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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과연. 경제 대통령이었나?
게시물ID : humordata_3763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신나
추천 : 13
조회수 : 52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07/01/29 18:54:53
박정희 경제발전의 허와 실 박정희가 했던 경제발전모델에서 이것이 최선이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외교적인 것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해방이후 박정희정권 전까지는 원조경제라고 한다. 즉 미국이 한국에 한국화로 대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원조를 하게 된다. 이로서 한국 농촌은 피폐할데로 피폐해 지고 만다. 대표적인 예가 농촌에 밀재배가 싼 미국 밀에 의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이후 박정희는 쿠테타로 집권을 하게 되면서 미국내 인권운동단체 압력과 미국경제가 전후호황이 끝나면서 상대적으로 침체하는 근거로 더 이상 원조를 전처럼 쉽게 받지 못하게 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박정희는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게 되며 이를 세계 언론은 제3세계국가에서 불법적으로 집권한 집권자가 미국에게 이를 허락받기 위한 알현(번역을 하면서 조금 강한 단어를 사용함)하였다고 비웃는다. 결국 국내 경제위기와 내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취약한 집권자인 박정희는 단 한 가지 타개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내걸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일본과 수교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인다. 이미 이승만 시절에 국교가 정상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미 일본제품이 밀수입 되어 지하경제로 상당부분 수입이 되어 있었기에 이를 제도권 내로 끌어 들이는 것도 필요했다. 그러나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하는데에는 한일굴욕외교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졸속이고 굴욕적인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월간조선에서조차 80년대 중반에 이를 지적하면서 내부 반대를 생각하지 않고 졸속으로 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독도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것은 단순한 예가 되겠다. 다만 경제문제에만 집중을 해보자. 이 때 박정희는 일본에 5억불 유무상 차관과 함께 국교를 정상화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남한내 반대세력을 적절히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남한내 반대데모와 같은 것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강온책을 사용하면서 국제여론을 조금만 더 이용했으면 더 많은 경제적인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유무상차관 역시 독립축하금이란 이상한 형태로 받게 되며(일본이 식민지강점을 했던 배상금이 아님) 이것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해서 얻었던 그 이득을 또는 그 문제점에 대한 부분조차 조사하지 않고 이것으로 그 이후 밝혀지는 가혹행위에는 더 이상 배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다.즉 일제가 강제징용을 했던 사람들이나 위안부들에게 한국은 이 조약에 근거하여 배상을 요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할 수 없게 되면서 그 기회비용을 잃게 되면서 우리가 지불해야하는 대가는 경제적으로만 따져도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5억불이라는 것도 더 받을 수 있는 것을 일단 한국내 경제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더우기 취약한 집권기반을 무마하기 위해 졸속으로 처리하게 되면서 치루어야 했던 그 비용은 어마어마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5억불은 또 일부 재벌에만 집중이 되면서 경제력이 일부에만 지나치게 집중이 된다.(이는 나중에 계속 증명한다.) 그러면 이 5억불로 박정희는 무엇을 했는가. 박정희는 이 5억불로 경부고속도로를 짓는다.(이 외에도 한 일이 더 있지만 경부고속도로를 만든 것이 가장 큰 사업이었으므로 이것만 언급한다. 이를 대표원리라고 한다.) 게다가 이 경부고속도로는 실제로는 5억불을 다 집어 넣어도 정확히 말하면 건설이 불가능하다. 이 증명은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한다. 다만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저임금 부실공사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 경부고속도로를 보수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며 이를 농담으로 10년간 이 보수비용만 모아도 경부고속도로를 최소한 몇 개는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던 당시 말을 인용한다. 악수는 악수를 낳는다. 일본과 수교에서 실패한 박정희정권은 또 다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여전히 취약한 집권기반과 경제적 실패는 결국 해외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것으로 타개를 하려고 하나 국제적으로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한다. 결국 박정희는 또 다를 종자돈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것이 월남파병이다. 이는 원래 박정희가 미국에 가서 자기 집권기반을 인정 받기 위해 이미 미국에 요청한 일이다. 즉 한국 젊은이들 피를 팔아서 자기 집권을 공고히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월남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를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한국에도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이미 한겨레21에서 밝히고 있으므로 다만 여기서는 그 피값만 생각한다.그 당시 다른 나라 사병보다도 적은 월급을 받은 장교들과 사병월급이 미군에 비해 몇 분에 1밖에 되지 않았으며 한국군은 가장 위험하고 힘든 곳에 주로 투입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피값 덤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것을 갖고 포철을 만든다.(역시 대표원리임) 그러나 이 포항제철 역시 상당한 졸속공사였으며 대단히 환경친화적이지 못했다. 포철에는 냉각탑이 없다. 다만 강물을 끌어 들여 고로를 냉각한다. 여기서 높아지는 물은 1도정도이다. 1도란 것은 환경에서는 겨우 이 1도 차이가 아이슬란드에 방목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결정할 정도로 큰 것이다. 즉 영일만 일대에 어업은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해대책이 없었기에 환경으로 지불하게 된 비용 역시 엄청나다. 파월장병 월급조차 덤핑을 해서 지금과 같은 포철을 최소한 3개는 지을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는 게다가 피값 덤핑이라고 반대여론이 있어도 신의라는 이상한 논리로 이를 무시하여 더 좋은 경제발전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박정희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가시적인 효과를 보였다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대통령이었을까! 차관위주 경제발전과 조립산업 경제발전 모델은 나중에 반박한다. 박정희 경제발전은 정치논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스스로가 불법으로 집권을 했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가시적인 효과를 보기에 급급했던 허약한 정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경제발전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보여준 그 조급증은 더 나은 경제발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애시당초에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착한 경제발전은 박정희가 죽을 때 이미 세계에서 빚이 4번째로 많은 나라였으며 외세의존적 발전모델일 수 밖에 없어고 무역역조가 국민총생산에 1/5이나 되는 기형적인 경제로 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전두환 역시 그대로 계승한다. 전두환과 노태우 역시 불법적으로 집권을 했고 이 취약한 집권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업적에 집착해야만 했다. 88올림픽(흑자라고 항변하지만 실제로는 적자였음)이나 대전엑스포와 같은 것 말고도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핑계로 경제적으로도 보이는 것에만 집착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이 IMF라는 국가경제위기를 불러오는 간접적인 이유가 되는 것이다. 박정희 경제발전 모델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에는 모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가 외교적으로 비웃음을 받으면서까지 집착했던 경제적인 도움도 사실은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이기에 성공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박정희가 한 업적이라고 하는 경제발전은 전면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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