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은(특히 공중파) 지극히 보수적인 매체이다. 여기서 보수적이라 함은 표현 뿐 아니라 만들어지는 방식과 받아들여지는 방식 또한 포함한다. 방송심의는 현재 사후제로 진행되고 있다. 자체 심의를 통해 먼저 방송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징계나 주의 등의 절차를 통해 제재하는 식이다. 사전심의라는 것이 생방송과 같은 것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할뿐더러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전국민에게 보편적 시청권이 보장된 매체라는 공중파 방송의 성격에서 교육적인 성격을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현실과 유리된채 명언이나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외치는 것 또한 시청자들을 계몽해야할 교육적 대상으로 보는 것에 다름없는 것이다. MBC <무한도전>에 대한 방송통신심의위의 징계 움직임은 문제가 된 <무한도전>의 자막이나 연출 이전에도 그보다 높거나 비슷한 수위의 다른 프로그램들이(<개그콘서트> 등 다른 예능 프로그램) 있었다는 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저급함 문제 삼은 방통심의위, 시청자는 계몽의 대상인가 문제는 수위다. 심의(censorship)와 표현의 자유는 특히나 공중파 방송에서 긴장관계에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표현의 수위라는 것은 법원이나 정부의 판단 보다는 사회적 통념에 기인한다. 법원이나 심의기관은 그런 사회적 통념을 ‘대리’하여 대중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표현을 제재하는 것이다. 그 대리의 권한은 우리가 부여한 것이니 정치적 의도를 운운하며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표현의 자유는 가장 최후까지 지켜져야할 권리이자 언론의 의무라는 것이다. 징계의 이유라고 주장되는 표현의 ‘저속함’은 말 그대로 여러 가지 표현 중에 하나일 뿐이다. ‘저속함’이라는 단어에 매몰되서는 안된다. 역사적으로 저속함 혹은 저급한 것이라는 표현은 풍자와 비판을 통념이라는 부정확한 잣대에 기대 억압하는 수단으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육덕진 대사와 저속한 단어가 펼쳐졌던 우리 고유의 ‘마당놀이’ 등은 양반 계급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통해 보수적인 사회에 균열을 일으켰다.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는가가 사실 더 중요하다.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인터넷 방송 ‘나는 꼼수다’(김용민, 김어준 진행)가 찬사를 받는 이유는 그들의 정제되지 않은 ‘막말’이 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있는 것 이외에, 그들의 ‘저급한’ 말 자체가 가지는 파괴성 때문이다. 표현과 내용은 함께 전달된다. 내용이 권위주의에 반하는 것이면, 짐짓 점잔빼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도 그 내용을 최대한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선택하는 것이 맞다. 키득대며 서로 웃는 ‘저급한 농담’에서 대중들은 연대감을 느끼며 감정적으로 이입하게 되는 것이다. <무한도전>을 즐겨보는 시청자들이 그들의 ‘막돼먹은’ 행동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부족한 이들끼리 서로 만나 애정어린 비난과 장난을 일삼는 것에 ‘불쾌하다’고 느끼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보통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그것보다 더한 행동들을 하지 않는가.
'어떻게' 가 더 중요한 말…'나꼼수'의 욕이 주는 효과
점잔빼지 않고 세월이 준 연대감을 과시하며 마이너한 감수성을 공유하는 <무한도전>에 대한 환호는 ‘나는 꼼수다’에 대중이 환호하는 것과 어찌보면 같은 맥락이다. 대중을 계몽하고 교도하려는 보수화된 사회에 마이너한 캐릭터들의 연대와 거침없는 행동, 말은 지배층이 기대고 있는 권위주의를 조금씩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나는 꼼수다’와 <무한도전>에 대한 징계 및 제재 움직임은 그런 의미에서 공교롭다. 대중들은 훨씬 더 저급한 것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저급한 수위로 따지자면 한나라당 강용석의원의 ‘여자 아나운서’ 운운이 훨씬 더 저급하다 못해 추잡하다. 심지어 징계 또한 무산되었다. 단지 (심의 권력을 쥐고 있는) 그들이 보기에 ‘불편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도 불편할까.