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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와 서인정권이 대세를 읽지 못해 망한 걸로들 알고 계시지만
게시물ID : history_38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10
조회수 : 100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2/03/20 14:50:40
일반적인 인식 : 신흥강국 만주족 위엄에 명나라 군사들은 개발리고 뻥뻥 뚫려 명나라는 끝물.
병자호란 일어날때쯤엔 이미 대세가 청인데 조선씹선비들이 대세를 못 읽고 의리타령하다가 나라 말아먹음.

이러한 논지는 현대로 확장되어 미중 양강 시대에 중립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적용으로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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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문제는
1) <청나라 대세, 명나라 끝물>부분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것,
2) 쿠데타 인조정권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시대착오적인 의리타령만 하다가 말아먹은 것도 아니라는 것.

오늘은 일단 1) 만주족 대세, 명나라는 나날이 발리고 있었다는 부분에 한정해서 살펴봅시다.
과연 명나라는 계속해서 발리고만 있었는가? 를 진지하게 살펴본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청나라의 기세는 대단하여 광녕들을 손에 넣었지만 
명나라의 병주 직방 주사 원숭환이 1626년 누르하치를 격파하고(사실상 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탓에 죽게 됨) 
다음 해엔 청태종 홍타이지도 격파해내는데
원숭환이 죽은 후에도 요동 방어선은 단단하게 유지되어서 넘기가 힘들었죠.


병자호란이 1636년인데... 조선을 굴복시켜서 어느 정도 후방의 위협이 제거된 청나라는 아주 대담한 공격을 가합니다.
1639년에 홍타이지가 중신들을 이끌고 대규모 우회기동 공격을 가하는데, 산해관 영원성 쪽을 공격하는게 아니라 몽골 - 타타르가 침입하는 오르도스 쪽  루트로 들어왔지요. 명나라도 수비군이야 있었지만 선택&집중의 원칙에 따라 주력은 영원성과 산해관에 있는 상황.

庚申,大清兵入濟南,德王由樞被執,布政使張秉文等死之.戊辰,劉宇亮、孫傳庭會師十八萬於晉州,不敢進.丁丑,改洪承疇總督薊、遼,孫傳庭總督保定、山東、河北.二月乙未,劉宇亮罷.大清兵北歸.三月丙寅,出青山口.凡深入二千里.
숭정 12년정월 경신일, 청군이 제남부에 돌입하여 덕왕 주유추를 사로잡았고, 산동포정사 장병문 등이 죽었다. 무진일에 유우량, 손전정 등이 18만 군대를 이끌고 진주에 집결하였으나 감히 나아가질 못했다. 정축일에 홍승주를 계주, 요주의 총독으로 삼고, 손전정을 보정, 산동, 하북의 총독으로 삼았으며, 2월 을미일에 유우량을 파직했다. 청군은 북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3월 병인일에 청산구를 통해 귀환하였는데, 대저 2천여리를 침입한 것이었다. -명나라 측 기록은 청군이 2천리를 침입했다가 대치 후 돌아갔다고 씀.

丙寅,多爾袞、杜度等疏報自北京至山西界,復至山東,攻濟南府破之,蹂躪數千里,明兵望風披靡,克府一州三縣五十七,總督宣大盧象昇戰死,擒德王朱由賸, 郡王朱慈漻, 奉國將軍朱慈黨、總督太監馮允昇等,俘獲人口五十餘萬,他物稱是.是役也,揚武大將軍貝勒岳託、輔國公瑪瞻卒於軍.上聞震悼,輟飲食三日.
숭덕 4년(1639년) 3월 병인일, 도르곤(多爾袞), 투도(杜度) 등이 상소를 올려 보고하기를, 북경에서 산서지계로 갔다가, 다시 또 산동에 이르러 제남부를 공격하였으니, 수천리를 유린하였으나 명군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고, 부(府) 1개, 주(州) 3개, 현(縣) 57개를 깨트렸다고 하였다. -청나라 측 기록은 신나게 때려부쉈다고 씀.

