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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높았으나 시궁창이었던 현실에 좌절한 제갈량 - (8)
게시물ID : humorbest_3790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丞相
추천 : 19
조회수 : 4282회
댓글수 : 2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8/14 00:04:36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8/13 11:45:54
일찍이 위연(魏延), 진식(陳式)을 보내어 무도(武都), 음평(陰平)을 평정케 하고 더불어 양계(陽谿)에서 위(魏)군도 쳐부수어 차후에 있을 대규모 북벌을 위한 사전포석을 마련해둔 제갈량은 231년, 기산(祁山)을 바라보고 출정합니다. 윗지도에는 4,5차 북벌로 표기되어있으나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했던 것을 모두 북벌로 간주하니 혼동 없으시기 바랍니다. 즉 윗 지도의 4차 북벌은 요번에 다루고 있는 5차 북벌이 되겠으며 표시된 빨간색 실선이 되겠습니다. 이 기산은 앞서 1차 북벌 때도 목표로 했던 적이 있었는데, 제갈량으로선 가정(街亭)에서의 패배로 인한 쓰라린 기억이 배어 있던 곳이었을 겁니다. 아무튼 1차 북벌의 경로를 그대로 답습했던 것인데 그럼 왜 제갈량이 재차 기산으로 나아갔는가에 대한 이유는 앞선 1차 북벌에서의 경우와 같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산이 교통의 요지라는 것과 예전에 꿈꾸었던 옹주(壅州), 양주(凉州) 겸병도 다시 감안해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5차 북벌은 그 시기가 다르고 전술과 상황이 달라졌던 만큼 그에 따라 다른 계산도 곁들여져 있었습니다. 당연하다 하겠지만 우선, 예전 1차 북벌에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는 점도 없잖아 있었을 겁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때 마속(馬謖)이 가정(街亭)에서 일만 그르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의도했던대로 일은 이루어졌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겠죠. 즉, 가정에서의 일처럼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야 충분히 내가 뜻한 대로 될 것이다라는 계산에서 이루어진 기산행이었을 겁니다. 둘째로는 앞서 무도, 음평을 공략하여 기타 이민족들과의 연합을 꾀했던 일에 대한 효과를 보기 위함. 위에서도 그렇고 저번 이야기에서도 언급했던 것이지만 일찍이 제갈량은 무도, 음평을 평정하여 강(羌)족 및 여러 이민족들과의 연계를 꾀하며 그들의 도움을 기대했다고 했는데요, 그 사전작업이 끝났으니 이제 본론에 들어가 대규모 북벌을 벌임에 있어 마땅히 그들의 도움을 바라고 요청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번 기산전투에서 선비(鮮卑)족의 수장, 가비능(軻比能)이 제갈량의 요청에 호응하기도 했고요. 이러한 이유로 제갈량은 기산으로 나아가기에 앞서 천수(天水)를 공략하고 더욱이 나아가 기산을 포위하는데에 성공, 상규(上邽)까지 진격했습니다만 여기서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군량문제였습니다. 당시 촉(蜀)군은 제갈량이 발명해낸 목유유마(木牛流馬)란 효율적인 운반기계로 군량을 운송하며 보급하고 있었지만 군량난은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생각해낸 타개책이 바로 진출해있던 상규 일대의 갓 익은 보리를 거두어 들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위(魏)에서도 어느정도 제갈량의 생각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당시 위나라 조정에서도 제갈량의 군량 문제에 대해 갑론을박하며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만 결국 명제(明帝) 조예(曹叡)가 사마의(司馬懿)에게 상규의 보리를 보호하고 제갈량을 공격하란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일단락 되니 결국엔 제갈량의 움직임을 예측한 셈이 되었죠. 한편 제갈량은 뜻한대로 과감하게 행동하여 당시 상규를 진수하던 위장(魏將) 곽회(郭淮), 비요(費曜)를 몰아내고 상규 일대의 보리를 수확하는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사마의가 한걸음 늦게 도착하고요.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여겨 저지하고자 했던 사마의를 필두로 위장(魏將) 장합(張郃), 대릉(戴陵), 비요(費曜)가 노성(鹵城)이란 곳까지 추격해오자 제갈량은 촉장(蜀將) 위연(魏延), 왕평(王平), 고상(高翔), 오반(吳班) 등을 내보내 이를 맞이하여 정면대결을 벌이고 이때 촉군은 대승을 거두니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사마의는 뒤로 물러나 진채를 세움으로서 전황은 대치의 형국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 대치의 형국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그 형국을 먼저 깨뜨린 쪽은 촉군으로, 제갈량의 회군명령 때문이었는데요, 그 이유인즉 또다시 불거진 군량문제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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