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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의 역사 - 서울의 봄
게시물ID : bestofbest_389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rogba
추천 : 153
조회수 : 27280회
댓글수 : 6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0/08/03 17:15:03
원본글 작성시간 : 2010/08/03 07:15:31
1979년 10월 26일.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한 독재자가 죽은날.

대한민국은 대혼란에 빠진다. "야수의 심정으로 독재의 심장을 쐈다" 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바로 체포되었지만 사태는 급박하게 흘러갔지.

그리고 한달이 조금넘은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최측근인 9사단 사단장 노태우를 필두로 영남지방 군인들의 비밀조직인

하나회를 동원해서 군사반란을 다시 일으킨다. 빠른속도로 움직인 그들은 국방부 장관을 포함해

군의 주요 지휘관을 모조리 체포. 군을 장악하고 권력을 탐한다.

 하지만 미국의 경고.

다시한번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노리는 인물이 나오는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경고에

전두환의 의지는 꺾이고 곧바로 권력을 탈취하는것에 실패한다.

 
최규하 대통령이 선출되고 1980년이 되자 대한민국은 조용히 뜨거워진다.

10 여년전 체코에서 불었던 민주화의 열망. 그것이 대한민국에서도 불기 시작한것이다.

"서울의 봄" 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의 신군부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날로 커져갔지만 전두환은 박정희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며 권력을 탐한다.

전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는 들불같이 일어났고 시민들의 거센요구에 전두환은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1980년 5월 15일.

전국적인 민주화 요구는 최고조에 달했고 그 선봉에는 언제나 그래왔듯 대학생들이 있었다.

5월 15일에 대학생들은 하나둘 서울역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곧 어마어마한 수의 시위대가

서울역에 집결하고 수십만에 달하는 시위대의 모습에 시민들은 4.19 혁명을 떠올리며 어쩌면

진짜 서울의 봄이 올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특히나 미국의 견제때문에 대놓고 대학생들을 진압할 수도 없는 전두환은 최대 위기에 몰린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각 대학의 학생회장들이 시위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회의가 열린다.

하지만 이때 서울대의 총학생회장은 시위대의 해산을 제안한다. 그의 주장은 그랬다.

현재 수십만의 시위대는 통제가 불가능하며 어떠한 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위험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 각자의 학교로 돌아가서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일어나자.

그러나 서울대의 단과대 학생회장 한명이 격렬히 반대를 한다.

지금 흩어지면 끝장이다. 어떻게든 시민의 모인힘으로 민주화를 달성해야 한다.
 
우리가 분산되는순간 저들이 공격을 가할것이고 그렇게되면 민주화는 끝이다.

하지만 총학생회장의 발언권은 강력했고 단과대 학생회장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학생회장은 시위대의 해산을 명령. 시위대는 각 대학으로 흩어져서 돌아가버리고 만다.

뭉쳐진 거대한 시위대에 어쩔쭐 몰라하던 전두환은 시위대의 자진해산에 만세를 불렀고

5월 17일 자정을 기해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해서 각 대학에 휴교령을 선포

동시에 군을 동원해 각 대학을 급습해서 모든 대학생을 연행함과 동시에 지도부가 모여있던

이화여대 회의장을 습격. 지도부를 전원체포해서 독재의 기반을 완벽하게 확보한다.


그리고 다음날 5월 18일.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광주는 군에 의해 포위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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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에 의해 달성될 수 있었던 민주화의 열망은 이 "서울역 회군" 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광주의 비명과 함께 그렇게 사그라들었다.

이후 모조리 체포된 민주화 인사는 계엄령 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문익환 등 수십명의 인사는 모조리 실형을 선고받고 김대중은 홀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에서 모두가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민주화를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단 한명, 서울역 회군을

주도한 서울대 총학생회장만이 모든 혐의를 시인하고 자백내용을 인정한다.

이 사실이 가져올 결과를 알고있는 모두는 경악했고  민주화운동을 같이 주도했던 이해찬을 포함한

동지들의 울부짖음으로 법정은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단 한사람. 가장앞에서 사형을 받은

김대중만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 그동안 고생많았소. 동지. "" 라고 조용히 웃어줬다고 한다.

이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재철은 교사와 기자를 거쳐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당선. 현재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심재철을 제외한 나머지 민주화 인사들은 2003년이 되어서야 명예회복을 하게되고

김대중 대통령 본인은 자신의 임기가 끝난 2004년이 되어서야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명예가 회복된다.

당시 단과대 학생회장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말것을 외쳤던 유시민은 수많은 고난을 겪게되지만

굴하지 않는 활동을 계속해나갔고 결국 한사람을 만나고 떠나보낸다.


 

그리고 다시 우리앞에 나왔다.

 

서울의 봄. 끝.

http://gungungun.tistory.com/ 펌 (마지막에 조금 반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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