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멈추는 줄만 알았다. 급한 발걸음으로 플랫폼에 내려가는 뒷모습을 본 순간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던 지루함은 무참히 깨어졌다. 노란물이 잔뜩 빠진 바가지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손길도, 청바지에 백팩을 짊어진 차림새도, 느릿하지만 보폭이 큰 걸음새도 통상 하던 너의 것들이었다. 핸드백을 움켜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떨리는 심장은 당장 달려나가 너의 얼굴을 확인할 것인지, 얌전히 기차를 기다릴 것인지 강하게 번민했다. 타지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탓에 주말에만 내려오곤 하던 니가 탈 기차는 뻔하다. 이성적 판단이 잘 되지 않는 눈으로 급히 전광판을 바라보니 용산행 기차가 지금 막 도착했다는 빨간 글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순간 멍해졌다. 나를 잊어버린 너는. 언제나와 같던 일상을 오가고 있었나보다. 이렇게 지척에 니가 있음에도 손 한 번 뻗어보지 못하는 사실에 너와 내가, 이젠 우리라고 칭할수 없듯이 확실히 유리되었음을 깨닫고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진다. 헤어져라는 말은 끝까지 참았어야 했는지,? 짓밟아도 누를 수 없는 회의가 다시금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미련한 미련인 줄 알면서도 급히 몸을 일으켰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로 북적이는 사이에서, 하이힐을 신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도 내가 쫓는 것은 하나였다. 이미 기차에 타버렸으면 어쩌지? 망설이지 말고 바로 뛰어오는거였나,? 화급한 내 모습을 이상히 여기고 지나가는 시선들이, 그들의 얼굴을 훑는 짧은 순간이 영화속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삐 움직이는 군중 가운데 서있던 내 뒤로, 니가, 지나간다. 쿵쾅거리는 가슴께를 강하게 움켜쥐고 급히 몸을 돌리는 내 뒤로 니가, 아니, 너인줄만 알았던 그 남자애가 무심한 얼굴로 지나간다. 그렇게 계속 서있었다. 그래, 바로 여기였는데. 너를 만나기 전 설레임으로 가득한 발걸음을 딛던 플랫폼이었는데. 같은 장소임에도 이제 이 곳에서 난 행복을 느낄 수가 없다. 이렇게 의미가 뒤바뀔 수 있나... 그 아이러니함에 희미한 미소를 짓던 것도 잠시. 허탈한 표정을 한 채로 그 남자애가 탄 기차가 떠날 때까지 녹슬어버린 동상마냥 서있었다. 기차 뒤꽁무니가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리가, 몸이, 정신이 온통 흐느적거린다. 목적지를 잃어버린듯한 허망함에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문득 내가 탈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기차 안은 가지각색의 사람들로 붐볐다. 일요일의 늦은 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너와 처음 만났던 순간? 너를 지워내기로 결심했던 순간?
여느 사람들처럼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채 하염없이 상상해보았다.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쇼핑을 하기도 하는 너의 모습들..
아무도 없는 집안엔 불빛 한 점 없다. 티비화면에서 나오는 불빛을 조명삼아, 니가 좋아하던 노래를 안주삼아 다시금 술잔을 들었다. 성공적으로 너를 잊어가고 있다고 생각한건 아마도 내 착각이었나보다.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냥 그런 이별처럼 약간의 씁쓸함만 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듯 잊은 줄 알았던 절절함에 목메는 날 보면 생각보다 난 너를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다. 기차역에서 본게 너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무언가를 할 생각도 없었지만 어차피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을거다. 너에게 말을 거는것도, 너와의 관계를 되돌리는것도. 이미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너일진데 대체 내가 무엇을, 어떻게.. 다만 나는, 니 얼굴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다시는 볼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너였기에 .. 그리움, 회한, 미련, 슬픔, 씁쓸함, 잠 못 이루게 하는 애타는 서글픔에 쌓일지라도 마지막으로 니 얼굴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마음만 먹는다면 못 볼것 없는 곳에 니가 있는데도 결국은 마음에 묻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고 다시 한 번 가슴이 아려온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건 지워야지 지워야지 하면서도 여태 지우지 못한 너의 사진을 보는 것 뿐.. 너와 나의 것도 많은 사람들이 겪는 수많은 이별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오늘은 슬픈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눈물을 움켜쥐고 잠이 드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