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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한국경제
게시물ID : sisa_2457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붱지
추천 : 4/3
조회수 : 754회
댓글수 : 265개
등록시간 : 2012/11/10 19:16:45

1. 친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처가 가능할 것입니다.

박정희는 63년10월, 67.5월 대통령선거에서 빨갱이 전력으로 표를 잃었지만 

그 누구도 만군장교 전력을 문제삼아 친일파로 비난받은 적이 없습니다. 

윤보선도 김대중도 친일파를 선거이슈로 삼은 적도 없고. 

그가 친일파라면 그를 뽑은 국민들은 친일파 대통령을 뽑은 것입니다. 

그 의미는 곧 그걸민들이 문제삼지 않은 국민들 자체가 바로 친일파 또는 용공분자 아니 용친일분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살아보지도 않고, 균형감각도 없는 지금의 진중권 같은 애숭이가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심판하는 것은 웃기는 얘기.



2. 문제는 박정희 경제에 대한 것인데 저기 나온 경기대 국제관계학과 류재갑 이라는 양반처럼 알지도 못하면서 

대만경제와 한국경제를 비교 평가하는 것은 조롱당해 마땅합니다. 망신, 비웃음을 자초하는 군요.


* 최근에 관치청산(유정호)이라는 얇은 책을 읽었는데 자유시장주의 입장에서 IMF직전까지의 한국경제를 

박정희식 관치경제로 규정짓고 대만식 자유시장경제와 비교하여 비하하고 있는데 근거들이 탄탄합니다.



1. 제가 볼 때, 박정희 경제의 특징은 차관도입경제, 중화학공업 완제품수출형, 투자주도형 성장위주 경제입니다. 

2. 흔히 비판자들은 박정희경제는 인위적인 중화학공업 투자에 의한 경기부양하다가, 

79년 2차 오일쇼크를 맞고 만성적 인플레, 외채급증과 중화학공업 투자부실로 파산을 맞이 했고 

이는 자유시장경제의 기본을 외면한 결과라고 평가합니다.


* 대만정부는 1,2차 오일쇼크에도 불구하고, 투자,오일쇼크에 의한 물가인상요인을 수입자유화와

금리안정화 관리를 하여 70년 중반 이후 한국을 누르고 경제성적의 격차를 점점 벌여나갔으며 

97년 외환위기때는 2,000억불의 외환보유고를 자랑하며 한국의 파산을 비웃었습니다.


* 79년에 경제기획원의 자유시장주의자인 강경식,김재익과 신임부총리 신현확이 박정희대통령에게 반란을 벌였습니다. 

그해 4월 박정희가 항복하고 안정화조치를 승인했지만, 이는 자신의 중화학공업과 수출주도경제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정치적 자살행위와 같았으니, 박정희는 신현확이 해외 출장간 틈을 타서 신현확을 밀어내고 김용환을 기용할려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10.26 피살됐지요.(대통령의 경제학. 이장규)


* 경제기획원은 전두환을 맞이하여 박정희식 관치경제를 종식시키고 안정화정책을 소신껏 펼쳐서 물가를 잡고, 3저호황을 누릴수 있었습니다.


* 그런데 전두환 경제기획원의 중화학공업 강제조정은 또 다른 부실이라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복수경쟁을 유도하고, 중복사업의 부실을 조정할 때, 부실사업을 끼워팔기 하여 국가의 손실을 최소화 했지만 

전두환은 5~6차에 걸친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을 하면서 채무상환연기, 구제금융제공, 금리특혜제공 등 

재벌들의 요구대로 퍼줌으로써 오히려 국민부담을 증가시켰습니다.(박영구 논문)


* 만약 박정희가 피살되지 않고 계속 성장주도정책을 썼으면 한국경제는 망했을까요?

* 전두환 이후의 경제를 박정희식 경제라고 볼 수 있나요? 

1997년 외환위기는 과연 박정희식경제의 침몰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볼 때 박정희 경제는 박정희의 중음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전두환 이후의 경제는 관치라고 해도 그 정도와 방향이 전혀 틀리지요.

* 2차 오일쇼크를 박정희경제 부실에 대한 변명으로 봐 줄 수 있을까요?


3. 순수 자유시장경제로는 박정희가 만든 현재의 중화학공업체제는 불가능합니다.

김재익은 1981년 비교우위론을 들어 현대 정세영한테 한국의 자동차산업을 포기하라고 종용했습니다. 

그 때 포기했더라면 다른 무엇인가 했겠지만, 그것이 현재의 현대자동차만큼 국민경제에 이바지 할 수 있었을까요?


