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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오이디푸스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게시물ID : animation_3829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vangelion
추천 : 10
조회수 : 78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6/04/03 22: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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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그냥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마도카가 신이 된다는 결말, 정말 뜬금없지 않냐는 친구의 한 질문에서부터.

다 좋은 전개인데, 왜 하필 신이 되었느냐, 함께 싸워나가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책임도 아닌 운명을 한 소녀가 바꿔나간다는 게 갑자기 뜬금없다는 표현이었다. 그럴듯 한 시선이었다. 현실적이고 음울한 전개가 이어지던 사야카의 죽음까지, 마마마는 호무라와 사야카의 소원과 운명을 크게 뒤흔드는 소녀들의 한계를 확인하는 이야기였으니까. 신이 되어 해결한다는 편리한 전개라고도 볼 수 있겠구나 싶었기도 했다. 마법소녀라는 소재로 비극적 드라마를 연출하던 작품에서 한 소녀가 신이 되어 운명을 뒤바꾼다는 결말은 어찌보면 쉬이 받아들이긴 힘든 전개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난 조금 더 이 문제를 살펴보고, 내려다보고 싶었다. 왜 그녀는 신이 되어야 했는지, 신이 되어 운명을 바꾼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보이는 이 엔딩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라는 작품에서의 전개와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 나는 가만히 이해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렸다. 버스를 타고 멍하니 너의 은의 정원을 듣다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스스로의 눈을 파낸 한 영웅을 떠올린다.

 

 

소포클레스의 테베 3부작은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그리고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집중하고자 하는 건 본편의 전개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이다. <안티고네>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반역과의 큰 이미지의 연관과 시사점이 있지만 그건 또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미학을 다룰 때 처음 배우는 <오이디푸스 왕> 하나에 일단 집중하고자 한다. 이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재밌는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비극의 원형이라고도 불리는 그리스 비극의 기본적인 작품이니까.

 

그리스 비극, 희랍 비극이라 부르는 작품들은 신화라는 소재에 비극 형식을 담아 표현하는 기본 틀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눈으로는 운명적인 전개, 신들에 의해 결정되는 인간의 운명, 비극적 결말,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불리는 신이라는 존재에 의한 해결 등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긴 하다. 당장에 비판적인 눈으로 본다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전개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런 시대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희랍의 비극은 상당한 미학의 기본적 틀을 잘 만들었으며 갖은 작품 분석과 정신 분석에 쓰이곤 한다. 그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비극을 읽는 건 상당한 가치가 있는 셈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내용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니 빠른 진행을 통해 생략하도록 하겠다.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으니 다들 독서 많이 합시다.

오이디푸스 왕의 내용을 간단히 줄이자면 총 3개의 구성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아버지 살해와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깨닫지 못하는 오이디푸스의 착오

2. 두려운 진실을 깨닫는 인식

3. 스스로의 눈을 파내고 왕의 자리에서 떠나는 결정

 

이러한 전개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과, 신탁이라는 운명의 필연성이 전개되는 과정,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위해 진실을 파헤치고 눈을 뽑아내는 과정까지 세련된 하나의 드라마로 전개되고 있다. 깨닫지 못한 운명, 금기, 진실, 더 큰 진실이라는 키워드는 오이디푸스가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진실의 혼동, 비극적 아이러니, 진실에 다다르는 스릴러와 같은 전개에서 나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를 떠올린다. 마법소녀와 마녀라는 비극적 운명, 두려운 진실을 깨닫는 인식, 그리고 그 인식 뒤에 이어지는 여러가지 결정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로 넘어가기 전에, 조금 더 오이디푸스를 살펴보자.

이따금 사람들은 묻는다.

 

오이디푸스가 영웅인가?

 

무릇 영웅이라 하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괴물들을 퇴치하여 국가를 구하거나, 사람들을 구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그리스 최대 영웅이라 불리는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의 면모만 보아도 그리스 시대에서 영웅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정립되어 있는지 쉬이 알 수 있다. 헤라클레스가 보여주는 강대한 힘과 정의의 실현, 아킬레우스가 보여주는 죽음 앞에서도 명예를 쫓는 강건함, 오디세우스가 보여주는 깊은 지혜와 끝없는 호기심.

