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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높았으나 시궁창이었던 현실에 좌절한 제갈량 - (12)
게시물ID : humorbest_3804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丞相
추천 : 12
조회수 : 2995회
댓글수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8/19 15:30:32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8/18 12:32:41
라고 하고싶었지만 현실은 시궁창 5차 북벌에서 실패한 제갈량은 슬슬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을 겁니다. 수년간 수차례에 걸쳐 여러가지로 방법을 모색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위(魏)는 끄떡도 없었고 그때까지 이렇다하게 이루어 놓은 것은 없었으니 조바심도 났겠지만 뭣보다 제갈량 본인의 건강상의 문제도 슬슬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죠.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 시기쯤엔 제갈량은 중병을 앓고 있었고 당시 그의 나이도 오십줄을 넘긴 상태로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몸은 따라주지 않고 그태껏 이루어 놓은 것은 없고, 조급해진 제갈량은 나름의 타개책을 마련해 보았으니, 그것이 곧 그의 마지막 북벌이자 횟수로는 6차 북벌이 되겠습니다. 이 6차 북벌은 234년에 이루어져, 5차 북벌 이후, 3년만이었습니다. 빨간점선이 6차 북벌 경로, 지도에서는 5차 북벌로 되어있으나 예전에 언급했듯이 편의상 제갈량의 공격은 모두 북벌로 간주하므로 여기서는 6차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파란색 점선은 사마의의 요격경로 이번 6차 북벌의 경로는 윗 지도에서 보시듯, 야곡도를 타고 위수(渭水 : 윗지도 참고)란 강의 남쪽으로 진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수 남쪽은 장안(長安)과 비교적 가깝다는 것을 역시 지도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실텐데요, 이 경로를 택했다는 것이 바로 제갈량이 마련해두었다던 타개책입니다. 앞선 북벌들에서는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옹주(雍州)-양주(凉州)를 겸병하여 서북지방을 완전히 제압하고 천천히 장안을 목표로 진군하는 것이 본래 그 목적이자 일찍이 제갈량이 구상했던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앞대의 북벌들과는 달리, 이번 6차 북벌에선 그동안 목표로 삼아오던 서북지방은 내버려두고 서북의 거성이자 북벌의 상징적 목표이기도 했던 장안을 바로 공략하고자 빠른 길을 택하여 위수 남부 행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빼든 것입니다. 그동안 보여줬던 우직한 정공법과는 달리, 기책이라고까지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기존의 북벌들과는 좀 다른 시도였음은 분명합니다. 즉, 한번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 장안을 점거하겠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이번 6차 북벌은 제갈량이 자신의 수명을 예감이라도 했는 듯, 그야말로 사활을 건 전쟁이었습니다. 5차 북벌 이후 3년간 휴식을 취하며 병사를 양성하고, 물자를 축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동원한 병력 규모도 10만에 이르러 그태껏 행해진 북벌 규모 중 최고였던데다 이와 맞물려 오(吳)의 손권(孫權)에게 함께 위(魏)를 공격해달라고 청하여 동시에 위나라를 압박하고자 했던 시도도 그렇거니와, 필살의 각오와 의지가 담긴 북벌이었습니다. 아무튼 제갈량은 본 목적대로 미현(眉縣)의 위수(渭水) 남쪽까지 진군, 주둔하며 무공(武功 : 윗 지도 참고)이란 곳에서 동진하며 장안일대의 성들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장안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무공이란 곳을 택한 이유는 그 무공이란 곳이 산악지대로 지형이 비교적 험준하여 산을 끼고 싸우면 더할 나위없이 촉(蜀)군에게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위나라 입장에서는 촉군의 무공산 행에 대하여 좋든 싫든 장안을 방어하기 위해 요격나가 공세적 입장을 취해야만 했으니 당시 수비로만 일관하려던 위나라의 전략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게다가 전투를 벌일때에 있어서 방금 말씀드렸듯 험준한 지형을 끼고 싸우는 촉군에게 유리한 위치만 더해주는 격이었으니 마땅히 지양해야 할 일이었기에 그 적이 되는 제갈량은 당연히 무공행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사마의가 분석하는데 이건 나중에 써보겠습니다. 어쨌든 이에 대응하여 위(魏)에서는 명제(明帝) 조예(曹叡)가 진랑(秦朗)이란 장수를 파견해 제갈량에 맞서고 있던 도독 사마의(司馬懿)의 지휘를 받게 했는데, 굳이 중앙에서 장수를 따로 뽑아 보낼정도로 당시 제갈량의 공격을 두려워했고 또한 위나라에서도 이번 전쟁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편, 총사였던 사마의(司馬懿)는 제갈량이 위수 남쪽에 진을 쳤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그 북쪽에 진을 펼치자는 제장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을 따르기라도 하듯 역시 위수 남쪽에 진을 내렸는데 그 이유인즉 이러했습니다. "위수 남쪽에 백성들이 모두 거주하니 반드시 다투어야 할 땅이다." 그리하여 사마의의 뜻에 따라 위(魏)군은 위수 남쪽으로 이동했고 배수진을 치고 대치하게 되는데 또 이를 접해들은 제갈량은 당황하여 여기서 전략을 수정합니다. 상황의 반전을 꾀하여 선택한 행동이었는데, 오장원(五丈原)이란 곳으로 서진하여 위수(渭水) 북쪽으로 건너가고자 했던 것이 그 선택으로, 이유는 참으로 예상치 못하게도 위군이 덩달아 위수 남부에까지 내려와 주둔을 하고 있던데다 그 총사가 되는 사마의가 수비만으로 일관하고 있었으니 애시당초 목적이었던 무공으로의 동진이 막혀 사실상 힘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마의(司馬懿)와 제갈량(諸葛亮) 그리고 여기서 사마의는 이렇게 말하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사마의의 분석으로, 무공에 관련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제갈량이 만약 용기있는 자라면 마땅히 무공(武功)을 나와 산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五丈原)으로 향한다면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 아주 단정짓기엔 뭐하지만 제갈량이 무공이 아닌 오장원으로 향한다면 자신들이 무사할 것이라 여겼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갈량의 무공 행은 아무래도 위군에게 불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그 제갈량이 무엇을 택하든 간에 그 선택이 불러올 장단점에 대해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라는 얘기고 그가 말한대로 만약 제갈량이 오장원 행을 택할 경우엔 자신들이 무사할 것이라 자신했던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이미 당시 위군은 오장원에서의 대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오장원을 택한 제갈량은 결과적으로 사마의의 전술에 말려들게 된 셈이었죠. 하지만 제갈량으로선 그저 무리한 전투로 사마의의 본대를 격파하는 것을 마땅찮다 여기며 오장원으로 나아가 그 일대인 북원(北原)이란 곳을 공략하여 활로를 마련해보고자 했던 것인데, 앞서 말씀드렸듯 이미 사전에 예상하여 철저한 대비를 해놓았던 위나라였기에 그 시도마저 위장(魏將) 곽회(郭淮)의 수성에 의하여 격퇴당하고 맙니다. 이렇게 북원진출이 수포로 돌아가며 좌절을 맛본 제갈량은 하릴없이 오장원에서 주둔하며 사마의와의 위군과 기나긴 대치를 하게 되니 제갈량으로선 결국 사마의가 의도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기에 일이 꼬였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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