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이승만 정권은 1948년 12월 아직 헌법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국가보안법부터 만들어 이듬해 5월까지 무려 9만명을 체포하고 2만명을 재판에 부쳤다. 거센 반발이 일어나자 1949년 6월, 일제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을 본떠 보도연맹을 만들었다.
총재는 내무부 장관이, 고문은 국방부 장관 등이 맡았고 공안부검사, 대공 경찰이 운영을 했다. 회원 수가 30만명에 달했지만 해방 전 좌익 계열이었던 사람들 말고도, 인원수 채우려고 비료 준다고 꼬드겨 가입시키는 등 사상과 관계없는 이들도 수없이 많았다. 변호사, 문인, 우익 대한청년단원, 이장 등등.
<사하촌>, <모래톱 이야기>를 쓴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큰 산. 요산 김정한 선생님도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잡혀 총살당하기 직전 지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나셨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총검술, 제식훈련을 받았고, 노역에도 동원되었고, 산악수색대 신분증을 발급받아 산을 헤매 다니며 좌익 아지트를 수색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권은 7월8일 계엄령을 선포한 후 미군방첩부대 CIC 주도하에 7, 8월 사이에 군인과 경찰이 예비검속을 하고,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전국적으로 수만명을 학살했다. 이와 동시에 형무소에 수감된 사상범들이나 부역 혐의자들도 재판 없이 총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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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이건 아니건, 형무소 죄수건, 어떤 이유로도 군경 멋대로 처형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었다. 이 지경이 되면 국가가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2009년 2월, 울산보도연맹사건 민사1심 법원은 이렇게 확인했다.
“본질적으로 국가는 그 성립요소인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부담한다고 할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박탈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관련 문건들을 대부분 파기해 버려서 정확한 전국적 피해 상황은 알 수가 없다.
나는 2008년 6월, 울산보도연맹 유족회들을 대리해서 민사 손해배상재판을 시작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수십개의 유족회가 만들어져 있지만 당시 울산 유족회는 제일 먼저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아주 단결이 잘된 모임이었다.
울산보도연맹의 경우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20~30명씩 매일 밤 불러내어 어디로 데리고 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유족들이 막연히 죽었을 거라 추측만 했을 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유족들은 문수산과 대덕산 일대를 수색하면서 집단 학살된 무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사건 후 처음으로 태화강변 백사장에 모인 100여명의 부인들은 “피학살자 명단을 밝혀라. 학살 장소와 주모자 명단을 밝히고 의법조치하라. 유족대책을 세우라”는 요구를 했다.
경찰은 그때는 물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죽은 사람들 명단은 3급 비밀이라며 이번 재판에서도 끝까지 내놓지 않았다. 그러고는 거꾸로 원고들 가족들이 그때 죽었는지, 월북했는지 어찌 아느냐고 흰소리를 해 댔다.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국가’는 변한 게 없다.
그때는 전쟁통이라 그랬다 치고, 2008년까지도 처형자 명단을 비밀이라며 안 내어놓는 건 도대체 국가 구성원 누구의 뜻인가. 대통령? 소송을 맡은 법무부 장관? 경찰? 변호사?
가족 억울함 호소하고 다닌다고 사형!
1960년 6월로 돌아가서, 결국은 6·25 당시 보도연맹원들을 실어 날랐던 운전수의 안내로 학살현장이 밝혀졌다. 유족들은 대운산 골짜기에서 구덩이 17개를, 반정고개에서 6개를 발견해서 825개의 두개골을 발굴했다. 그들을 묶어 끌고갔던 철사줄, 금이빨, 도장, 처녀의 머리채 등도….
누가 누구의 아버지요, 할아버지인고. 여기도 ‘백조일손’이었다. 아아, 슬플 손. 여기도 저기도 백조일손이로세.
나는 울산유족회에도 황해도 신천의 백조일손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도 함월산 백양사 앞에 그 수북한 유골들을 합장했다.