 

다른 그리스 영웅들과 오이디푸스를 비교해보자.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고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왕에 올랐지만, 도덕적인 결함이 가득한 오이디푸스를 과연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하여 자식들을 둔 지대한 도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오이디푸스를 과연 영웅이라 칭할 수 있을까. 현대의 시선에서는 오이디푸스를 대게 변호하려는 시각이 강하다. 어찌되었건 착오이지 않은가. 여러가지 요인들에 의해 상황의 판단을 잘못 했을 뿐인 한 사람을 비난하는 게 옳냐는 시각.

 

이런 생각이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오이디푸스가 영웅이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물질적 영역과 그와 함께 존재하는 앎의 영역이 있다.

행동의 의미로 존재하는 앎의 영역과 행동 자체의 영역은 퍼즐이 들어맞듯이 딱 들어맞는 존재일까. 우리는 그 앎의 영역이라는 행동의 결과와 의미로 존재하는 영역의 뜻을 모두 알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 이다.

합리적인 사고로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내 스스로가 행동의 주체인데 그 행동의 의미와 앎의 영역을 모른다는 건 언뜻 말이 안되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하나될 수 없는 존재의 집합일 뿐이다. 오이디푸스가 그랬듯이,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던 노인 일행을 죽인 건 정당방위였다. 허나 그 너머의 영역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비되는 사람을 죽였을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선왕의 왕비와 결혼을 했다. 왕의 권리였다. 허나 그 너머의 영역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하게된 도덕적으로 그릇된 인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일치되지 않는 앎의 영역을 사람들은 착오라 부른다. 그건 인간이 가진 인식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영역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이 한계를 벗어날 순 없다. 이 착오를 그저 착오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을까. 가능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 오이디푸스마저도 알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의 운명이었을 뿐이지 않은가. 인간을 넘어선 신이 정한 것이며, 인간이 운명의 틀 안에서 묶여 살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외칠 것이다. 그건 우리의 책임이 아니오. 인간은 인간의 운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소. 운명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자발적 행위가 없기 때문에, 책임 또한 있을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책임이 있는가? 운명의 장난에 놀아난 슬픈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길고양이에게 어떤 책임을 부과할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후벼파며 말한다.

 

그것은 바로 아폴론, 아폴론이오, 친구들이여,

내가 겪은 이 몹쓸 일들을 이루신 이는.

하지만 지금 내 눈을 찌른 건, 바로 내 손이오, 다른 누구도

아닌 가련한 내가 한 것이오.

 

현대적인 표현과 간단한 관점으로 낮춰보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하나의 문화권에서, 하나의 환경에서 자라며, 스스로의 가치와 판단을 그 속에 종속시키게 된다. 우리는 그걸 사회와 문화의 한계라고 치부하지 않고 당당히 내 가치와 판단이 그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정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그마저도 모두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가혹한 운명이라는, 인식하지 못한 앎의 영역에서 발생한 책임을, 운명이라는 이름에 돌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부과하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영웅이다. 스스로가 테베를 위해 부과한 책임과 어찌할 수 없었던 신탁. 피할 순 없었던 운명의 결과만큼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눈을 파내고서 눈을 감아, 그제서야 더 큰 앎의 영역을 인지한 영웅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는 영웅이라 불리고, 영웅이다. 이게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행위의 힘이다. 진실을 인식하고자 당당히 대면하는 스스로의 결정은 파멸을 불러오지만, 그럼에도 스스로의 결정으로 길을 정하는 영웅. 앎의 완성과, 파멸과, 운명의 결정.

 

나는 이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발견한다.

 

1. 마법소녀와 마녀라는 시스템에 대한 착오 / 자신의 소원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착오

2. 큐베와 마법소녀, 마녀의 진실에 대한 인식 / 자신의 소원이 가져온 결과에 대한 인식

3. 소녀들의 결정

 

이렇듯 이중의 구성으로 마법소녀들의 책임과 운명을 뒤흔들게 된다.

