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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근현대사 선택 안한 분들을 위한, 문과생이 쓰는 현대사
게시물ID : history_61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드므
추천 : 17
조회수 : 76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1/01 19:44:04

근대사는
http://todayhumor.com/?history_6166
http://todayhumor.com/?history_6167
http://todayhumor.com/?history_6169
로 여기있구요


에다가 마지막글인 현대사를 썼습니다.
현대사는 이 글 하나 구성임.

 

수정할것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틀린거 계속 적어놓으면 안되니까요...

 

 

 

32.

으어 자정이다.

이승만 정부 시작합니다

 

29.번에서 말했듯이 1948년 8.15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에 대통령에 이승만 / 부통령에 이시영이 앉았죠. 4년 중임제였습니다.

아 물론 간선제로 된 겁니다. 7월에 제헌국회가 있었으니까요

 

근데 자유당인 이승만이 어떻게 자리에 앉았냐면, 반대편 당인 한민당(한국민주당 : 부자인 지주들이 많음)과 거래를 했거든요

정부 요직의 절반을 주노라고. 근데 당선된 이승만이 입싹씻음.

그래서 한민당 화나서 단체로 탈당해다 민주당을 만듭니다. (야당에 해당하죠)

근데 정부수립에 반대하신 김구 선생님께선 북한쪽과 회담을 여시긴 하는데 실패로 끝나고

정부수립에 참여도 안하시다가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하십니다

 

 

일단 정부가 마악 수립되었고 혼란스러우니 정리를 해야죠.

먼저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을 합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특위(반민족 행위 특별 위원회)를 구성해서 이를 시행합니다. 그래서 다 잡아내는데

이승만이 세력이 친일파가 많았어요. 그래서 소극적으로 나옴. 하다못해 반민특위를 이승만 지시로 습격하는 사건도 있게 됨.

그리고 다 잡아낸 사람들에게 공소시효를 단축해서 처벌을 단 한명도 하지 않음.

프랑스는 독일에 들러붙었던 사람 처벌했고 중국마저 친일파를 싸그리 숙청하는데

전세계에서 반민족행위를 처벌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란 나라입니다. 아오

 

토지개혁도 합니다.

북한은 소군정 초기에 안정적이라서 토지개혁 이미 했어요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우리는 유상매입 유상분배를 합니다. 정부가 돈주고 사서 유로로 되파는건데

막 수립된 정부가 무슨 돈이 있어요. 그래서 지가증권을 발급하는걸로 했는데

6.25터져서 종잇장됨.

그래도 토지개혁은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했다는 큰 의의가 있습니다.

 

 

 

33.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6.25 이자 한국전쟁으로도 불리는 그 전쟁이요.

원래 국가간에는 선전포고 하고 공격하는게 맞는데 북한은 그런거 없이 새벽에 밀고들어옴.

그래서 외국들이 많이 도와주게 되고 북한을 비난하는 이유가 됩니다.

 

북한이 왜 쳐들어왔냐면, 일제강점기 말에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군수공업공장이 북한에 쏠려 물자가 많았고,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제일 큰 계기는 애치슨 선언임.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제외한겁니다. 침략해도 미국이 관여하지 않겠다니까 기회다 싶어서 북한이 밀고 내려온거예요.

 

침략당하고 어떻게 됐냐면 3일만에 수도 함락됨. 6월 말에 시작됐죠? 7월중으로 낙동강까지 밀려요. 걍 경상도 빼고 다 빼앗겼다고 생각하면 됨.

그래서 정부는 부산으로 이전합니다. 9월이 되자 (구 국제연맹)유엔서 참전을 결의합니다. 그래서 9.15에 인천 상륙작전 강행하죠.

그렇게 9.28에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 전선까지 쭉 진격합니다.

근데 위로 치고오는 기세가 만만찮아서 중국에서 초조해합니다. 중국까지 넘보는게 아닐까? 싶어서.

그래도 전쟁은 침략없이 한반도에서 끝내야겠다 싶은 중국은

지원자(전쟁지원자만 30만명... 역시 대륙...)를 뽑아 북한에 지원을 보냅니다. 이 지원자들이 중공군이죠.

갑자기 밀리게 된 남한쪽 세력은 51년 1.4에 흥남에서 기네스에 쓰일정도로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흥남철수를 했구요.

