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ID : humorbest_381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여름 추천 : 44 조회수 : 1845회 댓글수 : 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4/04/28 15:39:10 원본글 작성시간 : 2004/04/28 06:41:48
정형근은 왜 체포되어야 하는가. 그가 23건의 고소ㆍ고발 사건의 피고소(고발)자이며 그동안 20여 차례나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여 강제 구인에 이르게 된 것이라는 사실 관계를 떠나서 ─ 사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법을 무시하는 그의 태도는 마땅히 지탄의 대상이다 ─ 정형근은 과거의 고문 전력에 대해 수사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까지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이 갖는 면책 특권을 이용해 검찰의 수사를 피해왔으나, 많은 증언자들이 그의 비인간적인 고문 전력을 폭로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백 마디 설명보다 정형근에게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의 증언이 더 중요할테니, 우선 몇 가지만 인용해 보기로 하자. 정형근의 고문 전력에 대해 추상적으로만 알고 계셨던 분들께서는 특히 이 부분을 주의깊게 읽어주었으면 한다.
자료 1 : 국정원의 '정형근 파일' 중 일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 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 관련 박종철(언어학과 3년)을 연행해 조사시 물고문 등으로 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치안본부로부터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 소집 등 지원을 요청받고, 당시 대공수사국 수사단장 정형근은 ▲ 1월14일 심야에 당시 광화문에 있는 서린호텔에서 개최한 관계기관대책회의에 검찰·경찰·청와대 관계자 등 10여명과 함께 참석하여 ▲ 사건 처리방향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의 발표문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 그 후 수차례 시내 앰버서더 호텔(1817호)에서 검찰·경찰·청와대 등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소집하여 ▲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정부가 견디기 힘들다, 5공 정권 출범 이래 최대 위기인만큼 사건이 절대 깨져서는 안 되며, 이대로 묻혀야 한다”며 사건 처리방안을 제시하고 ▲ 담당검사 안상수에게 고문경찰관의 구형량을 낮추도록 요구하는 등 고문치사사건 은폐 및 축소조작에 개입하였고 ▲ 당시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조한경 경위를 직접 찾아가 “두 사람만 관련된 것으로 하고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입을 다물어 달라”면서 금품을 제공해 회유하고 검찰ㆍ교도소측에 각종 편의를 제공토록 하였음.
위에서 인용한 ‘정형근 파일’의 일부는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일 뿐이지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또 이것이 그의 ‘전력’의 전부도 아니다. (중략) 특히 고문·가혹행위의 경우 당시 정형근 수사국장(단장)의 지휘 아래 가담했던 관련 당사자들이 상당수 현직에 있기 때문에 이는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적인 누락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형근 파일’에 담긴 정보는 부분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실 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히 구체성을 띠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동아』 2000년 1월호 중)
자료 2 : "파이프 담배 문 정형근이 나를 고문했다"
심진구씨(39·경기도 안산시 부곡동)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둔 가장이다. 그러나 심씨는 지난 13년 동안 노동력을 상실해 아내한테 의존해 힘겹게 살아오고 있다. 86년 안기부에 끌려가 37일 동안 당한 살인적인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상처 때문이다. (중략)
"정형근 단장이 들어오고 나면 더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한번은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심진구, 이제 불 때가 되었는데. 여기 들어와 15일이면 다 불어. 여기가 어딘지 알지? 여긴 국회의원도 맞아 나가는 데야. 그래야 고생하는 우리 수사관들도 특진하지. 그러고는 부하들에게 '간첩이라고 불 때까지 더 족쳐!'라고 고문을 독려했다. 그 중에서 성고문이 제일 치욕적이었다. 손을 뒤로 한 채 목을 젖히고, 심문대 책상 위에 내 성기를 올려 놓고 몽둥이로 쳤다. 10분씩 두 차례에 걸쳐…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한 대만 맞아도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그들은 좋아하며 히히덕 거리며 즐겼다."
