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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아버지의 사랑.
게시물ID : lovestory_380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코스모스향기
추천 : 9
조회수 : 151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11/15 19:31:03
베오베에 로또 당첨된 분의 글을 읽다가
댓글에 관련글이라는 링크를 보았는데
작성자 분이 간 이식수술을 소망한다는 글을 읽고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나서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래도 힘드시다면 마지막에 몇줄 요약하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다리가 좋지 않으신 아버지가
2001년, 다리 수술을 받으시는 바람에
20여년간 다니시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1년 정도 집에서 생활을 하셨고,
1년 뒤에 어머니와 큰 식당을 인수받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벌었던 덕분인지
2년만에 식당을 차렸을 때
졌던 빚을 모두 청산하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당을 연지 3년정도 됐을 때부턴
어찌된 영문인지 손님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수술 후유증 때문에 더욱이 힘들어하던 아버지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셨고, 몇 개월도 되지 않아
소위 '알콜중독'이 되셨습니다.

알콜중독이 되신 아버지는
밤낮 가리지 않고 가족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당시 어린 나이였던 저는 감히 대들지는 못하고
항상 마음 속으로 증오심과 분노가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고등 2학년을 다닐 때까지 술을 마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중환자실로 이송되었습니다.
등교를 하고 2시간 후 울려오는 핸드폰 진동소리에
쉬는 시간에 나가서 전화를 해보니
어머니셨습니다. 아버지가 피를 토해 병원에 계시다는 연락.

당시 증오심이 가득했던 저라 중환자실까진 아무렇지 않았는데
피까지 토했다는 말을 듣고 사단이 나겠구나. 싶어
조퇴증을 발급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간의 기능이 손상되어 혈액이 순환하지 못하여
목에 있던 동맥이 터져 피를 토했다는 의사의 절망적 멘트.
마음의 준비를 하랍니다.

어머니는 걱정말라며 절 집으로 보내셨고,
집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핸드폰에 찍힌
아버지의 환한 웃음 앞에 서러운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의 연락이 왔습니다.
전날 저녁이 고비였는데 기적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버지가 기적처럼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

그 이후로 아버지는 술을 일체 끊으셨고,
우리 가족은 닫았던 가게문을 다시 여시고,
행복하게 오순도순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흐른 제작년.
중환자실을 다녀온 후부터 정기검진을 받던 아버지에게
들리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

'간 기능 소멸로 인한 간암'

몇 개월이 흐른 후에야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혈색이 어두워지고 눈은 황달로 노래지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힘든 말도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채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를 1년동안 받으시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몸에 좋다는 음식도 먹어보고,
좋아하시던 담배도 끊으시면서
우리 가족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정말 아픈 사람같지 않아보였습니다.
술을 마시던 때와는 달리 웃음도 많고
자식들에게 항상 좋은 말씀, 조언 아끼지 않으셨고,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항암치료를 1년동안 받고 2010년이 되었고,
의사는 항암치료만으로는 더이상의 희망이 없기에
최선책이라며 '간 이식 수술'을 권장하셨습니다.

엄청난 수술비에 대한 걱정보단
누구에게 기증을 받을지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마음 여리신 큰아버지는 칠순이 다 되어 가시면서도
자기가 하겠다는 걸 친척들과 우리 가족이 말릴만큼
불안함과 공포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부모와 자식간의 장기 이식은
성공률도 높고 부작용도 적다는 이야기를 들어
혈액형이 같은 제가 수술을 하기를 권유했습니다.

처음엔 거부하시던 아버지도 나중엔 고맙다며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 120kg에 육박하는 고도비만자였고,
예상대로 '비만성 지방간' 때문에 어렵다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뺐습니다.
4개월동안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하기 싫은 운동 억지로 해가면서
30kg 뺐습니다. 

재검사를 받으니 지방이 많이 줄어들어
수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

지난해 6월. 마지막 검사를 마친 후에야
승인이 났고, 장기이식센터(KONOS)에서도
승인이 떨어져 6월 23일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식사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입원하는 동안 삼시 세끼 아버지와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큰 사랑을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고,
수술에 대한 공포심보단 성공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이 더 컸습니다.

그렇게 닭, 개, 소를 키우며 시골집에 내려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행복한 미소를 띈 채, 차갑고 무서운 수술대 위에 올랐습니다.

아버지가 저보다 1시간 일찍 수술실에 들어가시고,
전 그 이후에 들어가 마취에 취해 잠에 들었습니다.


14시간 후, 소란스러운 소리에 깨어보니
이미 수술은 마친 상태고 마취에서 깨라며
어머니와 간호사가 절 깨우더군요.

아버지의 수술 여부를 물으니
아직 수술 중이랍니다.
불안함이 있었지만 수술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마취에서 깬 후, 다시 단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다음날, 목구멍에서 걸리적 거리던 살덩이가
기도를 막아 호흡곤란을 일으킨 저는 병실에서
다시 중환자실로 옮겼습니다. (기도삽관 시 목젖이 부었음)

1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는 무균실에
저는 그 밖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몇시간 뒤 타는 듯한 갈증에 호스를 빼내고 물을 마시니
어머니가 면회를 오셔서 하시는 말씀.

" 수술할 때, 장기가 너무 부어서 배를 닫지 못했대..
재수술 들어가야 할 것 같다네.. "
놀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믿었으니까요.
잘 견디실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를 했나봅니다.
2010년 6월 25일 금요일 오전 1시 20분.
부산스러운 소리에 깨어보니
의사며 간호사며 부랴부랴 뛰어다니고
무균실에선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어머니, 동생, 고모의 울음소리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세 식구만 남겨두신 채,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다시 생각하니 눈물이 나네요..ㅎ

수술을 함께 했던 저이기에
아버지의 임종도 장례식도 발인도 지켜보지 못하고
그저 딱딱한 침대에 누워 울분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우릴 떠나가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미울수가 없었습니다.

1년이 훌쩍 지난 오늘..
아버지가 미울만큼 그립고 보고싶습니다.
아버지의 큰 사랑에 부응도 하지 못해드린 것이
죄스럽고 한심스럽네요.

오유 여러분.
세상 일 힘들고 지칠 때마다
어떤 행복을 찾으시나요?

로또 당첨? 예쁜 이성친구? 높은 월급?
전 아닙니다. 물론 살아감에 있어
필요할지 모르는 항목일지는 모르나,
'가족'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나쁜 짓을 하면 고쳐줄 수 있는 사람.
내가 기쁜 일을 하면 함께 웃어줄 수 있는 사람.
내가 슬픈 일을 겪을 때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동생 혹은 형, 누나일 것입니다.
부디 부모님께 효도하시고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
많이 해주세요. 그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몇줄 요약.
1. 아버지가 다리 수술로 실직상태에 가게를 여심.
2. 가게가 잘되서 빚을 갚았지만 이후에 안되서 술을 드시기 시작함.
3. 알콜중독이 되심.
4. 밤낮 가족을 괴롭힘.
5. 중환자실 입원, 마음의 준비하라고 함.
6. 기적처럼 생존, 하지만 간암 발병
7. 간이식 수술이 최선책.
8. 본인이 수술 해드렸지만 돌아가심.


결론
- 우리 가족에게 행복함을 느끼고 사랑한다는 말 자주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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