그렇게 밀려 휴전선까지 밀리게 됩니다. 공방전을 주고받다가 7월에 미국과 북한이 휴전회담을 논의합니다.

 

휴전선을 어디로 그을것인가에 대해서 미국은 현상황으로 하자 그랬는데 북한이 휴전이 될 때까지 싸우자 해서

휴전 될 때까지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북한쪽 제의가 수락되서 피해가 더 늘어났음...

포로는 어쩔것인가에 대해서 미국은 포로의 의사를 묻고 풀어주는 자유송환을 주장했고

북한은 전쟁 이전으로 되돌려야 맞다며 자동송환을 주장했습니다(제네바협정).

근데 이승만은 이 휴전회담이 꼴보기 싫었거든요. 4.3제주사건이나 10.19여수순천사건 때문에 공산세력에 호되게 당한 이승만은

미군이 들어와서 거의 우리가 다 먹을뻔 했는데 중공군 때문에 잠깐 밀린거라고 우리가 이길수 있다고 생각해서 계속 싸우기를 바라며

이 회담을 결렬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포로를 걍 다 풀어줘버립니다. 네 풀어줬어요.

 

미국이 깜짝 놀랬죠. 솔직히 미국은 이때 욕 엄청 먹었거든요? 미국의 장정들이 외국싸움에 나가 죽어가고 있다고.

선거공략으로 한국전쟁 끝내버리겠다는 공략도 있었음. 근데 포로를 석방해버리니까 또 엄청 질질끌것같아서 이승만을 달래줍니다.

이때 받은게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약속하고 경제 무상원조를 약속해줘요.

한미 상호 방위조약은 미국이 침략을 받으면 한국에서 군대를 자동파병한다. 그리고 한국이 침략을 받으면 미국에서 군대를 자동파병한다. 이거예요.

이건 여태까지 유효함.

그렇게 이승만을 달래고 북한과 휴전논의가 통과되서 53년 7월, 휴전 합니다.

 

 

34.

전쟁중에 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했다고 했죠? 그리고 4년 중임제였죠. 48년에 정부가 수립되었으니 52년.

또 선거를 해야 하는 때가 다가오는데 이때 헌법을 바꾼 일이 있었습니다.

정치깡패를 동원한 발췌개헌이라고도 불리는 1차개헌이예요.

 

민주당 인원이 많으니까 다음대 선거는 간선제로 안되거든요. 이거 민주당이 통과시킬리 없죠? 그래서 정치깡패 동원한거예요.

예전 국회 공성전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그래서 직선제로 바꾸되 내각의원적 요소(양원제)를 좀더 붙여 야당을 달랜 개헌이예요.

그렇게 전쟁중에 직선제를 해봤자...겠죠? 이승만이 또 당선됩니다.

 

근데 중임제도 한번더 당선되었으니 다음번에는 못하잖아요?

그래서 이승만이 재임기간 도중인 54년. 또 헌법을 바꿉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딱봐도 치사한 내용이예요.

그때 의원수가 203명이었고 개헌이 통과되려면 2/3의 지지가 필요하니 135.3333... 이라는 수가 나온단 말이예요?

사람은 자를수가 없으니 136표가 필요한게 당연지사인데 이게 또 웃긴게, 딱 135표가 나왔어요. 부결됐죠.

 

그리고 다음날 라디오에 수학자가 나왔습니다. 135.333... 이니 0.5 이하이니 버려야한다는 반올림을 주장하는거예요.

그래서 부결은 가결로 바뀌고 사사오입 개헌이라고도 불리는 2차개헌 통과되었습니다.

 

다음 선거철인 56년이 와요. 중임제한을 철폐한거지 영구적 대통령 권한을 갖겠다는건 아니었으니 이승만도 선거에 나와야죠.

자유당에 대통령에 이승만 / 부통령에 이기붕이 나오고 민주당에 신익희/장면이, 무소속엔 조봉암이 나와요.

근데 신익희가 병사해서 이승만 대 뉴페이스 조봉암이 된거예요.

당선은 이승만이 되긴 하는데 이승만은 압도적으로 8,90%로 이길줄 알았는데 조봉암이 30%나 얻었네요?

이승만이 깜짝놀래요. 게다가 부통령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된거예요. 이승만이 이걸로 하나를 깨달아요. 내가 다음대에 할수 있는것인가?

사람들을 달래서 대통령을 다음대에도 해먹을 건지 공포정치를 해서 다음대에도 해먹을건지

이때 선택을 하는데 공포정치를 택하죠.

