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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南朝)에 대하여 - (12)
게시물ID : humorbest_3812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丞相
추천 : 10
조회수 : 1277회
댓글수 : 2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8/22 11:21:26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8/16 15:26:52
저번 편에서 말했지만, 폐황제(廢皇帝) 소소업(蕭昭業)은 애시당초 일국의 군주가 되기엔 부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행각들은 남조(南朝)에서의 역대 혼군들이 보여주었던 짓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사치를 좋아하여 국고를 탕진하는가하면, 무뢰배들의 궁성출입을 허가하여 궁중에서의 법도를 크게 어지럽히는 등, 심지어는 아버지 소장무(蕭長懋)의 애첩도 가로채서는 자신의 후궁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뭐 남조(南朝)의 하고많은 혼군들 중 하나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혼정에 이기다 못하여 소소업의 5촌 당숙이 되는 서창후(西昌侯) 소란(蕭鸞)이 거병하여 궁성을 공격,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애첩과 근친상간을 하고 있던 소소업을 베어 죽입니다. 그때 소소업의 나이는 불과 22세였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이는 쿠데타의 주인공, 소란(蕭鸞)이었고 그가 곧 제(齊)의 4대 황제, 명제(明帝)입니다. 혼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제 명제 소란이 즉위함으로서 상황이 좀 나아질 것이라 여겼던 조정이었으나, 사실 이 소란의 치세부터가 피바람이 불어닥치는 시기였으니, 바로 이 소란이 황족 대거숙청을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먼저 후환의 근심을 끊는다는 명분으로 폐제 소소업의 아우, 소소문(蕭昭文)을 죽이는가 하면 고제(高帝), 무제(武帝)의 자식들도 모두 숙청하여 도합 서른 명 가량의 황족들을 도륙내버립니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황족을 숙청한다는 것은 대개 황권강화를 꾀하여 생기는 부작용입니다. 이 소란도 그런 경우였고요. 전제군주를 표방하며 단순 중앙에서의 숙청뿐만 아니라 각자 지방에 할거해있던 종실의 왕(王)들에게까지 손을 써두었는데, 바로 주사(主師)란 관리를 파견한 것이 그 수단이었습니다. 주사(主師)란 황제가 직접 임명한 관리로서 그냥 황제의 심복이라 보시면 되겠는데요, 각 주(州)로 파견되어 그 주(州)나 봉국을 다스리는 주자사(州刺史)나 왕(王)들을 감찰하는 것이 이 주사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황권강화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겠고요. 황족들이나 주자사들이 보기엔 이 주사들이 꽤나 거슬리고 아니꼬운 존재였음은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그리고 의당 그 비난의 화살은 그 주사들을 파견한 장본인이 되는 황제에게 쏟아졌을 것이고, 결국엔 "주(州)의 대소사는 주사(主師)에게 보고받고, 주자사(州刺史)에게서는 듣지 않는다." 란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던 것이죠. 즉, 이미 소란은 뭇 황족들과 지방의 귀족, 호족들에게서 민심을 잃고 있었다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국내로 지지를 잃어가며 정권의 위기를 맞던 명제 소란에게 이젠 국외에서도 위기가 닥쳐오게 됩니다. 5세기 말의 중국대륙 판도 494년, 화북의 북위(北魏)가 대대적 침공을 가해왔던 것이 그 시작으로, 과거 제(齊)나라와의 전쟁에서 제(齊) 무제(武帝)에게 크게 패배한 경력이 있던 북위였던지라 그에 대한 일종의 복수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북위의 황제였던 효문제(孝文帝)는 대군을 일으켜 침공해왔던 것이죠. 기록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태화(太和 : 효문제 치세연호) 18년, 제(齊) 명제(明帝) 건무(建武 : 명제 소란의 치세연호) 1년, 대군을 일으켜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설진도(薛眞度), 대장군(大將軍) 유창(劉昶), 서주자사(徐州刺史) 원연(元衍), 평남장군(平南將軍) 유조(劉藻)를 4방면으로 나누어 양양(襄陽), 의양(義陽), 종리(終離), 남정(南鄭)으로 쳐들어가 백제(百濟)와 제(齊)를 공격하였다." 백제는 보시다시피 우리네 백제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백제를 공격했다라는 것은 대륙백제설은 고사하고 당시 미약하게나마 대륙에 진출해있던 백제의 영토를 빼앗으려 들었다는 것으로 해석하시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전쟁의 주축은 제나라와 북위였고 또한 대결구도 역시 제 vs 북위였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여튼, 이 전쟁 초반기에 제나라는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한차례 전투에서는 영주자사(寧州刺史) 동만(董巒)과 수하병력 3천여 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고 북위는 이 기세를 타고 효문제가 직접 출정할 정도였다 하니 알만 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나라는 국난을 극복하게 되었으니, 추후로도 네번이나 침공해온 북위의 공세를 모두 격퇴했던 것이죠. 물론 일심동체가 되어 선방해낸 제나라의 방어도 뛰어났다라고 하겠지만 북위의 패전이유에는 북위의 국내사정도 꽤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시 북위의 효문제는 본래 그들이 선비(鮮卑)족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화(漢化)정책을 시행하여 보수파인 선비족 토착세력과의 갈등을 빚으며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재정이 파탄나고 국론도 분열되어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상황이 맞물려 제대로 전쟁을 수행치 못하고 패했던 것입니다. 제나라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이었을 것이고요. 하지만 이렇게 북위의 침공도 막아낸 명제 소색도 재위기간 불과 4년만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이가 명제 소란의 둘째아들, 소보권(蕭寶卷)으로 후세에서는 그를 동혼후(東昏侯)라 부릅니다. 보시다시피 이 사람도 시호가 없는데요, 그 말은 곧 그도 혼군이었음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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