4. 최근 정규재의 강의대로 월남특수가 끝나고, 미국의 닉슨이 금태환해제와 보호무역 및 케인즈식 경기부양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악화되고 그 여파로 한국의 기업들이 도산위기에 몰리자,

박정희가 1972년 8.3조치를 내리고 그에 대한 예상저항을 79.10월 유신의 철권통치로 짓눌렀습니다.


그리고 1974년 1차 오일쇼크로 외환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 때 한국의 전체 외환보유고가 1천만불 간당간당했지요.

경제부처 뿐 아니라 해외공관장들도 딸라를 구하려고 혈안아 되었고 1975년 현대건설의 사우디 주베일항만공사를 따내려고 

국가적 지원을 했을 정도로 절박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1976년 주베일항만공사를 따서 중동건설의 달라고 들어오고 투자해 놓았던 

중화학공업이 호경기를 맞아 1976,1977,1978년 약 3년동안 엄청난 호황을 누립니다. 


박정희의 유신2기 대통령 취임은 롤러코스트 속에 그렇게 무사히 치루었습니다만, 

그 때 초장에 확실히 긴축을 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나 봅니다.(남덕우 동아일보 회고) 


현대등 먼저 투자하여 재미 본 재벌을 보고 삼성 등 다른 놈들까지 왕창 들어가다가 

중복과잉투자, 인플레, 오일쇼크...결국 79년 2차 오일쇼크를 맞아 한국경제가 작살났습니다.


5. 박정희의 유신과 중화학공업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이미 8.3 조치 못하고 미적이다가 1차 오일쇼크때 파산했을 겁니다. 

또 1차 오일쇼크는 2기 중화학공업투자 결과와 중동건설로 넘긴 것입니다.


또한 박정희 경제는 관치의 부작용이라는 부채를 남겼지만, 

자유시장경제체제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었던 중화학공업이라는 귀중한 자산을 우리에게 남겨 줬습니다.



6. 대만은 정말 칭찬할 만한 경제실적을 보였습니다. 자유시장경제에 가까운 체제로서 모범을 보였지요. 박정희는 대만 보다 훨씬 못했습니다.


그런데 대만은 한국처럼 

① 금융 은행이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단지 이자율이나 환율을 탄력적으로...

② 노조를 확실하게 억눌렀습니다. 대만 기업들의 노조는 파업을 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지요.

③ 대만은 한국처럼 월남전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미국으로 부터 원조와 월남과의 무역으로

(기미야 다다시. 박정희정부의 선택)...또 대만은 일본처럼 한국전쟁의 덕을 보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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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만은 한국과 달리

① 총통 독재체제입니다. 대통령선거 안합니다. 정치,정책 안정. 민주적 포퓰리즘이 필요없는 독재체제. 박정희가 얼마나 부러워 했을까요.

85년(?)까지 계엄상태였습니다. (참고 : 1987년 7월 14일 24시까지 계엄 상태였음)

② 대만은 이미 1952년 대일강화조약, 1953년 일본과 국교정상화하여 기술도입, 투자유치 가능상태

③ 물론 대만은 1949년 본토로 부터 탈출할 때 엄청난 재화를 가지고 왔고,

1950~1970년대 까지 해외의 화교와 외국업체로 부터 부터 엄청난 직접투자를 유치했습니다.

(한국에는 화교같은 직접 투자하는 외국기업이 적었습니다.그래서 해외차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④ 대만의 화교는 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 미국 등의 판매,기술, 자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⑤ 대만은 명,청 시대 부터 일본과 중국본토를 대상으로 삼각무역을 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한국은 쇄국...한국은 해방후 일본이 만들어 놓았던 중국,만주-조선-일본의 교역이 두절되고, 다시 3.8선으로 남북이 가로막혀...

1948년 수출액은 1942년 수출액의 1.5%에 불과. 고립무원의 상태였습니다.)


이상입니다. 


대만과 한국을 어떻게 비교합니까. 

박정희는 진짜 맨 땅에 헤딩한 것입니다.

자본이 없었던 박정희의 한국경제는 차관도입경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박정희의 원조입니까?



IMF가 박정희의 관치경제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까?


IMF 외환위기는 박정희, 전두환 독재체제 하이라면 결코 발생될 수 없었던 사고였습니다.


IMF 외환위기의 원인은 노동법 정리해고조항과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한 것, 

기아사태를 처리 못한 김영삼과 김대중의 공동책임이고, 노태우의 민주화 이후 노동자들의 과잉임금인상투쟁등 

한국식 민주화에 의한 총체적 실패와 중국의 등장에 따른 인건비 경쟁력 저하. 이 3지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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