그리고 조봉암은 30%의 영광으로 진보당을 창설하는데 북과 내통한다고 빨갱이 죽일놈으로 몰아서 처형되버려요.

이승만은 국가보안법도 멋대로 손대구요.

 

1960년이 왔어요 선거를 해야죠. 자유당에 이승만/이기붕이 나오고 민주당엔 조병옥/장면이 나와요.

근데 아 조병옥이 사망한거예요. 암살 아니예요 이분도 병사함.

그래서 대통령엔 이승만이 자동 당선되는데

 

이때 이승만의 나이가 엄청 많았어요. 현재의 평균수명보다도 많았음.

그래서 부통령 자리가 중요했는데 이거 때문에 3.15부정선거가 터져요. 아시죠?

몇 명이 같이 들어가고 선거하는곳 앞에서 특정후보 홍보하고 몇 명이 선거하는곳 들어가서 감시하고

투표함을 빼돌리고 사전에 이미 투표된 종이를 주고...

그래서 마산에서 시위가 터지는데 이때 김주열 학생 수류탄에 맞고 죽은게 바다에서 떠오른거예요.

이를 씨앗으로 사람들은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4.18에 고려대에서 필두로 나서 시위를 합니다.

 

이에 4.19혁명. 다른 학생들까지도 시위를 시작하구요. 이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 다스리려 합니다.

근데 미국은 이승만이 자기국민을 치려하는걸 알자 이에대한 지원을 포기합니다.

거기다 4.25에 서울대 교수님들이 시국선언문까지 발표하신거예요.

그래서 4.26 이승만이 12년만에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합니다.

 

 

34.

대통령은 없고 선거는 개판났고. 그래서 잠깐 허정이 과도정부를 만들어 3차개헌으로 내각책임제(양원제)를 채택하고 총선을 실시했어요.

민주당이 압승하죠. 그렇게 대통령에 윤보선이 앉습니다. 60년 6월. 근데 윤보선보다 부통령 장면의 권력이 더 강했던듯.

제2공화국이라고도 하고 장면내각이라도고 하죠.

장면내각때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거론되기만 했습니다. 민간측에서 통일 논의가 나오고 학원 민주화니...

장면정부는 솔직히 혼란스러운 시대였죠.

또 5개년 계획은 장면정부에서 나온건데

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며 장면은 내쫓기고 5개년 계획은 장면때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35.

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가 올랐죠.

박정희는 구 정치인을 숙청해서 자리를 확고히 하고 농어촌 쪽으로는 부채를 탕감해주어 민심을 모았죠.

경공업 위주의 산업개발진흥책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5차개헌으로 양원제를 직선제로 바꾸는데 성공합니다.

63년. 박정희는 전역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됩니다. 이를 제3공화국이라 부릅니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6.25)가 끝난지 10년도 안된 상황이었어요(휴전이53년7월). 진짜 못먹고 살았죠.

박정희는 나라를 일으키려고 돈 나올 방법을 찾다 일본에게 눈길을 돌렸습니다.

아 이건 좀 서러운데 우리가 광복된게 45년 8월 15일 이예요. (29.번 보시면 됩니다) 근데

경술국치 당하기 전부터 일본이 우리를 좌지우지해 반백년을 수모를 겪었는데 20여년만에 국교를 정상화하겠다고 하시더이다.

우리 국민들은 반대했어요. 그대표가 한일회담반대투쟁6.3항쟁이죠. 근데 강경탄압되고

 

65년. 한국의 김종필과 일본의 오히라가 만나 한일국교를 정상화합니다. 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죠.

우리나라는 돈이 목표였어요. 일본은 국제적인 위상이 필요했구요. 이를 알선한 미국은 동북아의 안정이 필요했습니다.

다 각자 필요한게 있으니 한 회담이었어요.

우리는 이 회담으로 일본에게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3억불.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이관하겠다는 조건으로 유상으로 2억불 빌렸습니다.

(나라 하나 그렇게 억압해놓고 독립하니 축하한다는건 일진이 빵셔틀 존나패서 입원시키고 얘 퇴원하니까 돈준거랑 크게 다를건 없어보임.

내지는 강간범이 강간하고 피해자가 정신치료 끝나니까 돈주고 합의본거? 정도?) 이 때문에 질질끌어온 독도문제에 더 큰 빌미를 줬죠.

