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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상반돤 삶을 살았던 그의 형 독립운동가 박상희
게시물ID : sisa_3830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란두일
추천 : 3
조회수 : 1065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3/04/27 23:17:53
독립운동




박상희는 1906년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박성빈, 어머니는 백남의이다. 박상희가 8살 때인 1914년 가족과 함께 선산 구미면 상모리로 이사갔고, 그로부터 3년 뒤에 박정희가 태어난다.
1920년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박상희는 구미보통학교의 초기 학생이었다. 박정희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 3년간은 4년제로 운영하면서 학무관들이 구미면 내의 가정을 방문해 가며 아이들의 취학을 유도했다 하며, 박상희도 이 무렵 학교를 다니게 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의 수기 '나의 소년시절'에서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어머니께서는 상희 형을 학교에 보냈다'고 회상하였다.
1923년 4년제였던 구미보통학교 졸업을 했다가 학제 개편에 맞춰 5학년에 편입을 하고, 1925년 최종졸업을 한다. 그는 향학열을 가슴에 묻고 있다가 1929년 다시 대구사범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하여 낙방하였다. 1970년 무렵에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던 김종신이 박정희에게 '박상희씨가 대단한 수재였다던데요'라고 하자 박정희는 형은 대구사범 1회에 입학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다며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도 했다.
1920년대 말 박상희는 선산청년동맹의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을 겸직하고, 1928년 집행위원직으로 올라간다. 1927년 2월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해 결성한 신간회 창립 후에는 신간회 간부로 항일활동에 앞장섰다.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자, 1934년 항일민족지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하여 대구지국장을 맡는다. 이듬해 1935년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옮겨 활동했다.
1944년에는 황태성과 같이 건국동맹의 일원으로 가담해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한편 박정희의 만주행을 반대하였다 하며, 박정희가 본처 김호남과 이혼하는 것을 반대하여 박정희를 설득, 훈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한다.





광복 후




8·15광복 이후 박상희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때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인으로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일했고 신간회 간부로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경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를 창설하였고, 이어 인민위원회 지부의 내정부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선산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는다.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일성,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찬탁의 입장으로 돌아서버리자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1946년 10월 대구 항쟁 사건이 발생하자 박상희는 10월 3일 구미경찰서를 공격하였으나 분노한 군중들로부터 경찰관을 보호하여 인명살상을 막았다. 그러나 10월 6일 대구 항쟁 사건의 중재를 나섰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우익청년단체와 경찰이 발포한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시신은 대구에 살던 처남 한정봉의 집으로 옮겨져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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