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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미노루? 니가 그러니까 좀비소리 듣는거다.
게시물ID : sisa_2390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지겹다진짜
추천 : 3/3
조회수 : 486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2/10/24 22:32:06

 

 

군속계만 봐도 1945년까지 高木正雄 그대로 쓰고있다

 

 

 

 

1940년 교사의원면직 발령원부. 박정희 라고 써놓은걸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940년~1945년 사이에 쓴게 아니냐는 헛소리가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이렇다.

 

 

 

박정희의 제2창씨명으로 알려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의 실제 이름은 오카모토 히로시(岡本寬)이다. 實자와 寬자가 워낙 비슷해, 옮겨쓰면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의하면 1935년에는 實로 표기가 되어 있고 1936~1943년까지는 寬로 표기가 되어있다. 히로시가 미노루로 둔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오카모토는 1930년 조선공립고보에서 시작하여 1932년 광주학생사건 당시 광주제일고보의 교유(敎諭)로 있었는데, 물의를 일으킨 조선학생들을 일망타진한 수훈갑의 공로가 있어 1등급 특진하고,1935년, 그러니까 박정희가 3학년이었을 때 대구사범학교로 영전하게 되었다.

당시 대구사범학교는 현준혁의「교유 및 생도의 비밀결사사건」이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아 교육당국은 학생들의 불온사상을 특별히 감독하고 단속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여 오카모토를 대구사범학교로 발령시킨 것이다. 과연 오카모토는 당국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카모토가 부임한 이후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퇴학과 정학을 밥먹듯이 당했던 것이다. 게다가 워낙 학생들을 개패듯이 팼기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오카모토는 이렇게 조선인 학생들을 짓밟고 일어선 덕에 그 뒤로도 승승장구하여, 1940년에는 6등 授瑞寶章이라는 서훈을 받고 함경남도 道視學官을 거쳐 1944년에는 청주사범학교장을 지냈다. 평교사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직위까지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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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본적인 정보도 모르고,

 

어디가서 누가 "박정희는 오카모토 미노루다" 하니까,

 

 

근거도 없는 글 퍼와서 날조하는 수준 하고는....ㅉㅉ

 

 

 

쪽바리들이랑 하등 다를 바 없는, 수준낮은 날조 하지마라.

 

추천박은 한놈도 좆잡고 반성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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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안달려서 여기에 달겠음.

 

ㅅㅂ 원래 오유 하는놈이 아니라서 이거 댓글 시스템을 모르겠네.

 

 

뭔지모르겠지만 이렇게 걸림.

 

 

 

 

 

오카모토 미노루가 박정희가 아니라는 근거는 위에서 제시한 자료인 군속계를 보길 바람.

 

1945년까지 高木正雄 를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는데, 이전, 이후에 모두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은

 

"기록으로도, 증언으로도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 오해가 어디에서 발생했을지에 대한 추측이 여기 등장한 하단부 설명글이다.

 

솔직히 이 오해의 이유를 내쪽에서 설명해야하는 것 조차 웃긴데, 그만큼 확고한 사항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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