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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높았으나 시궁창이었던 현실에 좌절한 제갈량 - (1)
게시물ID : humorbest_3772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丞相
추천 : 23
조회수 : 5164회
댓글수 : 7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8/07 16:52:14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8/07 14:08:09
삼국지연의를 읽어본 사람치고 그 이름도 찬란한 제갈량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겁니다. 연의나 정사에서의 전반부에서 제갈량의 책사로서의 신묘한 꾀와 그 재주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룬다고 하면, 그 후반부에서는 일국의 재상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후반부, 즉 재상 제갈량으로서의 부분을 써볼까 합니다. 223년, 촉(蜀)의 황제 유비(劉備)는 오(吳)와의 싸움, 즉 이릉전투에서 패한 후 병을 얻어 실의 속에 세상을 뜹니다. 그리고 그전에 당시 제국의 명실명백한 2인자이자 일생의 조력자이며 동반자와도 같았던 승상 제갈량을 불러다가 유언을 남기지요.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을 잘 보좌해줄 것을 부탁함과 동시에 아직 그 체제가 완전하지 못했던 촉나라를 맡겼던 것인데, 당시 유선의 나이가 어렸던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제국 자체를 위임했다 봐도 무방했습니다. 유비로서는 제갈량의 재능과 충성심을 잘 알고 있었기에 행한 일이었을 겁니다. 제갈량은 유비의 마지막 부탁에 눈물을 흘리며 그러겠노라 다짐합니다. 그리고 유언에 따라 유비의 뒤를 이어 유선을 황제로 세웠죠. 이 당시 촉의 상황을 정리해보자면, 국내로는 유선의 2대체제가 채 굳혀지지도도 못했었고 유비의 죽음으로 인하여 여러모로 어수선했었습니다. 한편 국외로는 윗 지도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촉은 본래 영토였던 형주(荊州)란 지역을 상실한 상황이었고, 유비의 출정으로 인하여 오(吳)와는 전후 인지라 관계도 좋지 못했습니다. 위(魏)와 적대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그래왔고요. 특히 형주의 상실은 타격이 매우 컸습니다. 본래 제갈량은 자신의 천하삼분책의 근원을 촉 땅의 본거지인 익주(益州) 외에도 바로 그 형주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야 상대적으로 국력의 균형을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익주와 형주, 이 두곳에서 북진을 노릴 수도 있었던 것인데,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그 금싸라기 같은 땅을 오나라에게 내주었으니 천하삼분지계가 수포로 돌아갔던 것을 물론이거니와 국가적 차원에서는 꽤나 큰 손실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이릉에서의 대패로 익주에서의 병력과 물자도 거의 소진된 상황이었고요. 본래의 국가 주요방침이 어긋난 그 상황에서 제갈량은 차기대안으로 새로운 청사진을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택한 길은 바로 오나라와의 화친이었습니다. 본래 제갈량이 구상했던 천하삼분책에 속하는 일이었으나 유비의 출정으로 인하여 실행되지 못하고 있었을 뿐, 필수불가결로 이제 그 일을 행하려 했던 것입니다. 오나라와의 화친 목적은 간단했습니다. 국토도 익주 하나로 좁아진 상황에서 홀로 자신들의 주적 위(魏)를 상대로 하기엔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리하여 촉과 오가 다시 손을 잡을 잡으니 그때가 224년입니다. 양국이 충돌했던 이릉에서의 전투이후 3년만이었습니다. 옆구리를 찔릴 걱정도 없앨 겸, 동맹국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한 제갈량에게 이제 당면한 과제이자 국책은 그들의 주적, 위나라와의 전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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