안기부에서 심씨는 86년 12월10일부터 87년 1월15일까지 37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수사관들로부터 돌아가면서 계속 맞아 피오줌을 흘렸고, 잘 때는 팬티가 붙어 야전침대에 누울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는 때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간첩으로 모는 것은 너무 두려웠다고 한다. 정형근이 2~3일에 한번씩 들러 뒷짐진 채로 파이프 담배를 물고 나타나 "심진구! 이제 간첩이라고 불 때가 되었는데”라며 그뒤에 있을 고문을 '예고'하곤 했다. 그가 들렀다 간 다음에는 더 강도 높은 고문이 어김없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다 정형근이가 들어와서 지시해서 때리거나 고문했으니 그가 이근안보다 더 나쁜 놈이다. 쫄다구는 시키니깐 하는 일이고. 나는 정형근이 보는 앞에서도 당했다. 정형근 자신도 잔혹해서 더 이상 못보고 자리를 떴을 정도다." (하략)
자료 3 : 월간중앙 1999년 12월호 서경원 前 의원 증언
질문 : 정형근 의원은 일관되게 고문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정말 고문을 당했다면 정황을 좀 상세히 얘기해 주십시오.
서 : (중략) 그렇게 맞으면서 피가 막 쏟아지니까 밥그릇을 하나 갖다주면서 피를 받으라고 합디다. 정형근이 직접 욕실에서 물뜨는 밥그릇을 가져왔어요. 밥그릇이 넘치니까 청동색 재떨이도 가져왔는데 사기로 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욕실에 들어가 분홍색인가 붉은색의 바가지도 들고나오더라구요. 그릇만 세가지가 동원된 거죠. (중략)
질문 : 정형근 의원의 말을 종합해 보면 최소한 자신은 직접 고문을 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안기부 수사국장이 간첩 수사를 직접 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서 : 옷을 다 벗겨서 완전히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더구만. 팬티하고 '런닝구'만 남겨놓고 군복 바지를 입혔어. (중략) 두들겨패다가 내가 맨발 벗고 있었는데 발등에 올라서서 저 혼자 빙글빙글 돌면서 나(정형근)를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중략) 돈 준 것은 안나왔다니까 김일성과 김대중 친서를 네가 갖다주고 갖고 왔다는 것을 대라는 거요. 그래서 그런 일 없다고 했더니 그걸 불라고 밤새 두들겨 맞은거요. 집중적으로 맞고 나니까 나중에 정신이 없습디다. 그래서 보십시오. 여기가 부은 겁니다. 예전에 맞은 곳이지요. (중략) 개인이 억울하다 차원이라기 보다 이렇게 당한 사람이 한 20여명 됩니다. 정형근이한테 당한 사람이 그렇다는 말이오. 그런 사람들의 증언을 두고 정형근은 간첩들이 흔히 쓰는 보위수단이라든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잠을 안재우니까 해볼 재주가 없습니다. 내 정신이 아니야. (중략) 나중에 검사가 1주일인가 열흘인가 교도소에 안 들어갔더라고 얘기해 줍디다. 그동안 못잤다는... (중략)
질문 : 정의원은 또 현역의원을 어떻게 고문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들어갈 때 그 대접을 받았습니까.
서 : 대접이요? 첫마디가 '야, 씹할 자식아. 같이 살자'였습니다. 정형근이 말대로 국회의원을 대접했다면 그럴 수 있소? (하략)
소위 "깃발사건"으로 김근태의원이 85년도에 고문을 당한 내용입니다. 아래글은 85년 12월19일 법정에서 김근태의원의 증언입니다.
"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어지러운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4일 각 5시간씩 두차례 물고문을 당했고,9월5일,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날 집단적인 촉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잔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것도 대략 절반쯤됩니다. 고문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못합니다.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의 주범,옥사했음)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너가 복수를 해라"
이러한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다녀? 민주화 운동 하는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자면 깔아뭉개고 용납할수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 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 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방청석 통곡)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뤘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 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사람은 -이름을 밝히진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 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하는것을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나가라. 허위로라도 다 인정해라. 여기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얘기했습니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