크게 본다면, 모든 게 큐베라는 외계인 존재로부터 기만당했을 뿐인 소녀들, 마법소녀와 마녀에 대한 진실. 마법소녀들은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영역의 운명에 절망하고 포기하며 주저앉는다.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 앞에서 체념하며 주저 않는다. 마법소녀와 마녀라는 시스템이 가진 운명에 이끌려가는 소녀들은 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한다. 소녀 개개인의 소원 또한 그러하다.

미키 사야카는 카미조 쿄스케가 다시 음악을 하는 것을 원했기에 쿄스케의 팔을 낫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의 소원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야카는 보답과 사랑이라는 영역이 스스로와 일치하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원을 망친다. 쿄스케의 팔을 낫게 해주고 싶은 본인과 쿄스케의 음악을 다시 듣고 싶은 본인 스스로의 가치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탓이다.

아케미 호무라는 루프를 반복하여 마도카를 구한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소원을 빈다. 마도카를 구하는 자신이 되고 싶다는 소원은 다른 소녀들을 다 처리해서라도 마도카를 구하려고 한다는 목적만이 남은 것으로 변질된다. 또한 마도카가 소원의 주체이기 때문에 마도카를 구하려는 반복이 오히려 마도카를 운명에 얽매는 상황을 반복할 뿐이라는 가혹한 진실마저 기다리고 있다. 호무라는 이 앞에서 절망하고 재기할 마음을 잃는다.

 

하지만 카나메 마도카는 이 모든 가혹한 진실 앞에서, 세상을 똑바로 마주한다. 체념하지 않는다.

분명 카나메 마도카도 두렵고, 힘겹다. 카나메 마도카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큐베에게 속은 바보 같은 나를 구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마녀가 되는 운명 이전에 자신을 쏴달라는 부탁을 남긴다. 자신을 변호하거나 결과를 해석하려는 움직임은 없다. 가혹한 운명을 시작과 끝에서 막아달라고 부탁할 뿐이다. 운명이 스스로를 이곳까지 끌고 왔지만, 그 운명의 끝을 이루진 못하게 죽음을 바란다. 운명의 시작을 이루지 못하게 아케미 호무라에게 부탁한다.

 

그렇게 카나메 마도카는 결국 모든 진실과 앎의 영역을 깨닫고서, 궁극적으로 이를 해소하는 영역의 소원을 추구한다. 이건 큐베도 관측하지 못한 운명의 바깥이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게 세계의 지속에 도움이 된다는 정해진 시스템을 부수고서 새로운 질서를 창안하게 된다. 왕의 자리에서부터, 세상에서부터 스스로를 지웠던 오이디푸스처럼. 마법소녀와 마녀의 운명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질서와 올바름을 추구하게 된다. 이 깨달음은 오이디푸스와 같고, 그렇기에 카나메 마도카는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는 하나의 법칙이 되는 개연성을 가진다고 본다. 그렇기에 카나메 마도카는 신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착오와 인식이라는 인간의 한계, 그 운명을 거스르는 결정의 결과는, 세상을 뛰어넘는다.

 

이제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도 돼. 이제 아무도 절망하지 않아도 돼. 너는 내가 받아들여줄 테니까.

내 소원은 마녀를 지우는 것, 정말로 그게 이루어졌다면 나도 이제 절망할 필요는 없어!

 

그렇기에 나는 카나메 마도카가 신이 되는 결말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가까운 엔딩이 아니다. 기계장치의 신을 엔딩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한 소녀의 신화가 된다.

 

왜냐면 마법소녀는 꿈과 희망을 이루어 주니까.

 

 

 

 

 

 

덧) 큐베에게 책임이 없다는 소리는 절대 아닙니다. 큐베의 권유는 기본적으로 진실의 호도이며, 신탁으로 예정된 오이디푸스의 운명과는 분명히 다르니까요. 저는 오이디푸스가 영웅이라는 관점과 마도카가 신이 된다는 전개의 유사성에서부터 이 비극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포착하여 썼을 뿐. 왜 마도카가 신이 되는 전개가 이상하지 않은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입니다. 고전의 비극을 끌어온.

 

출처 소포클레스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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