해지만.
그래, 나도 부끄러운거 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여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년생인데다가, 나보다 머리도 잘 돌아가고, 팔힘도 좋고, 키고 컸다.
게다가 그다지 미워 죽겠어서 정말 죽이려고 했던건 아니다.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더 위험한 장난을 치느냐를 놓고 경쟁했던 것 뿐.
어릴 적이라 그렇게 겁없이 위험천만한 행동을 했던 거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행운이 쌓인 결과인지를 실감한다.
아무튼 우리는 피를 보지 않고서는 싸움을 끝내지 않았다. 

 전통적인 기독교 집안 출신인데다 마음 약한 어머니에겐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이었고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들에게, 우리 남매의 일상은 매일매일이 시네마 천국이었다.
장르는 블록버스터라기 보다는 하드보일드 스릴러.

 (당시)국민학교 담임선생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우리 남매를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
우리는 보이기만 하면 미친듯한 다찌마와리를 벌였고
이것저것 던질 것이 많은 학교다 보니, 괜히 구경하다 다치는 놈들도 생겼다.
아무리 혼내도, 둘 다 "내가 혼난 건 모두 그 자식 때문이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복수로 다시 싸워대니 답이 없었다.

 어머니가 믿어 의심치 않으셨던 기독교적 '사랑과 용서'에 대한 교육도 무의미했다.
매주 일요일 주일학교 선생님과 동생과 나는 삼자대면의 자리를 가지고, 
예수님의 숭고한 가르침을 배웠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계속 그렇게 동생하고 싸우면, 너 나중에 지옥간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동생을 바라보며 그윽한 눈빛으로,
 "너와 함께있는 이곳이 지옥이야" 라고 말해주었다.
교회에서 '여긴 지옥ㅎ'이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은 주일학교 선생님은,
자신이 지금까지 가르친 용서와 포용의 가치를 전격 부정하고 내 싸대기를 날렸다.
물론 그 후로 교회와의 인연을 끊었다.
  
 내가 태권도를 다니기 시작하자, 동생도 부모님을 졸라 운동을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나와 같은 도장은 물론, 배우는 종목이 겹친다는 것도 싫어했기 때문에
남매가 함께 다니면 다소 DC를 해줌에도 불구, 동생은 합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합기도를 무서워하는데,
동생에게 잡혀서 손가락만 3번 정도 부러졌기 때문이다.

 

 3. 심리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고 우리 남매도 고학년이되자 
겨우 어지간한 사리분별은 할 수 있게 되었고
지나치게 난폭하게 싸우는 건 그만 두었다.
하지만 우리 남매의 서로간의 불신은 메워지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방법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과하는 척하고
다른 아이들을 선동해 왕따시키고 모르는 척 한다던가.
서로의 친구들을 이간질해 싸우게 한다던가.
그 중에 가장 효과만점이었던 건,
네가 주워온 아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우리 남매는 생일이 아슬아슬하게 11달 정도의 차이 밖에 없었다.
그 점에 근거해, 왜 네가 우리 엄마의 친자식이 아니라 입양한 자식인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 받았을 때는, 충격에 정신이 나가버릴 뻔 했다.(알고보니 나는 조산아였다)
하여간, 몸에 상처가 남지 않는다는 것 뿐이지 악질적인 점은 여전했다. 

 작은 학교인데다 연년생이다보니
내 친구가 동생 친구고, 동생 친구가 내 친구인 경우가 허다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처음엔 그저 재미있는 장난으로 여겼던 친구들도
이건 너무 심하다며 동조하지 않으려 했다.
더 이상 우리들은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상처를 주는 게 힘들어졌다.

 그 이후 싸움의 양상은 지리멸렬한 폭로전으로 변했다.
시작은 동생이 내 일기장에 쓰여진 여자친구에 대한 찬가에 곡을 붙여 
친척들 사이에 히트시킨 것이었다.

 아무개야, 너만을 사랑해♪
아이러뷰, 이히 리베 디히, 쥬뗌므, 워아이니, 아~이~시~떼~루~♡ ♬

 어린이 잡지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각 나라의 언어로 표현한 것을 참고해 만든
순수함과 동심이 담긴 러브송이었다. 
부끄러움과 당혹감, 내 일기를 멋대로 가져다 봤다는 분노에,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자 나도 동생의 일기를 빼앗아 
초등학교 6년 간의 남자친구 이름(약 8명)을 조선왕조 외듯 외우고 다녔지만, 
이미 나작사 동생작곡의 후크송이 일가친척과 학교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뒤였다.

 덕분에 나는 그 여자애에게 비참히 차였고,
돌아가신 할머니께서는 내가 내려올 때마다, 아직도 그 애 잘 만나고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그 후로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서로의 치부를 알아내 
어떻게 하면 널리 퍼뜨릴 수 있을지에 총력을 다했다.
명절마다 사촌누나들은 우리들의 고품격 리얼폭로쇼를 관람하기 위해 다과를 준비해 두었고
우리는 검투사처럼 서로의 명예에 상처를 입히고 너덜너덜해졌다.
덕분에 우리 남매의 생활태도는,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단히 점잖아졌다.



 4. 소모전

 중학교 때부터는 더 이상 지나친 인신공격은 피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 
이제서야 겨우 주먹질 하는 것이 부끄러운 줄을 알고,
서로를 흉보는 것도 제 얼굴에 침뱉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기억의 뿌리에서부터 이어져온 적의는 여전한 것이어서,
우리는 서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상대를 내려다보며 냉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일환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연애사업이었다.
동생은 나보다 나이많고 잘생긴 남자와 사귀려고 안달이었고,
나도 나대로, 동생보다 어리고 이쁜 애를 찾느라 혈안이었다.
 다만 그런 행동에 연애감정은 지극히 희박했고
단순히 "너보단 내가 잘나간다"는 걸 보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귀기로 결정되자마자 집에 데려와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깨지는 일의 반복이었다.