1961년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은 울산 보도연맹 피학살자 합동묘와 추모비도 해체해 버렸다. 그리고 특수범죄처벌법을 만들어 법 제정 이전 유족들의 행위를 소급해서 처벌했다. 조상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 달라는 호소가 죄가 된다는 거였다. “‘빨갱이’ 유골을 발굴해서 이적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했다.”
대구, 밀양과 거창, 부산, 마산, 제주도 백조일손 유족회 대표 등 28명이 잡혀가 혁명재판에 회부되었다. 선고 형량은 사형 1명, 징역 15년 3명, 10년 4명, 7년 2명, 집행유예 3명.
세상에, 가족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하고 다닌 게 사형이라고? 그는 대구의 부유한 집안 출신 의사였는데 6·25가 터지자 예비검속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를 대신해서 처가 잡혀가 학살당했다.
4·19 이후 경북 유족회장을 맡아 처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려고 돌아다니다 박정희 정권에 붙잡혀 유족회 활동을 한 ‘죄’로 이번에는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10년 감옥살이하다 풀려나서 6년 뒤인 1978년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그 아들이 아버지 재심을 신청했고 2011년 대법원은 유족회 활동은 이적행위가 아니라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5·16 혁명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총무처 장관, 감사원장을 지낸 이석제는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5·16 후 박정희의 사상 문제가 불거지자 보도연맹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반공에 대한 의지를 미국에 보여주려 했다.’
박 정권은 특수범죄처벌법을 이용해 보도연맹 신원활동뿐 아니라 4·19 이후 활발해진 혁신정당, 노동조합, 학생운동 활동가들을 무려 4000여명이나 검거해서 쿠데타 정권의 안정을 꾀했다.
이렇게 해서 백조일손들은 다시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양민 수만 내지 십수만명을 학살한 이 희대의 사건은 철저히 묻혀 있다가 1999년 노근리 미군 학살사건이 드러나는 걸 기점으로 다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미군은 노근리 철길에서 피난민 300여명을 비행기로 폭격하고 굴다리에 숨은 이들을 사흘 동안 총으로 사살했다. 2000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했다.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의 무차별 폭격 등으로 많은 양민들이 죽었다. 단양 곡계굴에서 200명, 인천 월미도 100명, 포항, 서울 등 전국 여러 곳에서.
2005년 5월 국가기구 과거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한국전쟁 중 민간인 희생 사건들 조사가 시작되어 2010년 문을 닫을 때까지 약 5천명의 희생자가 확인되었다.
수십만명의 억울한 죽음들 중 겨우 5천명.
2001년, 경남 거창 신원면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첫 소송을 냈다.
1951년 2월9일 육군 11사단 9연대는 함양, 거창, 산청 등 지리산 남부에 출몰하는 공비를 소탕한다며 신원면으로 들어왔다. 덕산리 민가 78가구에 불을 지르고 주민 80명을 눈 쌓인 마을 앞 논으로 끌어내 사살하고, 다음날 인근 여러 마을들에 불을 지르고 소개시킨다며 끌고 가던 노약자 20명을 강변도로에서, 노약자·부녀자·어린이들 100여명을 계곡에서 사살하고 나뭇가지로 덮고 기름을 뿌린 뒤 불을 질렀다.
그 다음날은 면 주민 1000명을 초등학교에 모은 뒤, 군인, 경찰, 공무원, 청년단 가족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540여명의 주민들을 근처 계곡으로 끌고 가 사살하고 불을 질렀다. 10살 아래 아이들이 313명, 60살 이상이 66명, 그 사이가 340명, 모두 719명을 ‘군인 아저씨’들이 죽였다.
‘피고 대한민국’의 터무니없는 주장
2001년 시작한 거창양민학살사건 민사재판은 2008년 5월, 대법원에서 3년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유족들 패소가 확정되었다. 유족들은 국가가 끔찍한 불법을 저질러 놓고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민법 제2조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사건 직후 국가가 가해자를 형사처벌까지 했으므로 “피고 국가가 원고들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거나…객관적으로 원고들이 권리행사를 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출처 http://cafe.daum.net/mizesagun/NCLm/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