근데 이관해도 우리가 이기는게 맞음. 55년 모든걸 무효화하겠다고 했으니까요.

근데 국제사법재판소에 일본인이 많은게 함정. 여튼 우리정부는 5억불이나 되는 돈이 생겼습니다.

 

게다가 베트남전쟁 아시죠?미국 대 베트남인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이 백인대 유색인종 싸움으로 언론이 흘러가는겁니다.

미국이 이거 진짜싫어하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유색인종이니까요.

요청하며 미국이 우리군의 현대화와 경제원조를 약속(브라운 각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파병함.

이게 베트남 특수를 누렸다고 하는겁니다. 한일회담에 베트남특수까지 누린 한국은 돈이 많아졌습니다.

(근데 고엽제문제랑 라이따이한 문제가 이 베트남파병때 터지게됨.)

 

경제가 살아난다고 67년 박정희는 재선에 압승으로 성공합니다.

4년 중임제라고 했죠? 다음번엔 못하겠네요? 근데 69년애 박정희는 3번까지 참여할수 있게 6차개헌(3선개헌)을 해버립니다.

70년에 5개년 계획은 끝이 난지 오래고, 농촌 근대화 운동인 새마을 운동을 하죠.

 

71년. 다시 대선의 해가 왔습니다. 공화당에서 박정희가 나오고 신민당에서 김대중이 나왔습니다.

박정희는 여태 이겨온터라 또 압승인줄 알았는데 71년 대선의 박정희 표는 630만표. 김대중 표는 540만표. 표차가 90만표밖에 안나죠?

박정희는 육해공군 60만표랑 공무원 30만표를 깔고 시작합니다. 사실상은 비긴거죠.

자신의 위치가 간당간당하게 되었습니다. 박정희는 이승만처럼 공포정치를 실시합니다.

72년. 유신헌법이라고도 불리는 7차개헌을 하게되죠.

 

명분은 경제안정과 안보강화였으나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해산까지 한 초월적인 권한을 누렸습니다.

이 유신체제에서, 유신정우회를 만들어 국회의원1/3을 지명해 앉힐수 있게 하였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직선제이었던 것을 간선제로 바꿔버립니다.

긴급조치권이라고 국민의 기본권까지 제한하는 권한까지 쥐죠.

당연히 사람들은 반대투쟁을 했습니다. 박정희가 싹다 탄압하죠.

이렇게 김대중은 납치되어 고문당해 다리를 절게되고 장준사는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동아일보는 백지사태가 나고... 이 시기를 겨울공화국이라고 합니다. 제4공화국이죠.

 

 

이때, 79년 2차 석유파동이 납니다.

73년에 71년때부터 중공업 위주로 경제개발 5개년을 해서 1차석유파동때는 도로깔고 뭐해주고 해서 벗어났는데

2차는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로인해 YH여공사건 터집니다.

여자공순이들이 월급 안줘도 되니 일하게 해달라 했는데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탄압을 하더이다.

그래서 여공들이 신민당(박정희의 공화당과 반대편 당)의 당사로 피신했는데 여기까지 들어와서 여공들을 밟고 때리고 끌고나갔습니다.

게다가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로 들어와서 그런지 김영삼이 가택연금되어버립니다.

김영삼의 고향사람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그게 부산마산항쟁, 부마항쟁입니다.

 

이를 본 박정희의 오른팔왼팔인 김재규차지철 말합니다. 김재규는 사람들을 달래줘야한다고 했고 차지철은 더 눌러버려야한다고 했죠.

근데 이 의견을 말한 둘이 서로 신경전이 일어납니다. 차지철이 각하를 무시하냐면서 김재규의 신경을 긁어놓았죠.

김재규는 안되겠다 싶어서 궁정동 안가(박정희가 술마신다고 만든곳인데 이사건 터지고 궁정동 안가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밝혀짐)에서

대학생과 가수를 불러다 술마시던 박정희를 쏘아버리고 차지철도 쏩니다. 김재규는 사형선고를 받고 죽습니다.

이 박정희가 사망한게 10.26사태입니다.

 

박정희가 죽고 계엄이 선포되었고 -이때 간선제로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오르긴 하는데- 이를

12월 12일.전두환 신 군부가 12.12사태를 일으켜 박정희를 잇게 됩니다.

 

 

 

36.