(명측에서는) 선부, 대동 총독인 노상승이 전사했고, 덕왕주유승, 군왕 주자류, 봉국장군 주자당, 총독태감 풍윤승 등과 함께 사로잡은 인구가 50여만이 되었는데, 기타 물건도 이처럼 많이 노획하였다.  이번 싸움에서 (청측에서는) 양무대장군 겸 바일러인 웨투어(岳託)와 보국공 마첨이 전사했다. 청 태종이 이를 듣고 매우 애도하며 3일간 식사를 들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짭짤하게 약탈을 해서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도 하는데 문제는 이렇게 하면 보급선이 너무 길어집니다. 북경 공략은 어림없는 소리고 약탈이나 할 수 있지요(실제적인 목적도 이러한 약탈로 부족한 사람을 채우는데 있었고 - 그러면서 명나라의 방어선을 지키는 명군에 동요를 주는것). 아무튼 알 수 있는게 청나라 쪽에서도 산해관을 비롯한 요동 방어선을 돌파하는걸 버거워 했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저렇게 후방에 일이 있었지만, 기존 명나라의 방어선은 꿈쩍도 않고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어느정도 결판이 났다고 할 수 있는건 1641년 쯤이나 되서,  이른바 '송금대전' 이라고도 불리는 대규모 전투 이후로 금주, 송산, 행산의 세 성이 함락되고 (배신일화로 유명한)홍승주가 사로잡혔으며 명나라 주력군이 궤멸되었죠.

금주가 함락되는 순간 명나라의 요동 방어선은 사실상 무너지고 산해관 바깥에 남은건 영원성에 오삼계 부대 밖에 없어서, 홍타이지 스스로 "북경을 공격하는 일은 큰 나무를 베는 일과 같고, 양쪽에서 도끼로 찍으면 나무는 부서진다. 이제 명나라의 주력군은 모두 궤멸되었으니 우리가 다시 사방에서 공격하면 북경을 얻을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의 형국이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이제 4,5만 밖에 안 남은(오삼계는 스스로는 50만이라고 했지만) 오삼계의 병사만으로도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1643년 9월 청태종 홍타이지 사망....

이때 명나라는 청나라 외에도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F4라고 까지 불리우는 황제(물론 그중에서도 만력제)들로 인한 재정난이 첫번째.
더 심각한 것은 당시 16세기에서 17세기 무렵의 전세계적인 소빙기의 기상이변으로 인한 
1628년의 대기근을 비롯한 기상이변에 시달렸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기근이 수백만의 난민들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난민들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유입이 됐죠.

명나라 입장에서는 산해관 방어선을 유지하면서도 이자성의 반란군을 상대해야 하는데...
일단 보자면 청나라가 명나라의 멸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긴 했지만 산해관을 통과하기 전에도 명나라는 이자성에게 멸망(1644년)당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오삼계가 열어준 문을 통과해서 오삼계와 함께 북경에 밀어닥치는 청군들..
이 때의 청나라 황제는 도르곤의 보필을 받는 순치제.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재정 악화 + 기상 이변에
이자성, 장헌충의 수십만 반란군을 뒤로 두면서도 청나라를 상대했다는것을 생각해야합니다.
결국 명나라가 무너진 것은 같은 한족인 이자성의 손에 의해서지, 청군은 산해관을 자력으로 뚫은 적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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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은 등거리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는 명제 자체는 틀린 바 없습니다.
문제는 누가 대세인지, 언제가 중립외교를 펼치기 적당한 시기인지 사람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죠.

미중 양강 시대입니다. 미vs중 사이에서 등거리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시대의 급류에 몸을 맡겨야 할 때가 언젠가 올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이전에 중국이 패권국가로 떠오르기 적합한가요?
우리들은 중국이 패권국가로 떠오르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요?
오히려 대륙, 짱깨 운운하는 사람들이 서구적인 잣대로 중국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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