 우리 남매가 가장 통쾌하게 여겼던 것은,
 동생의 경우, 나보다 나이 많고 키도 크고 잘난 놈을 집으로 데려와
내 눈 앞에서 그 놈에게 "오빠, 오빠"하면서 아양을 떠는 것이었고
(난 내 동생에게서 오빠라는 말을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호칭은 생략한 채 대화를 하곤했다.)
 나의 경우, 마찬가지로 이쁘고 어린 애가 "오빠 오빠"하는 것에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오빠다운 미소를 지으며 애교를 받아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내 입으로 이런 말하고 싶지 않지만, 키고 작고 둥글둥글해서 
누나들에게 끌려다니는 타입이었고, 나 자신도 연상 취향이다.
동생은 키도 크고 날카로운 스타일이라 그런지, 
어쩐지 동성에게 인기가 많은 듯 했다.(그저 추측이지만)
동생은 잘나가는 오빠들보다 자기 후배를 더 자주 데리고 왔다.

 여튼 그런 왜곡된 연애관을 가진 우리 남매는
오래지 않아 인근 학군에 쓰레기로 이름을 날렸다.
철드는 게 한참 늦은 우리들은, 물론 그런 평판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5. 제한전

 고등학교 들어서는 그런 경쟁심리가 좋은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어느 정도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우리 남매는 성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나나 동생이나 보통 정도의 성적은 내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져서야, 
가만히 앉아서 책장 넘기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걸 서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성적이 경쟁종목이 되었다.
우리 둘다 "그 자식이 공부를 할리가 없지"라는 생각으로 공부했다.
가엾으신 어머니는 그제서야 안도하셨다.
이 모든게 하나님의 굽어살핌이라 여기고 감사해하셨다.

 가끔 학원에서 여자애들이 
"이번에 성적 오르면 엄마가 핸드폰 바꿔준데ㅎㅎ" 라며 종알거리는 것을 들으면 
'아직도 철이 안들었구만'하고 생각하며 콧웃음을 쳤다.
물론 철이 안 든건 나라는 건 이젠 안다.

 우리는 매번 자신만만하게 성적표를 가져와 꺼내놓았고
만약 상대의 성적이 자기보다 낮으면 온 힘을 다해 비웃었다.

"하! 저 따위 성적으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엄마, 걱정 안되요? 아니, 난 쟤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겠어.
 그럴거면 대학 가지마! 돈 아깝게. 엄마도 좀 뭐라고 하세요." 

 이런 말을 듣는 동생의 굴욕적인 표정은
코피 터트리며 밤새 공부한 피로를 싹 날려주었다.
어머니께서 동생에게 "오빠 좀 보고 배워라!"라고 말한다면
잠들어 있던 댄스본능 마저도 깨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머니께선 늘 패자를 위로하고 
"너희가 이렇게 잘 지내니, 엄마는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잘 지낸다니, 가끔은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에 짜증이 치밀기도 했다.



 6. 휴전

 나는 아슬아슬한 성적으로 그럴싸한 인서울 어문학과에 입학했고
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지방 국립대 사범대에 진학했다.
일단 함께 살지 않으니 싸울 일도 없어졌지만
여전히 가끔 서로에 대한 도발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지잡대 다니는 주제에 뭘 안다고 떠들어? 너처럼 생각없이 취직만 하면된다고 생각하는 놈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발전이 없어. 알어?"
 "졸업해서 뭐해먹고 살려고 그래? 현실감각 없긴. 고시본다고 손 벌릴 생각은 하지도 마." 

 부모님께 죄송스럽긴 하지만, 글쎄, 동생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그런 도발은 가끔 나에게 동기부여를 하기도 한다.
동생은 임용만 패스하면 신용등급 1 등급인 교사. 게다가 군대 다녀와서 나보다 한 학년 위.
젠장. 동생이 먼저 취직해서 떵떵거리는 꼴을 어떻게 보나 싶어서 컴퓨터를 끄고 책을 펴기도 한다.

 사실.
내가 이나마라도 깡다구 있고, 연애 경험도 있고, 이 정도 학교와서 이렇게 공부하는 게
상당 부분 동생에게 자극받았다는 걸 인정하는 바이다.(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리고 23년 동안 오빠 노릇이라곤 해준 일이 없고,
정말 죽일 뻔 했었던 거에 대해서는 조금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니, 그렇다고 이제와서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과연 사과할 사람이 나인가? 하고 생각하면 배알이 꼴려 도무지 못하겠다.

 동생이 오유를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만에 하나 이런 글을 썼다는 걸 알면 얼마나 화낼지 모르니 후달려서 인증은 못하겠다.
너희들도 여동생 인증샷 보고 싶은 이유가,
그냥 남의 주민등록증 사진 보고 싶은 정도의 호기심 뿐이지 않은가.
별로 예쁜 것도 아니니 기대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동생에게는,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웃으면서 넘어가 줄 수 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반성하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부모님께 남매간 우애있는 모습은 한 번도 안보여드리고 돌아가시게 할 작정이냐? 

 그리고, 이 글 못볼 걸 아니까 하는 말인데,
솔직히 좀 미안했다.
아니, 때려서 미안한 건 전혀 없고.
너도 그냥 싸우는 거 좋아했잖아, 단테같은 가시나.
그냥 딴게 아니라. 오빠 노릇 못해줘서 미안한 거다.

 나도 나 병신이고 개념없는 거 아니까,
너도 니가 진짜 생양아치라는 거 인정해라.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나름의 원칙과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잘 싸웠으면 좋겠다. 너 요새 부쩍 잘 삐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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