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키고 국민의 기본권까지 침범한 박정희의 시대가 끝난겁니다.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오죽하면 80년을 서울의 봄이라고 칭할까요.

이때 전두환이 바톤터치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엄해제와 전두환 퇴진요구를 합니다.

 

근데 아 이 29만원 대머리아저씨가 5.17 비상계엄을 확대해버려요.

이에 반대해 5.18 광주에서 민주화 요구운동이 일어났습니다. 5.18민주화운동입니다.

사람들 광주에 몰아가두고 군대가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눴습니다. 진짜 학살급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이후 5.31 국가보안위원회가 출범하게 됩니다.

 

81년. 선거인단을 이용해 8차개헌을 합니다. 간선제 7년 단임을 하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이렇게 81년. 전두환은 간선제로 대통형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때를 제 5공화국이라고 부릅니다.

 

전두환은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지 않게 정치적 관심을 끄도록 국민 유화정책을 펼치죠.

이게 국풍 81입니다. 3S정책으로 유흥가가 증가하고 프로야구단이 나오고 영화산업이 확확 밀어집니다.

학원 자율화(두발자유,교복자유,과외교습금지)가 됩니다. 삼청교육대가 만들어진것도 이때고

88년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선정된것도 이때예요.

 

다음 대통령 선출 시기인 87년이 왔습니다. 사람들은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했습니다.

근데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로 헌법개정의 모든 논의를 정지시켰습니다. 사람들은 부당하다며 더 들고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이때 올해 초(87년 1월)에 죽은 박종철이 탁치니 억 죽었다는 정부발표와는 달리 전기고문 물고문으로 죽은것이 밝혀져

사람들은 6월 민주항쟁 일으켰고

전두환은 6.29선언으로 9차 개헌 하여 5년 단임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였습니다.

 

 

 

37.

88년. 직선제를 합니다.

원래 전두환 후임으로 노태우가 나왔고 이에 맞서 김영삼이 출마했는데

540만표의 신화 김대중이 여기 끼어들어버립니다. 그래서 노태우 대 김영삼의 전략이 -> 노태우 대 김영삼 대 김대중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김영삼에게 갈 표가 김대중에게 까지 분산되어버려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하게 됩니다.

당선하고 나니 여당이 적고 야당이 많은겁니다. 그래서 3당을 합당민자당이 나오게 되었죠.

 

노태우때는 남북 고위급 회담이 있었고, 남북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고, 남북기본합의서(각자체제인정)가 통과되었는데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까지 할 정도로 북한과의 외교관계가 평화로웠습니다.

 

박정희때 유엔 동시가입이 제의되긴 했었는데(73년)

이를 빌미로 북한이 주도하는 통일이 된다, 남한이 주도하는 통일이 된다며 체제강화(독재)에 이용했죠.

 

전두환때 84년에 남한에 대홍수가 터져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재개됩니다.

그렇게 남북이 대화를 하게 되고 85년에 이산가족이 최초 상봉하게 되었구요.

 

 

38.

1993년, 5년단임이므로 노태우가 빠져 김영삼 대통령 됩니다.

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육사출신들이 하다 그 끝이 난거죠 (김영삼은 서울대 철학과)

그래서 김영삼 정부를 제 6공화국이자 문민정부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정권이 교체되진 않았습니다. 3당 통합을 했었으니까요.

 

김영삼때 금융실명제가 되고 OECD에 가입하고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했습니다.

이때 노무현이 활약한 전두환 노태우 청문회 열렸고 이 둘은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을 받으나

이후에 특사가 되어 풀려납니다.

 

근데 악재가 겹칩니다. 이때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되고

거기다 97년에 IMF까지 터졌음. 많은 실직자들이 거리에 나앉았죠. 정리해고 문제도 이때였고...

 

 

39.

1998년. 대선때 김대중이 당선되었습니다.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였죠.

(김영삼때도 평화적이긴 했으나 정권교체는 아니었습니다. 3당 합당했었다니까요)

 

김대중은 햇볕정책을 펼치고 IMF외환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여기까지가 근현대사에서 배우는 내용입니다.

으어 현대사 작성만 세시.

 

 

 

 

노무현과 이명박이 추가되어야 할텐데

이제 근현대사는 사라지니까 간략하게 넣겠죠?

사람들은 또 그렇게 역사를 모르도록 배우게 되고...

그나마 역사를 배울수 있는 과목인 국사는 자꾸 책 내용이 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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